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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정세 뒤흔든 8일…'일거양득' 터키와 '어부지리' 알아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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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시리아 알아사드 세력 과시하고 실리도 취해

美, 중동 영향력 감소·동맹 배신 후폭풍…러 중동 영향력 키워

쿠르드족 '독립국 건설' 꿈 또다시 물거품

연합뉴스

터키군의 공격을 받은 시리아 북동부 국경도시 탈 아브야드
[AFP=연합뉴스]



(이스탄불=연합뉴스) 김승욱 특파원 = 터키가 시리아 북동부에서 쿠르드족을 몰아내기 위한 군사작전을 개시한 지 8일 만에 5일간의 '조건부 휴전' 합의가 이뤄졌다.

교전 기간은 만 8일에 불과했지만, 그 짧은 기간에 시리아 내부의 세력 균형은 물론 중동 정세 자체가 크게 요동쳤다.

2011년 '아랍의 봄' 민중봉기로 촉발된 시리아 내전 이후 8년에 걸쳐 형성된 중동의 세력 판도가 8일 만에 지각변동을 겪은 것이다.

터키와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이 이끄는 시리아 정부는 세력을 과시함은 물론 실리도 함께 취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자신의 의도대로 시리아 주둔 미군의 철수 또는 재배치를 강행했지만 '동맹을 버린 배신자'라는 비판에 휩싸였으며, 중동에서 미국의 영향력 감소는 불가피할 전망이다.

반면, 미국의 빈자리를 꿰찬 러시아는 터키와 시리아 정부·쿠르드족의 충돌을 방지하는 역할을 했다. 중동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이 커질 것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세계 최대의 나라 없는 민족'인 쿠르드족은 이번에도 약자의 서러움을 맛봐야 했다. 인명피해도 뼈아프지만, 손에 잡히는 듯했던 '독립국 건설'의 꿈은 또 한 번 접어야 할 처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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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좌)과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
[AP=연합뉴스]



◇ 안보위협 제거하고 난민 해결까지…'일거양득' 터키

미국과 터키가 합의한 휴전 조건은 쿠르드 민병대(YPG)가 120시간 안에 터키가 설정한 안전지대 밖으로 철수하며, 터키군이 안전지대의 관리를 맡는 것이다.

이는 지난 8월 미국과 터키가 '시리아 안전지대'를 설치하기로 합의한 이후 터키가 미국에 요구한 조건과 일치한다. 미국이 터키의 요구를 그대로 수용한 것이다.

푸아트 옥타이 터키 부통령은 트위터에 "현장의 강력함과 협상 전략, 우리 지도자의 확고한 입장으로 터키가 승리했다"며 자축의 글을 올렸다.

뉴욕타임스는 '트럼프를 상대로 한 터키의 승리'라는 제목의 사설을 통해 "러시아, 이란과 마찬가지로 터키 대통령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었다"고 평했다.

터키는 시리아 북동부를 장악한 쿠르드족을 최대 안보 위협 세력으로 여겼다.

쿠르드족은 독립국을 가지지 못했지만, 그 수가 3천만∼4천만명에 이른다. 이 가운데 1천500만명 이상이 터키에 거주하고 있다.

CIA(미국 중앙정보국) 월드팩트북에 따르면 2018년 기준 터키 인구 8천100만명 가운데 쿠르드계 인구는 약 19%에 달한다.

국경을 맞댄 시리아 북동부의 쿠르드족이 독립국 건설의 기치를 올릴 경우 가장 큰 불안에 노출될 국가가 바로 터키인 셈이다.

이번 합의로 터키는 480㎞에 달하는 국경선을 따라 폭 32㎞(20 마일)의 안전지대를 설치하고 '눈엣가시'인 YPG를 몰아낼 수 있게 됐다.

터키는 최대 안보 위협을 제거하는 데서 한발 더 나아가 골칫거리인 난민 문제도 안전지대를 통해 해결할 계획이다.

터키는 지난 1일 안전지대 안에 140개 마을과 10개 지역 중심지를 조성하고 자국 내 시리아 난민 100만명을 이주시키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현재 터키는 시리아 난민 365만명을 수용 중이다. 지난 8년 간 난민을 보호하는 데 쓴 비용은 약 40조원에 달하며 이에 대한 내부 불만도 팽배한 상태다.

터키 정부는 시리아 국경과 접한 안전지대에 100만명을 이주 시켜 난민 문제를 해결하는 한편, YPG와 자국을 분리하는 완충지대로 활용한다는 포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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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 만비즈에 배치된 알아사드 정권 병사들
[AFP=연합뉴스]



◇ 북동부 무혈입성…'어부지리' 챙긴 알아사드 정권

알아사드 정권은 터키의 쿠르드족 공격으로 내전 발발 이후 통치력을 상실한 시리아 북동부에서 영향력을 회복했다.

어찌 보면 북동부에 무혈입성한 알아사드 정권이야말로 최대 승리자일 수 있다는 평도 나온다.

알아사드 정권은 2012년 여름 반군의 공격에서 수도 다마스쿠스를 지키기 위해 북동부에서 철수했다.

그 사이 쿠르드족은 북동부를 장악하고 사실상 자치를 누렸으나, 지난 13일 터키군의 압도적인 화력을 견디지 못하고 알아사드 정권에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알아사드 정권은 재빨리 북동부에 병력을 배치했다. 정부군이 북동부에 돌아간 것은 약 7년 만이었다.

알아사드 정권은 내전 기간 민간인 학살과 인종 청소, 화학무기 사용 등 숱한 전쟁 범죄를 자행했다는 의혹을 받지만, 터키와 쿠르드족 사이에서 어부지리를 챙긴 셈이다.

