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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나치는 왜 티베트에 조사단을 보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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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생각] 강인욱의 테라 인코그니타

⑭티베트의 상웅국



최근 고고학 발굴을 통해서 이름만 알려진 티베트 최초의 국가인 ‘상웅국’과 3500년 티베트의 역사가 밝혀졌다. 티베트인들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고산지대에서 유목민의 후예로서, 아시아 일대의 여러 사람과 교류하며 독특한 히말라야 문명을 일궈낸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새로 발견된 상웅국은 서구와 중국의 틈바구니에서 핍박받으며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티베트인들을 재평가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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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가 주는 이미지는 신비롭고 아련하다. 독특한 그들의 예술세계, 아름다운 자연, 그리고 20세기엔 서구열강과 21세기엔 중국에 핍박받아온 티베트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 하지만 신비의 뒤편엔 무지가 있었다. 고고학자들의 노력으로 그동안 우리가 알던 티베트는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는 것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최근 고고학 발굴을 통해서 이름만 알려진 티베트 최초의 국가인 ‘상웅국’과 3500년 티베트의 역사가 밝혀졌다. 티베트인들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고산지대에서 유목민의 후예로서, 아시아 일대의 여러 사람과 교류하며 독특한 히말라야 문명을 일궈낸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새로 발견된 상웅국은 서구와 중국의 틈바구니에서 핍박받으며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티베트인들을 재평가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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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티베트의 고대 문명

티베트의 역사를 보면 최초의 국가는 상웅(장중 또는 상숭이라고도 불림)이라고 한다. 그들은 티베트 서부에서 기원전 1500년께부터 약 2천년간 존속했다가 손챈감포가 세운 토번왕국의 침략으로 서기 644년에 멸망했다고 한다. 해발 4500m의 히말라야 고원지대에 수천년간 고대 문명이 존재했다는 이야기는 수많은 탐험가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20세기 초반부터 수많은 서양의 탐험가들이 티베트를 답사하며 이 상웅국의 자취를 찾아내고자 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그러던 중 2004년에 티베트에서도 가장 험한 지역으로 꼽히는 인도 접경지역 응가리의 랑첸강 지역에서 토번왕국 이전에 사용된 거대한 성터 유적이 발견되었다. 전설로만 전해지던 상웅국이 드디어 그 실체를 드러낸 것이다. 이 지역을 흐르는 가루다강의 은빛 성채라는 뜻의 ‘궁륭은성’이라 불린 이 유적은 해발 4400m의 산 정상에 약 10만㎡에 걸쳐 120여기의 대형 건물이 세워졌던, 글자 그대로 천당의 도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그렇다면 이 상웅국 사람들은 어디에서 기원했을까. 첫번째 실마리는 상웅국의 종교로 이 지역에 불교가 들어오기 전부터 존재하던 토착 신앙인 ‘본’(Bon)이라고 한다. 이 본교는 이후 이 지역으로 유입된 불교와 결합하여서 티베트불교의 기반이 되었다. 그런데 본교에는 놀랍게도 고대 페르시아는 물론 인도와 유라시아 각 지역의 문화들이 고스란히 녹아 있음이 밝혀졌다. 러시아 티베트학자 브로니슬라프 쿠즈네초프에 따르면 본교의 최고신은 근동에서 발생한 조로아스터교 계통의 신인 아후라 마즈다다.

상웅국에 대한 기록은 불교가 들어온 뒤에 만들어진 것이고, 워낙 단편적이라 그 실체에 대한 자세한 추정은 어려웠다. 하지만 이 지역에서 발견된 유물이 상웅국에 대한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했다. 그 실마리는 수많은 고고학 발굴이 그러하듯이 우연히 이루어졌다. 서부 티베트에는 상웅국이 멸망한 뒤인 11~17세기 동안 존재했던 또 다른 은둔의 나라인 구거왕국(구게왕국)이 있었다. 17세기에 포르투갈 선교사가 방문하기 전까지 서방은 물론 중국에서도 그 존재를 몰랐을 정도로 베일에 싸인 국가였다. 1999년에 구거왕국을 조사하던 고고학자들이 그 주변에서 발굴한 묘지에서 유목민들의 동검을 발견했다. 계속된 조사를 통해서 그 일대에 중앙아시아 사카문화의 영향이 강한 적석묘(돌무지무덤), 황금 동물장식, 암각화 등도 다수 발견되었다. 사카문화의 주민들은 키르기스스탄과 카자흐스탄 지역에서 크게 번성했던 고대 페르시아 계통이었다. 중앙아시아의 사카 계통 사람들은 파미르 고원지대를 따라서 티베트 서부로 와서 상웅국을 세웠고, 일부는 남서쪽의 인도 북부로 퍼져서 샤키아족이 되었다. 석가모니의 출신이었던 샤키아족이 이들 유목민족의 일파라는 설이 유력한 배경이 여기에 있다. 더욱 놀라운 점은 티베트의 발굴 조사 결과 이 지역에서 최초로 유목경제가 등장한 시점은 약 3500년 전이라는 것이 밝혀진 것이다. 이는 상웅국의 시작 시기와 대체로 일치한다.

