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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가 가던 술집, 손주가 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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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조선]
2010년 대 초 을지로와 달라
노상 음주문화로 손님 몰이
젊은세대의 공간으로 탈바꿈

조선일보

10월 8일 오후 10시 중구에 위치한 을지로 노가리골목. 노상(路上) 음주를 경험하려고 몰려든 방문객들로 북적였다./ 김소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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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휴일인 한글날을 하루 앞둔 10월 8일 저녁, 서울 중구 을지로3가역 3번 출구. 셔터 내린 조명가게와 공구점들 사이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를 따라 골목길로 들어가 보니 수백 개의 파란색 간이 테이블에 삼삼오오 사람들이 모여 있다. 테이블 위에 놓인 메뉴는 노가리와 생맥주. 이런 테이블들이 두 블록을 지나도록 죽 이어져 있다. 빽빽이 들어찬 테이블 사이를 손님과 종업원들이 헤집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곳 일대는 노가리를 파는 호프집이 몰려 있어 노가리골목이라 불린다. 1980년 12월 노가리를 메인 안주로 삼은 을지OB베어가 을지로 인쇄골목에 문을 연 것이 시초다. 이후 호프집이 하나둘씩 생겨 현재의 상권이 형성됐다. 2017년 옥외(屋外)영업이 정식으로 가능해지면서 비슷한 가게들이 20개까지 늘어났다. 이젠 인쇄소보다 호프집이 더 많이 보이는 골목이 됐다.

호프집이 많아졌어도 방문객이 넘쳐난다. 매일 밤 자리 경쟁이 치열하다. 이날도 오후 10시가 넘도록 밀려드는 방문객들로 골목길이 가득 찼다. 테이블 사이를 돌아다니며 앉을 곳을 찾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통행로에 서서 "사람이 이렇게나 많아"라면서 사진을 찍거나 영상 통화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20대부터 70대까지 연령대가 다양했다.

이곳 상권은 2010년대 초까지만 해도 노년의 단골들만 찾는 곳이었다. 그러다 2017년 노상(路上) 음주가 가능해지면서 인근 직장인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게 됐다. 최근 1년 사이엔 만선호프가 점포를 공격적으로 확장하면서 20·30대가 찾는 ‘핫플레이스’로 변신했다.

회사원 박모(25)씨는 "지난해 회사 상사를 따라 이곳에 왔다"면서 "1년 사이 직장인보다 내 나이 또래 고객이 많아진 것 같다"고 했다. 대학생 강유빈(25)씨는 "‘노가리골목 가자’는 친구들이 주변에 많다"면서 "아직 한 번도 경험하진 못했지만 이곳은 홍대나 이태원처럼 합석이 이뤄지는 곳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고 했다. 노가리골목이 해가 갈수록 인기를 끌고 고객층이 다양해진 비결을 분석했다.

1│ 옥외영업 허용한 중구청

노가리골목은 2000년대 전성기를 지나 2010년대 초까지 한동안 침체기를 맞았다. 침체기 가운데서도 불법으로 야외에서 영업하는 업소도 있었다. 한동안 업주들이 다른 점포의 불법 영업 실태를 신고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2017년 3월 "이대로는 안 된다"며 업주들 사이에서 뜻을 모아보자는 여론이 형성됐다. 노가리골목 호프집 업주들이 모여 ‘을지로 노가리호프 번영회(이하 번영회)’를 결성했다. 이후 질서 있는 옥외영업을 하겠다는 상인 간 자율협약을 맺고 중구청에 허가 신청을 냈다. 구청은 상권 활성화를 위해 호프집 앞 도로인 을지로11길, 을지로13길, 충무로9길, 충무로11길의 옥외영업을 허가했다.

그 결과, 노상 음주는 노가리골목의 마스코트로 자리잡았다. 전국적으로 노상 음주가 가능한 업장이 많지 않아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현재 일평균 3000여 명의 방문객이 이곳을 방문한다. 정규호 번영회장은 "옥외영업 허가 이후 해마다 방문객과 매출이 2배씩 늘고 있다"고 했다. 강원시, 대구광역시, 광주광역시 등 다른 지역에서도 노가리골목을 상권활성화의 모범 사례로 보고 관심을 가졌다.

2│ 노가리 20년째 1000원

노가리골목 일대 가게들은 호프집이지만 낮 12시부터 영업을 시작한다. 39년 전 노가리골목의 초창기를 함께한 60·70대 단골이 낮에 방문하기 때문이다. 덕분에 낮에도 가게를 비워 두지 않고 장사할 수 있다.

노가리골목 업주들이 노가리 안주 가격을 20년 가까이 1000원으로 동결한 것도 그 때문이다. 상권이 흥해도 변함없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단골들에게 신뢰를 주기 위해서다. 방주영 만선호프 사장은 "연세 드신 분들이 낮에 와서 노가리 한 접시와 생맥주 한 잔을 주문한다"면서 "그분들에겐 조그만 가격 인상도 부담스러울 수 있다"고 했다.

