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3.19 (화)

데이터 대결… 군사 레이더 기술이 야구를 바꾸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류현진 부활도, 키움 돌풍도 ‘트래킹 데이터의 힘’

공 궤적ㆍ회전수 등 현미경 분석 ‘스마트 야구’ 시대
한국일보

SK의 훈련 때 구단 데이터 팀에서 랩소도로 타격을 측정하고 있다. SK 제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아시아 투수 최초로 평균자책점 1위(2.32)를 차지한 ‘코리안 몬스터’ 류현진(32ㆍLA 다저스)은 올 시즌 경기 중 더그아웃에서 수첩을 보고 상대 타자의 데이터를 참고하는 모습을 종종 보였다. 원래 류현진은 데이터보다 당일 컨디션에 따라 공을 뿌리는데 익숙한 투수다. 하지만 이번 시즌엔 상대를 철저히 연구하고 마운드에 올랐다. 릭 허니컷 다저스 투수코치는 류현진을 “숙제 잘하는 선수”라고 칭찬했다. 꿈의 1점대 평균자책점을 찍다가 8월 한 달간 7.48(21이닝 18실점)로 무너졌을 때도 반등 해법을 데이터에서 찾았다. 투구 궤적을 확인할 수 있는 트랙맨의 트래킹 데이터(Tracking Data)를 통해 주무기 체인지업이 부진했던 기간 홈 플레이트에서 3인치(약 7.6㎝) 정도 벗어난 걸 확인했다. 문제점을 파악하고 조정 작업에 들어간 류현진은 9월 평균자책점 2.13(25.1이닝 6실점)으로 위력을 되찾았다.
한국일보

[저작권 한국일보] 8월→10월 달라진 류현진의 체인지업/ 강준구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KBO리그도 이젠 이름값으로 지휘봉을 잡는 시대가 갔다. 올해 팀을 ‘가을 야구’에 올려놓은 사령탑 3명 염경엽(51) SK 감독, 장정석(46) 키움 감독, 이동욱(45) NC 감독은 스타 출신은 아니지만 데이터를 제대로 활용할 줄 아는 ‘스마트’한 지도자들이다. 하위권으로 떨어져 새로운 수장을 찾았던 팀들 역시 대세를 따랐다. 삼성은 김한수(48) 감독과 계약 만료 후 사령탑에 무명 선수였던 허삼영(47) 전력분석팀장을 선임했다. 김기태(50) 감독이 성적 부진을 책임지고 시즌 중 물러난 KIA는 창단 후 처음으로 외국인 감독 맷 윌리엄스(53)를 선택했다. 삼성, KIA의 새 감독 후보군에 레전드 출신들도 있었지만 외면 당했다. 롯데는 사령탑 선임에 앞서 단장에 간판 타자 이대호(37)와 동갑인 성민규(37) 시카고 컵스 스카우트를 앉혔다. 선진 야구를 접한 성 단장은 바로 데이터를 전담하는 R&D팀과 선수들의 몸 상태 및 영양을 데이터화해 관리하는 스포츠 사이언스팀을 신설했다.
한국일보

키움 김웅빈(오른쪽)이 김창현 전력분석원에게 상대 투수의 정보를 듣고 있다. 키움 제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3세대 데이터 야구’ 빅리그 수준을 높이다

