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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벽서 돌 뚝뚝 떨어지는 아파트, 한번 살아보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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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외벽에서 돌 조각이 수시로 떨어집니다. 보행자들은 이동 시 안전사고에 유의해주세요."

최근 서울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선수촌아파트 310동 앞 보행로에 이런 내용의 경고문과 함께 출입 통제 구역이 생겼다. 올여름에는 사람 주먹만 한 돌 조각이 떨어져 소방차가 출동하기도 했다. 주민들은 "이 상태로 방치되면 인명 사고도 시간문제"라며 우려한다. 하지만 이 아파트는 최근 재건축 안전 진단에서 '재건축 불가' 판정인 C등급(유지보수)을 받았다. 주민 김모씨는 "정부는 '당장 붕괴 위험은 없다'며 재건축을 막고 있는데, 당국자들이 이런 아파트에 살아 보고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서울의 재건축 초기 단계 아파트들이 잇따라 안전 진단에서 탈락하고 있다. 정부가 작년 3월 관련 평가 항목 중 '주거 환경' 비중은 낮추고 '구조 안전성' 비중은 높인 영향이다. 살기 불편하더라도 무너질 우려만 없다면 재건축을 승인하지 않겠다는 취지다. 하지만 2015년에는 정부가 재건축을 활성화하겠다며 주거 환경 비중을 높이고 구조 안전성 비중은 낮췄다. 불과 3년 사이에 정책 기조가 손바닥 뒤집듯 바뀐 것이다.

2003년에 도입된 재건축 안전 진단 제도는 정권 따라 수시로 바뀌고 있다. 노무현 정부가 요건을 강화했지만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완화했고 문재인 정부 들어 다시 노무현 정부 수준으로 강화됐다. 국민 안전을 위해 만든 장치가 정권의 정치적 도구로 전락했다는 비판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5년 단위로 안전 진단 기준이 바뀌어서는 국민 안전 보장이라는 제도 본연의 의미가 퇴색될뿐더러, 집값 안정에도 도움이 안 된다"고 지적한다.

깐깐해진 안전 진단, 입주민 피해 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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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선수촌아파트는 서울 강남권에 몇 안 남은 5000가구 이상 초대형 재건축 단지다. 5540가구를 헐고 1만2000여 가구로 새로 짓는 것이 입주민들의 계획이었다. 단군 이래 최대 재건축인 둔촌주공아파트와 비슷한 규모다. 하지만 안전 진단 문턱을 못 넘으면서 재건축은 상당 기간 지연될 가능성이 커졌다.

강북 대표 재건축 단지로 꼽히는 노원구 월계동 월계시영아파트(미성·미륭·삼호3차)도 이달 중순 안전 진단에서 C등급을 받았다. 3930가구 규모인 월계시영은 주변 광운대 역세권 개발 호재도 있어 한동안 실수요자, 투자자들의 관심이 집중됐던 곳이다.

강남과 강북을 대표하는 '재건축 잠룡'들이 잇따라 안전 진단에서 탈락하면서 다른 아파트들도 안전 진단 통과를 장담하기 어려워졌다. 현재 마포구 성산동 성산시영아파트(3710가구)와 목동 신시가지 1~14단지(2만6629가구)가 안전 진단을 신청했거나 준비 중인 대표 단지로 꼽힌다.

안전 진단이 막히면 아파트 주민들은 불편함을 감수하고 살아야 한다. 지금 안전 진단을 준비 중인 아파트 대부분이 1980년대에 지어졌다. 수도관이 낡아 녹물이 나오고, 바닥이 얇아 층간 소음도 심하다. 무엇보다 주차 공간이 부족해 출퇴근 시간이면 주차 대란이 벌어진다. 성산시영에 사는 30대 직장인 안모씨는 "이중, 삼중 주차가 일반적이어서 일찍 출근해야 하면, 전날 저녁에 일부러 늦게 귀가할 때도 있다"고 말했다.

