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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8 (목)

[유현준의 도시 이야기] 아파트, 여론조사, 그리고 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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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비슷한 모양의 획일화된 아파트… 집값과 단지 크기 등 숫자로만 판단

매주 발표하는 여론조사는 대세는 이러하니 합류하라는 메시지

대한민국은 이분법으로 성별만 구분하고 다양성을 만드는 섹스는 사라진 나라

조선일보

유현준 홍익대 교수·건축가


대한민국 도시들은 어디를 가든 비슷한 모양이다. 세종, 송도, 판교, 강남 모두 비슷하다. 아파트들도 모두 비슷하게 생겨서 브랜드 간판 떼고 나면 구분이 안 간다. 전 국민의 60%가 다 비슷하게 생긴 집에 살고 있다. 내 집과 네 집이 다 비슷한 모양이니 집의 가치는 ‘집값’으로밖에 구분되지 않는다. 획일화가 되면 가치관이 정량화된다. 그것이 획일화의 가장 큰 문제점이다. 획일화된 주거 환경과 획일화된 교육 환경에서 평생을 자라난 국민은 집값, 연봉, 성적, 키, 체중 같은 정량화된 지표로 사람들을 판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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획일화된 삶을 산 사람들은 자신만의 다른 개성을 표출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거대한 집단에 속하고 싶어 하게 된다. 젊은이들은 대기업에 취직하고 싶어 하고 빌라보다는 아파트 단지에 살고 싶어 한다. 같은 아파트여도 가구 수가 많은 아파트 단지를 선호한다. 그런 곳이 값이 더 오른다. 획일화되게 살았으니 다른 것을 인정하지 못한다. 우리는 말의 표현에서 '다르다'와 '틀리다'를 혼동한다. 다른 것은 틀린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모두 같은 생각을 가져야 하고 큰 집단에 속해야 한다는 성향은 다른 말로 '전체주의'다. 전체주의 성향은 획일화된 학교 건축과 아파트에서 자라난 어린 학생들에게서도 나타난다. 중학생 아들과 옷을 사러 가면 회색 아니면 검은색을 고른다. 파란색이나 빨간색을 입으면 '관종(관심 종자)' 소리를 듣기 때문이다. 중국집에서 대부분 짜장면을 시킬 때 혼자 볶음밥 시키면 눈치 보인다. 전체에서 튀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표준에서 벗어나 보일까 봐 두려워한다. 그래서 '대세'가 무엇인지 항상 궁금해한다. 기업에서는 '트렌드'를 궁금해한다. 대한민국 사회는 대세나 트렌드에 편승하기 위한 눈치 게임이 장난 아니다. 그게 가장 심한 곳이 정치판이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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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국민은 거대 집단에 속하고자 하는 열망이 크기 때문에 정치권에서는 대세의 바람을 만들기 위해서 물밑 공세가 대단하다. 여론조사와 댓글 조작이 대표적이다. 숫자로 나오는 여론조사는 정량화된 가치관을 가지고 큰 집단에 속하고 싶어 하는 대한민국 국민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방식이다. 그래서 정치 집단은 각자 입맛에 맞게 여론조사 지표를 내보낸다. 1000명 남짓에게 전화해서 만든 여론조사가 ±3.1% 오차를 가진다는 이야기는 믿기 어렵다. 그런데도 계속 발표한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여론조사는 '대세가 이러니 너도 여기에 합류하라'는 무언의 압력이다. 여론조사를 자주 발표하는 정치권이나 나라는 그다지 좋은 집단은 아니다. 댓글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기사보다 댓글을 더 열심히 읽는다. 왜냐하면 팩트보다는 대세가 궁금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치가는 댓글 부대와 킹크랩 등 각종 방법을 동원해서 '대세'를 조작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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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량화 지표로 대세를 드러내는 전통적 방법은 야외 집회다. 사이버 공간에서는 네이버와 다음 포털로 나뉘어 모여 있고, 현실 공간에서는 광화문과 서초동에 모여 있다. 그리고 우리 댓글과 검색어가 더 많고 수백만명이 모였다고 한다. 마치 '우리 아파트 단지는 3000가구입니다'라고 광고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러한 방식을 조직적으로 잘하는 집단이 권력을 잡기 쉬운 사회가 되었다. 현대사회에서는 조작된 여론에 대중이 호도될 가능성이 높다. 이를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은 'SNS는 소수의 의견을 증폭하고 다수를 선동하기 좋은 도구'라고 정의했다. 현재 우리나라에 각종 집회가 많아진 것은 과거보다 통신망이 발달했기 때문이다. 80년대 대학생 데모는 등사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윤전기로 신문을 찍어내지는 못했지만 등사기로 전단을 만들어서 뿌렸다. TV 방송은 못 하지만 많은 사람이 다니는 도서관에 대자보를 붙였다. 지금 집회 운영자는 전단 대신 트위터를 이용하고, 대자보 대신 카톡을 사용한다. 무한정 카피가 가능하고, 빛의 속도로 전파 가능하다. 지금은 사람 모으기가 훨씬 수월해졌고 대세를 조작하기도 쉬워졌다. 같은 칼도 외과의사 손에 들리면 생명을 살리는 메스가 되지만 살인자의 손에 들리면 흉기가 된다. 통신 발달을 이용해 사회를 발전시키기도 했지만 혼란시키거나 전복시키기도 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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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은 다양성의 보고다. 다양해야 생존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획일화된 유전자만 가지면 환경이 갑자기 바뀌었을 때 집단이 한 번에 멸종할 수 있다. 그래서 자연은 남과 여라는 두 성별을 가지고 세대마다 섹스를 통해서 다른 유전자 조합이 나오게 시스템을 만들었다. 대한민국은 지금 두 가지 생각만 있는 ‘다양성 멸종 단계’에 있다. 정치 권력자들이 이를 더욱 조장한다. 심리학자 김정운에 의하면 발달이 덜 된 인격일수록 적을 만든다고 한다. 적을 통해서 나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대한민국 사회는 외교·정치·사회에서 적을 만들기에 여념이 없다. 이는 성별만 나누고 섹스는 안 하는 것과 같다. 섹스가 없으면 후세가 없다. 후세가 없으면 미래가 없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만들려면 ‘생각의 섹스’가 필요하다. 전체주의자를 양산하는 아파트와 학교 건축에 다양성을 만드는 것이 가장 쉬운 첫걸음이다.

[유현준 홍익대 교수·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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