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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에게[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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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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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에게 - 조지훈(1920∼1968)


어딜 가서 까맣게 소식을 끊고 지내다가도/내가 오래 시달리던 일손을 떼고 마악 안도의 숨을 돌리려고 할 때면/그때 자네는 어김없이 나를 찾아오네. (중략)

생에의 집착과 미련은 없어도 이 생은 그지없이 아름답고 지옥의 형벌이야 있다손 치더라도/죽는 것 그다지 두렵지 않노라면/자네는 몹시 화를 내었지.
자네는 나의 정다운 벗, 그리고 내가 공경하는 친구/자네는무슨 말을 해도 나는 노하지 않네./그렇지만 자네는 좀 이상한 성밀세./언짢은 표정이나 서운한 말, 뜻이 서로 맞지 않을 때는/자네는 몇 날 몇 달을 쉬지 않고 나를 설복하려 들다가도/내가 가슴을 헤치고 자네에게 경도하면 그때사 자네는 나를 뿌리치고 떠나가네. (후략)

아프기 좋은 계절이 됐다. 작은 아이도 아프고, 큰 아이도 아프고, 더 큰 엄마와 아빠도 아프다. 아플 때 나는 더 아픈 사람을 생각한다. 치졸한 비교의 우위를 점할 생각은 없다. 아플 때, 먼저 아픈 사람의 말은 약이 된다.

시인 중에는 강건해 말술을 들이켜도 끄떡없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체질이 약해 기침을 달고 산 이도 있다. 조지훈은 건강한 편은 아니었다. 명문가의 후손으로 태어났고, 학문적 수준이 높은 할아버지로부터 좋은 교육과 영향을 받은 시인이었다. 시도 우아하고 전통적이어서 인생도 작품도 기품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또 얼마나 활발했는지, 조선어학회 사전 편찬을 돕고 민족문화 발달에 기여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병약한 체질이 내내 그를 괴롭혔다. 그래서 이 시가 탄생했다. 지긋지긋하게 찾아오는 병마에게 ‘자네’라는 호칭을 붙인, 이 위트 넘치는 시 말이다.

시인은 악다구니 얼굴로 병을 저주하거나, 너절한 얼굴로 병에게 구걸하지도 않는다. 병이 오면 감당하고, 힘들면 반성하고, 병이 갈 때는 가볍게 기뻐하지 않는다. 병에 대한 도사급 처신이라고 할까. 오죽 앓았으면 이런 성찰이 가능할까 싶어 안타깝다가도, 배울 점이 있어 무릎을 치게 된다. 전문을 소개 못 해 안타까울 뿐이다.

나민애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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