하버드 대학교 국제관계학 교수인 스테판 월트는 미국의 외교 전문 매체 포린 폴리시 기고를 통해 "이 문장을 쓰기 싫을 정도로 우울하지만, 알아사드 정권이 시리아 북부의 지배권을 되찾은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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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AFP=연합뉴스]



◇ 중동 영향력 축소…내부 논란 휩싸인 미국

터키의 쿠르드 공격은 사실상 미국의 묵인 아래 이뤄졌다.

미국은 수니파 극단주의 테러조직 '이슬람국가'(IS) 격퇴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쿠르드족을 보호하고 터키와 알아사드 정권의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IS 격퇴전이 공식 종료된 후에도 시리아 북부에 일부 병력을 배치했다.

그러나 해외 주둔 미군의 철수를 대선 공약으로 내세웠던 트럼프 대통령은 '돈이 너무 많이 든다'는 이유로 지난 연말부터 시리아 주둔군의 철수를 시도했다.

결국 미 백악관은 지난 6일 터키군의 시리아 북동부 군사작전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사흘 후 터키군은 시리아 국경을 넘어 쿠르드 공격에 나섰다.

양측의 충돌이 격화하자 트럼프 대통령은 '말려들지 않겠다'며 시리아 북부에 주둔 중인 미군 대부분을 철수시키고 일부만 교전 지역이 아닌 시리아 남부로 재배치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공약을 이행하는 대가로 미국은 영향력 감소를 실감해야 했다.

미국은 터키에 군사작전 중단을 요구했지만 터키는 꿈쩍도 하지 않았고 결국 터키의 요구를 다 들어준 후에야 조건부 휴전 합의를 도출할 수 있었다.

미국 내부에서도 함께 피를 흘리며 싸운 동맹을 배신했다는 비판이 가라앉지 않고 있다.

민주당의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과 척 슈머 상원 원내대표는 휴전 합의를 가리켜 "미국 외교정책의 신뢰성을 심각하게 훼손하고, 우리의 동맹과 적에게 우리 말을 신뢰할 수 없다는 위험한 메시지를 보냈다"고 비난했다.

여당인 공화당 내부에서도 비판 여론이 불거졌다.

밋 롬니 공화당 상원의원은 "오늘의 발표는 승리와는 거리가 멀다"며 "쿠르드족을 버린 결정은 우리의 가장 신성한 의무를 위반한 것이며, 우리가 쿠르드족에게 한 것은 미국 역사에 핏자국으로 남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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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타스=연합뉴스]



◇ 미국 빈자리 채우며 중동 영향력 키운 러시아

미국이 '더는 세계 경찰 역할을 하지 않겠다'며 시리아 북부에서 발을 빼자 러시아가 재빨리 빈자리를 차지했다.

러시아의 역할은 교전 후반부에 부각됐다.

내전 기간 알아사드 정권을 지원하며 시리아에 병력을 배치해 온 러시아는 미군 기지가 있던 시리아 북부 만비즈에 병력을 전개했다.

터키와 시리아 정부·쿠르드족이 만비즈를 사이에 두고 대치를 이어가자 러시아는 양측의 경계선을 따라 순찰 활동을 벌였다.

만비즈 주둔 미군이 해오던 충돌방지 역할을 러시아군이 맡은 것이다.

러시아군 관계자는 지난 16일 "러시아군이 만비즈와 그 외곽 지역에서 순찰 활동을 벌였다"며 "러시아 국기만 보면 전투가 자동으로 중단된다. 터키도 쿠르드도 우리에게 해를 끼치길 원치 않는다"고 말했다.

러시아는 알아사드 정권의 최대 지원 세력이다. 러시아의 지원이 없었다면 알아사드 대통령은 반군의 공격에서 정권을 지키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아울러 최근 미국과 갈등을 겪은 터키는 러시아산 S-400 지대공 미사일을 도입하는 등 친러 행보를 보였다.

양측 모두가 '신경 쓸 수밖에 없는' 존재인 러시아는 이번 교전을 통해 영향력을 더 키운 것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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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의 공격을 피해 이라크로 피란한 쿠르드족 소녀
[AP=연합뉴스]



◇ 생존 위해 알아사드와 손잡은 쿠르드…또 멀어진 '독립국 건설'의 꿈

미국의 배신과 압도적인 터키의 화력 앞에 쿠르드족은 또 한 번 나라 없는 민족의 서러움을 맛봐야 했다.

YPG가 주축을 이룬 시리아민주군(SDF)은 17일 터키의 공격으로 시리아 북동부에서 218명이 사망하고 650명 이상이 부상했다고 밝혔다.

영국 런던에 본부를 둔 시리아 내전 감시단체 '시리아인권관측소'는 터키의 공격이 시작된 이후 시리아 북부에서 30만명 이상이 피란길에 오른 것으로 추산했다.

기반시설의 파괴도 잇따랐다.

터키군의 공격이 집중된 탈 아브야드에서 단 한 곳뿐이던 공립병원은 운영이 중단됐으며, 150만명에게 생활용수를 공급하던 아룩 댐도 터키군의 포격에 파손됐다.

인명·재산피해도 막대하지만 터키군의 공격에서 살아남기 위해 알아사드 정권에 손을 내민 순간 독립국 건설이라는 비원(悲願)도 사실상 물거품이 됐다.

마즐룸 코바니 SDF 사령관은 지난 13일 포린폴리시 기고에서 "러시아·알아사드 정부와 협력하는 길을 택할 경우 고통스러운 타협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면서도 "타협과 학살 중 선택하라면 우리 민족의 목숨을 택할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kind3@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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