데이터 야구의 중요성은 2011년 영화 ‘머니볼’을 통해 잘 알려졌다. 이 영화는 적은 운영 예산 때문에 약팀으로 추락했던 오클랜드가 빌리 빈이 단장으로 부임해 예일대 경제학과 출신 피터 브랜드와 함께 팀을 저비용 고효율로 포스트 시즌에 진출하는 강팀으로 만든 과정을 다뤘다. 당시는 타율 출루율 자책점 등 선수의 기본적인 기록 수치를 가지고 분석하는 수준이었다. 구분하자면 김성근 전 감독으로 대표되는 20세기의 분석야구가 ‘데이터 야구 1세대’라면 이후 통계적 분석과 경기 영상까지 활용하는 ‘2세대’가 열렸다. 현재는 군사용 레이더 기술로 스포츠의 모든 움직임을 추적해 데이터화 하는 ‘3세대’다. 투수가 던진 공의 궤적은 물론 공의 회전수와 회전축, 직구의 경우 상하좌우 무브먼트, 디딤발 위치의 변화, 릴리스 포인트 등까지 분석해 활용한다. KBO리그는 현재 트랙맨 레이더로 볼(투구ㆍ타구) 트래킹을 하고 있고, 메이저리그는 볼 트래킹에 더해 선수(수비ㆍ주루) 트래킹도 활용하고 있다.

홈런이나 타율, 출루율 등 단순 기록이 선수들의 시험 성적표라면 트랙맨 데이터는 문제 풀이과정을 확인시켜주는 장치에 가깝다. 경기 과정을 데이터화 시켜 선수들이 더 좋은 투구, 더 좋은 타격, 더 좋은 수비를 할 수 있도록 자료와 통계 분석을 제시한다. 투수가 던지고 타자가 상대하는 플레이 한번 당 나오는 데이터는 약 80개다. 이를 위해 레이더가 수집하는 기본 샘플 데이터까지 합치면 초당 수 만개에 달한다. 현미경이라는 수식어도 부족할 정도로 데이터가 야구를 대해부하는 것이다. 경기장 곳곳에 고정해 설치하는 트랙맨 장비와 달리 이동이 가능한 훈련용 측정 장비 ‘랩소도’ 등도 자주 이용된다.

3세대 데이터는 야구를 바꿔놨다. 메이저리그는 타자들이 퍼 올리는 어퍼 스윙(Upper Swing)으로 장타를 노리는 ‘뜬 공 혁명(Flyball Revolution)’의 시대로 이어졌다. 타구 데이터를 수집ㆍ분석한 저명한 야구 통계학자 톰 탱고의 연구로 특정 각도와 빠른 속도를 지닌 타구가 득점과 연결된다는 것이 확인되면서 변화가 일어났다. 빅리그 타자들이 삼진을 두려워하지 않고 풀스윙으로 많은 장타를 생산하고 있다. 실제 메이저리그의 홈런은 데이터 야구로 인한 ‘뜬 공 혁명’이 본격화하기 시작한 2016년 5,000개를 돌파했고, 올 시즌엔 역대 최다인 6,776개가 쏟아졌다.

투수들 역시 데이터 통계로 투수의 전략을 설계하는 ‘피치 디자인(Pitch Design)’의 시대가 왔다. LA 다저스와 탬파베이, 휴스턴은 타자들의 어퍼 스윙을 높은 직구(High Fastball)로 무너뜨린 대표적인 팀이다. 특히 휴스턴은 강력한 직구를 갖고 있으면서도 성적이 따르지 않던 투수들을 영입하고 볼 배합을 개조해 리그 최고의 투수들로 만들어냈다. 휴스턴의 전략은 강한 직구를 높게 던지고 종으로 떨어트리는 변화구로 스트라이크 존 상하를 공략하는 것이었다. 아메리칸리그 사이영상을 두고 집안 싸움을 하고 있는 저스틴 벌랜더와 게릿 콜이 큰 효과를 본 주인공이다. 둘은 올 시즌 나란히 20승-300탈삼진을 달성했다.