정권 따라 오락가락

안전 진단은 주거 환경, 구조 안전성, 건축 마감 및 설비 노후도, 비용 분석 등 4가지 항목을 가중 평가하는 방식이다. 정부는 작년 3월 주거 환경의 가중치를 40%에서 15%로 낮추고, 구조 안전성 가중치는 20%에서 50%로 높였다. 살기 불편하더라도 구조적으로 문제없으면 재건축을 허가하지 않는 것이다.

재건축 안전 진단 규정은 과거에도 정권 따라 바뀌었다. 2006년 노무현 정부는 구조 안전성 비중을 높이고 주관적 평가가 가능한 주거 환경의 비중을 낮췄다. 하지만 이명박·박근혜 정부 들어 구조 안전성 비중은 낮추고 주거 환경의 비중은 높였다. 2015년에는 재건축 연한도 40년에서 30년으로 낮췄다. 이후 재건축은 활발히 진행됐다.

정권 입맛 따라 안전 진단 규정이 바뀌면서 재건축 대상 아파트 입주민들은 혼란을 겪고 있다. 올림픽선수촌아파트는 기존 방식대로 평가하면 총점 48.4로 재건축 가능한 D등급(30~55점)이다. 하지만 바뀐 기준을 적용하면 60.24점으로 C등급이다.

재건축 3종 규제, 공급 부족 심화해

전문가들은 안전 진단 규제가 재건축 초과이익 환수제 및 분양가 상한제와 맞물리며 서울 새 아파트 공급 부족을 심화할 것으로 우려한다. 초과이익 환수제와 분양가 상한제가 재건축 막바지 단계 아파트들의 사업을 늦추는 효과가 있는 반면, 안전 진단 규제는 초기 단계 진입장벽을 높인다.

특히 조합이나 추진위원회 같은 대표단체가 설립되기 전에 이뤄지는 안전 진단은 주민들이 돈을 걷어서 비용을 충당하기 때문에 한 번 떨어지면 재도전이 어렵다. 올림픽선수촌아파트는 안전 진단을 위해 입주민들에게서 3억원을 걷었다. 심교언 건국대 교수는 "기존 재건축·재개발 아파트들의 입주가 끊기는 2~3년 후부터 서울 새 아파트 공급 부족은 더 심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상우 익스포넨셜 대표는 "시중 유동자금이 넘쳐나는 상황에서 재건축이 막히면 기존 아파트 몸값만 높아진다"고 말했다.

[서울에 붕괴 위험 아파트 36개 동]

정부와 서울시가 집값 억제를 위해 재건축, 재개발을 틀어막고 있는 사이 30개 동(棟) 이상의 서울 아파트가 붕괴 위험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민경욱 자유한국당 의원이 서울시로부터 제출받은 '안전취약시설물 D·E등급 현황' 자료에 따르면 올해 9월 말 기준 서울 아파트 36개 동이 D 또는 E등급인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시 등급은 재건축 안전 진단과는 다른 것으로 D·E등급이면 구조적 결함이 있는 것으로 본다. 특히 E등급은 즉각 사용을 금지하고 보강 또는 개축을 해야 하는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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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찔한 아파트 - 안전 진단 E등급을 받아 붕괴 위험이 있지만 아직 철거되지 않은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 남서울아파트. /김연정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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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등급에 맞는 적절한 조치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예컨대 1974년 입주한 영등포구 신길동 남서울아파트 13개 동은 E등급으로, 사용 금지와 개보수가 시급하지만 아직 사람들이 살고 있다. 외벽 곳곳에 균열이 있고 누수나 단열 문제도 심각하다. 이 아파트는 2005년 재난위험시설로 지정됐고 2017년 안전 진단 E등급을 받았다. 주변 단독주택, 상가와 함께 재개발 구역으로 묶여 있어 독자적인 재건축은 안 된다. 재개발마저 조합원 간 갈등 때문에 10년 넘게 지연되고 있다. 권대중 명지대 교수는 "수리를 통해 견딜 수 있는 수준을 넘은 노후 아파트를 방치하면 사회적 문제가 된다"며 "붕괴 위험이 있는 아파트는 공공이 나서서 재건축을 도와야 한다"고 말했다.

정순우 기자(snoopy@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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