고원지대의 유목민들이 만들어낸 또 다른 문명

상웅국은 전설처럼 인구 천만명에 이르는 거대한 제국은 아니었다. 여러 부족의 연합국가로 토번왕국이 침략하던 즈음에는 꽤 거대한 국가로 발전한 상태였다. 상웅국을 만든 사카문화는 티베트에서 그치지 않고 높은 산맥을 따라서 더 남쪽인 윈난성과 쓰촨성, 나아가서 타이와 베트남의 북부 산악지역까지 퍼졌다. 유라시아 유목민이 사용하는 청동기와 동물장식이 이 지역에서 다수 발견된 것이 그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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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의 밀림 지역까지 유라시아 유목민이 퍼진 배경은 무엇일까. 지도상으로만 보면 도저히 성립하기 어려워 보이는 이러한 원거리 주민의 이주와 교역은 고원지대에 거주하던 유목민들의 생계와 관련 있다. 야크, 노새, 산양과 같이 고원지대에서만 사는 유목동물을 키우며 살던 고산지대의 사카인들은 자신들이 키우는 동물이 살 수 있는 환경과 비슷한 높은 산악지역인 티베트로 왔고, 이후 동남아시아로도 진출했다. 그 결과 그들은 이방인들은 쉽게 다닐 수 없는 고산지대를 따라서 서로 왕래하며 문화 교류의 루트를 개발했다. 티베트고원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험난한 산악지대의 교류를 상징하는 ‘차마고도’는 바로 3500년 전의 고원지대 주민들이 만들어낸 문화적 산물이다.

그런데 이 험난한 티베트 문명이 한반도 북부 및 만주와 관련이 있다는 가설도 있다. 실제로 티베트 지역은 돌로 만든 무덤, 동검, 토기 등 우연으로 보기는 힘들 정도로 많은 유물이 만주 일대의 비파형 동검 문화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중국의 저명한 고고학자인 퉁언정은 1980년대에 티베트에서 만주에 이르는 거대한 지역이 산맥을 따라 문화 교류를 했다는 대담한 이론을 제기했다. 퉁언정 교수는 이 이론을 제기한 직후 천안문 사태로 미국 망명을 한 탓에 더는 연구를 지속할 수 없었다. 하지만 21세기 들어 유라시아 각 지역에서 발굴이 활발해지고, 각 지역 간 교류가 우리의 상상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이루어졌음이 밝혀지면서 그의 설은 재평가받고 있다. 티베트는 결코 고립된 신비로운 지역이 아니라 고원지대를 따라서 유라시아의 각 지역과 다양한 네트워크를 형성해왔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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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즘과 오리엔탈리즘에 이용된 티베트

최근 티베트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다고 해도 여전히 신비로운 이미지가 강하다. 그런데 그 이면에는 서구의 열강과 중국의 지배로 티베트의 이미지가 왜곡되어온 역사가 있다. 20세기 초반 인종주의자들은 티베트 초기의 역사에 자신들이 상상한 ‘순수 아리안족’을 찾기 위해 접근했다. 초기 티베트인의 연구자로 추앙받은 이탈리아의 주세페 투치는 극렬한 무솔리니 추종자였고, 히틀러의 오른팔이었던 하인리히 힘러도 티베트로 탐험대를 파견했다. 그 밖에도 스웨덴의 스벤 헤딘, 니콜라이 레리흐 등 대부분의 서구 학자들은 인종주의에서 자유롭지 않다. 목숨을 걸고 티베트의 신비를 찾아 나선 사람들이 정작 인종주의자인 이유는 그들이 20세기 초반에 유행한 우생학과 인종주의에 따라 ‘순수한’ 유럽인을 찾으려 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열등한 타민족과 섞이지 않은 고대의 우월한 사람들은 산악지역에 모여 있다고 생각하고 경쟁적으로 파미르고원과 티베트고원을 탐사했다. 영화 <인디애나 존스> 시리즈의 1편인 <레이더스>(1981)에는 주인공인 해리슨 포드가 티베트에서 나치와 경쟁하며 유물을 뺏는 장면이 나온다. 이것은 단순한 허구가 아니라 당시의 현실을 반영한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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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의 패망과 함께 ‘순혈 아리안족’을 찾는 이야기는 더는 나오지 않는다. 대신에 서양에서 티베트라는 말은 곧바로 대체의학, 명상, 신비한 체험을 상징하는 뜻으로 바뀌었다. 이런 상황은 여기에 지난 시절 서구인들이 티베트에 벌인 만행을 숨기고 커가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의도도 일정 정도 있다.

2006년 중국과 티베트를 잇는 2000㎞ 길이의 칭짱철도 개통으로 티베트는 빠르게 그 본모습을 잃어가고 있다. 특히 21세기 들어 중국과 인도가 거대한 나라로 성장하면서 두 나라 사이에 낀 티베트는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티베트는 중국과 인도의 국경지역에 있다는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두 대국 사이의 갈등의 축이 되고 있다. 21세기가 되어서도 티베트가 가진 진정한 문명사적 의의가 주목받지 못하는 상황은 이어지고 있다.

상웅국의 발견은 티베트가 히말라야산맥을 중심으로 유라시아 각 지역을 잇던 문명의 중심지로 다시 자리매김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현대의 국경과 관계없이 유라시아 각 지역을 넘나들며 독특한 삶을 일구고 문명을 교류했던 히말라야의 사람들 그리고 그들이 남긴 유라시아의 잊힌 문명을 바라보는 것, 그것은 바로 편견 없이 티베트를 바라보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경희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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