첨단 장비 도입 이후 빅리그의 수준도 높아졌다. 팀 홈런 200개 이상을 치는 팀들과 시속 160㎞ 광속구를 뿌리는 투수들이 늘어났다. 트랙맨 데이터 분석을 담당하는 신동윤 애슬릿 미디어 이사는 “과거 슈퍼 스타들은 데이터 분석 없이도 천재적인 감각과 경험으로 탁월한 경지에 도달했다”면서 “데이터의 목적은 그들을 넘어서는 게 아니라 그들의 90% 수준까지 다른 선수들도 보편적으로 따라가 리그의 수준을 높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국일보

투수들이 상대 타자의 약점을 확인할 수 있는 데이터. 왼쪽부터 포수/타자 시점에서 범타/안타/헛스윙/파울 타석 데이터다. 해당 타자는 오른쪽 아래로 떨어지는 변화구에 약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KBO리그도 데이터 야구의 시대로

한국의 KBO리그도 데이터에 눈을 뜨고 있다. 과거에도 1세대 데이터를 활용하기는 했지만 메이저리그의 성공 사례를 보면서 각 구단들은 데이터 구축을 위해 대폭 투자했다. 지난해 2월 삼성이 트랙맨 데이터를 구매한 것을 시작으로 올해까지 9개 팀이 사용 중이다. 트랙맨을 유일하게 사용하지 않는 KIA는 다른 기기인 플라이트 스코프를 통해 데이터를 수집, 분석한다.

데이터 전문가들에 따르면 현재 데이터를 잘 활용하고, 현장에서 열린 자세로 수용하는 팀은 키움, SK, NC가 대표적이다. 키움의 장정석 감독은 데이터에 따른 현란한 선수 운용으로 이번 포스트시즌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장 감독은 “전력분석팀에서 지속적으로 다양하게 데이터를 줘 ‘확률이 맞다’는 걸 정규시즌 때부터 느꼈다”며 “단기전에서도 데이터를 종합해서 결정하고 있다”고 밝혔다.

SK와 NC도 코칭스태프나 선수 모두 데이터에 친숙하다. 배원호 SK Data분석그룹 매니저는 “염경엽 감독과 손혁 투수코치 등 현장 지도자들이 선수들의 구속, 회전수, 타구 속도 등을 체크하며 컨디션 관리에 적극 활용한다”고 말했다. 또 선수들에게 데이터를 전달하는 박윤성 매니저는 “외국인 타자 제이미 로맥은 거의 매일 리포트를 받아 약점과 슬럼프를 극복하는데 활용했고, 미국 야구를 경험한 마무리 하재훈은 투구할 때마다 던진 공의 회전수를 점검한다”고 덧붙였다. 데이터는 실시간으로도 확인 가능해 경기 중에서도 참고할 수 있다. 또 이 실시간 데이터는 즐거운 훈련 분위기도 조성한다. SK 타자들은 배팅 훈련 때 랩소도로 측정된 타구 속도로 종종 내기를 하곤 한다.
한국일보

특정 투수의 날짜별 투구 데이터. 숫자로 가장 좋을 때와 안 좋을 때를 확인할 수 있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이동욱 NC 감독은 데이터팀과 고민을 나누고 도움도 요청한다. NC 수비코치 시절부터 데이터에 많은 관심을 나타냈던 이 감독은 시즌 초 타순 고민이 많았을 때 “박민우와 나성범을 붙여보면 공격력이 더 좋아지는지 검토 좀 해달라”고 데이터팀에 부탁했고, 시뮬레이션 결과를 보고 실전에 반영을 하기도 했다. 선수들 역시 데이터로 자신의 컨디션을 확인하려고 먼저 찾아온다. 데이터 활용 모범생은 사이드암 투수 원종현, 이재학이다. 임선남 NC 데이터팀장은 “아무래도 사이드암은 팔 높이에 민감하기 때문에 좋을 때와 안 좋을 때를 숫자로 확인할 수 있는 릴리스 포인트 데이터에 많은 관심을 갖는다”고 말했다.