실제 노가리골목이 전성기를 맞은 것은 1997년 외환금융위기(IMF) 이후다. 1990년대 후반 직장인들이 경제난을 겪을 때 노가리골목의 저렴한 안주가 위로가 됐다. 당시에도 노가리 가격은 1000원 안팎이었다.

업주들에 따르면 노가리의 현재 원가는 1200~1300원 수준. 가게들이 200~300원의 적자를 보면서 파는 셈이다. 대신 원가 이상의 가격을 받는 다른 안주의 매출로 적자를 메우는 구조다.

3│ 젊은 세대 인기몰이 만선호프

만선호프는 노가리 상권의 인기를 체감한 이후 적극적으로 점포를 늘렸다. 2015년부터 매년 순차적으로 점포를 하나씩(2015년 2호점·2016년 3호점·2017년 4호점) 열었다. 그러다 최근 1년 사이 사업을 공격적으로 확장했다. 지난해 10월과 11월에 5호점과 6호점을 열었고, 넉 달 만인 올해 3월에 7호점을 열었다. 만선호프는 하루 평균 생맥주 100통, 병맥주·병소주 80궤짝을 판다고 한다.

만선호프가 사업을 확장할 수 있던 배경에는 젊은 세대의 소비력이 있었다. 만선호프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젊은 세대에게 인기 술집으로 알려졌다. 인스타그램에 만선호프(#만선호프)를 검색하면 4만1300여 개의 게시글이 나온다. 노가리골목의 원조 을지OB베어와 뮌헨호프를 검색했을 때의 1000여 개와 비교된다.

SNS 게시물을 보면 직장인이라고 보기 어려운 캐주얼 차림의 20·30대 여성들의 인증샷이 대부분이다. 출퇴근길에 들르기보다 친구들과 따로 이곳 을지로 일대를 찾는 젊은 세대가 늘고 있다는 방증이다.

다른 가게와 달리 메뉴도 다양하다. 노가리를 비롯한 마른 안주가 주메뉴인 다른 업장들과 달리 이 가게는 마늘 치킨을 또 다른 대표 메뉴로 내세우고 있다. 이외에도 골뱅이, 떡볶이 등을 판매한다.

plus point

만선호프·을지OB베어…‘같은 성공, 다른 사정’

노가리골목 호프집들은 얼핏 보면 대동소이하다.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목재식 가구와 간이 테이블들로 실내외가 꾸며져 있다. 단순한 인테리어에 초행길엔 여러 가게를 구분하기 어렵다. 하지만 가게별로 저마다 특색이 있고, 그만큼 사정도 다르다.

만선호프는 노가리골목 일대에 점포를 7호점까지 늘렸다. 4호점과 5호점은 합친 상태라 현재 6개의 가게가 이 골목에 있다고 한다. 장사가 어려워 월세를 내지 못하던 갈빗집이나 공구점 같은 곳들을 인수해 술집으로 탈바꿈한 결과다.

규모가 큰 덕에 젊은 세대의 주목을 받기도 수월했다. 외부에서도 명성을 이어받고자 체인점을 열겠다고 찾아오는 사람이 많다. 현재 강남구 개포동, 대구광역시, 부산광역시에 체인점이 있다. 부산 체인점은 다비치안경 사주의 친척이 직접 만선호프를 찾아 영업 비결을 전수받고 다빈치빌딩에 연 가게로 알려졌다.

반면 이 골목의 원조인 을지OB베어는 건물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했다. 지난해 건물 계약 만료를 두 달 앞두고 건물주에게서 재계약 불가 통보를 받았기 때문이다. 지난해 9월에 명도 소송에 걸려 지난 5월 패소했고, 이후 항소를 진행 중이라고 알려졌다. 을지OB베어는 전통이 깊어 사라질 경우 단골들의 아쉬움을 자아낼 곳이다. 노가리 안주와 초장을 처음 개발했고, 건전한 음주문화를 위해 한결같이 오후 10시에 문을 닫는 원칙을 세웠다.

마찬가지로 1989년 영업을 시작해 오랜 역사를 지닌 뮌헨호프도 재개발로 골치를 앓고 있다. 노가리골목의 절반은 재개발 예정지인 수표도시환경정비구역에 포함돼 있다. 노가리 골목의 도로변에 위치한 블록들이 해당하는데, 여기에 뮌헨호프도 껴있다. 뮌헨호프 사장이기도 한 정규호 을지로 노가리호프 번영회장은 "서울시가 을지로 일대 재개발을 올해 말까지 보류하고, 재개발 여부를 전면 재검토하기로 하면서 한시름 놨다"고 했다.

[김소희 이코노미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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