NC는 자유계약선수(FA)를 영입할 때도 데이터로 계산기를 두드린다. 역대 최고액인 125억원(4년)에 리그 최고 포수 양의지를 데려오기 전 볼 배합을 분석했는데, 패턴이 읽히지 않는 것을 보고 과감히 지갑을 열었다. 포수의 볼 배합은 기계적으로 정해져 있진 않아도 예를 들어 직구-직구-변화구-직구처럼 어느 정도 패턴을 읽을 수는 있다. 임 팀장은 “양의지는 상대 타선, 투수 컨디션에 따라 변화를 많이 줘 리드를 하기 때문에 상대하기 힘든 포수”라며 “실제 두산과 포스트시즌에서 만났을 당시 우리가 많이 당했다. 그래서 우리 편에 오면 큰 도움이 될 것이라 판단했다”고 영입 배경을 밝혔다.
한국일보

KT 데이터팀이 주권의 투구 데이터를 체크하고 있다. 김지섭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막내 구단 KT가 창단 후 최고인 6위에 오르는 데에도 데이터의 힘이 컸다. 무엇보다 올 시즌 확 달라진 견고한 수비를 자랑했는데, 트랙맨 타구 데이터를 분석해 만든 시프트(상대 타자 특성에 따라 펼치는 변형 수비) 작전이 잘 통했다. 나도현 KT 데이터기획팀장은 “박정환, 박기혁 수비코치의 현장 경험을 토대로 시프트 기준을 만들었다. 내야수가 팔을 뻗어 잡을 수 있는 타구 각도 11도를 기준으로 삼아 내·외야 타구 데이터를 분류했다”면서 “인플레이 타구를 처리하는 수비효율성 지표가 지난해 10위였지만 올해 2위까지 올라왔다”고 설명했다.

삼성은 메이저리그에서만 볼 수 있었던 ‘수비 페이퍼’를 10개 팀 중 가장 먼저 활용하다가 타 구단의 이의 제기에 잠시 사용하지 못했던 해프닝도 겪었다. 야수들은 모자 안 또는 바지 뒷주머니에 상대 타자의 타구 분포도가 담겨 있는 메모를 보고 벤치의 지시 없이 스스로 수비 위치를 조절할 수 있다. 메이저리그는 야수뿐만 아니라 포수와 투수까지 상대 타자의 정보가 담긴 ‘커닝 시트’를 소지해도 문제삼지 않는다. 결국 KBO도 실행위원회 논의 결과, 단순 참고용 데이터가 있는 수비 페이퍼를 허용하기로 했다.

이처럼 현대 야구는 점차 데이터에 지배 당하고 있다. 하지만 데이터 전문가들은 “야구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고 입을 모은다. 야구는 결국 사람이 하는 게임이란 것이다. 임 팀장은 “데이터는 시험을 치르는 사람에게 공부하는 방향을 알려줄 뿐이지, 대신 시험을 봐주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나 팀장은 “데이터의 비중은 결국 50%를 넘지 않는다”며 “갈수록 야구에서 데이터 활용이 중요해지겠지만 결국 참고할 뿐이다. 올해 KT의 호성적은 이강철 감독 등 지도자들과 선수들이 만든 것”이라고 공을 현장에 돌렸다. 신동윤 이사도 “데이터는 그 동안 선수들이 경험으로 어렴풋이 알고 있지만 표현하지 못했던 내용을 확인시켜주는 새로운 ‘언어’”라며 “기존의 야구를 대체하는 것이 아닌 약간의 사고 변화가 필요할 뿐이다”로 데이터 야구를 설명했다. 박윤성 SK 매니저도 “데이터의 본분은 현장이 몰랐던 10%를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현장이 아는 90%에 확신을 갖게 만드는 것”이라며 데이터의 역할을 분명히 했다. 류선규 SK 데이터분석그룹장은 “데이터, 인재, 문화 3박자가 모두 맞아떨어져야 한다”며 “아무리 첨단 장비가 있어도 인재가 없으면 효과적으로 사용하지 못하고, 데이터를 잘 가공하더라도 현장에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강조했다.

김지섭 기자 onion@hankookilbo.com

차승윤 인턴기자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