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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컬렉션 전시…개인의 취향이 미술사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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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김희근 벽산엔지니어링 회장이 서울 집무실에 전시한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의 1994년 로봇 작품 `해커 뉴비` 옆에서 활짝 웃고 있다. [한주형 기자]


서울 구로동 벽산엔지니어링 사옥은 작은 '미술관'이다. 사무실과 복도 곳곳에 미국 팝아트 작가 앤디 워홀, '박음질 회화 작가' 신성희, '매듭 작가' 한운성 등의 작품이 걸려 있다. 임직원들은 일하다가 문득 고개를 들거나 화장실에 갈 때도 아름다운 그림과 만나게 된다. 미술품 컬렉터인 김희근 벽산엔지니어링 회장(73)이 직접 일터에 문화 향기를 불어넣은 덕분이다.

김 회장의 집무실 역시 유명 작가들의 명작으로 채워졌다. 프랑스 출신 거장 루이스 부르주아 2008년 회화 '보들레르 #5', 미국 작가 조지 콘도 1996년작 '그의 눈들은 그의 귀들이다', 미국 설치미술가 제임스 터렐의 홀로그램 작품 '무제',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 1994년 로봇 작품 '해커 뉴비' 등이 공간의 품격을 더했다. 그는 1970년대 초 파리에서 프랑스 화가가 그린 소녀 초상화를 처음 구입한 후 지금까지 800여 점을 모았다.

최근 사옥에서 만난 김 회장은 "1985년 서울 인사동 화랑가에서 판화를 구입한 후 본격적으로 작품을 수집했다. 1990년대 서울역 앞 벽산빌딩 1~2층에 비영리 갤러리를 운영하면서 전문 지식이 덤으로 따라왔다. 작가를 연구하고 작품을 사게 되면 사랑하게 된다. 이 작가가 왜 이런 생각으로 그렸는지 뜻을 공유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기발한 아이디어와 독창적인 소재, 유리 작품을 선호한다. 백남준 작품 가격이 저평가돼 애국심으로 '해커 뉴비'를 구입하기도 했다. 미술품으로 행복을 얻는 그의 소원은 컬렉션 한 점도 안 팔고 눈을 감는 것이다. 실제로 이사장을 맡고 있는 실내악단 세종솔로이스츠에 매년 작품 1점을 기부하는 것 외에는 판매하지 않았다. 그에게 미술품은 되팔아서 시세 차익을 남기는 재테크 수단은 아닌 셈이다.

김 회장은 현재 현대미술관회 회장과 한국국제아트페어(KIAF) 조직위원, 예술경영지원센터 이사장 등을 맡으며 물심양면으로 문화예술계를 돕고 있다. 그가 40여 년간 모은 소중한 소장품들을 여러 사람들과 나눌 기회를 마련한다.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이 기획한 '세종 컬렉터 스토리 전-컬렉터 김희근'(10월 23일~11월 12일)에서다. 앤디 워홀, 로이 리히텐슈타인, 백남준, 이우환, 요셉 보이스, 라이언 갠더, 양혜규, 박귀섭 등 국내외 작가 28명의 작품 49점을 건다.

'세종 컬렉터 스토리'는 미술품 수집을 투기나 과시적 행위로 낮춰 보는 사회적 인식을 재고하고, 컬렉터 역할을 재정립하기 위한 시도다. 유럽과 미국에서는 컬렉터 개인의 취향으로 구입한 미술품들이 작가를 지원하고 미술사를 완성하는 데 막대한 영향을 끼쳐왔다.

최근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프랑스 트루아현대미술관 전시 '혁명, 그 위대한 고통- 20세기 현대미술의 혁명가들'도 라코스테 그룹을 소유했던 기업가 피에르·데니스 레비 부부가 40여 년간 수집한 미술품 2000여 점을 1976년 국가에 기증한 결과물이다. 이 부부가 20세기 초 현대미술 출발점으로 거론되는 조르주 브라크, 파블로 피카소, 로베르 들로네, 후안 그리스 등 입체파와 야수파 작가 작품을 모은 덕분에 1982년 트루아현대미술관까지 개관하게 됐다.

지난 6월 서울 소마미술관에서 열린 '素畵(소화)-한국 근현대 드로잉' 전은 정신건강의학과 의사이자 미술평론가 김동화 씨가 20여 년간 수집해온 한국 작가 218명의 드로잉 300여 점을 소개했다. 작품의 토대인 밑그림으로 국민화가 박수근부터 설치미술가 이불까지 한국 미술사 맥락을 정리하는 데 기여한 전시였다. 지난달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펼쳐진 20세기 프랑스 마지막 구상회화 거장 베르나르 뷔페 전시 역시 컬렉터였던 모리스 가르니에의 작가 지원과 작품 구입이 바탕이 된 전시다.

미국에서는 '석유왕' 록펠러 가문이 뉴욕 현대미술관(MoMA)를 짓고 수많은 걸작들을 기증해 미술사 연구와 발전에 큰 공을 세웠다. 페기 구겐하임 역시 탁월한 안목으로 알렉산더 칼더, 윌렘 드 쿠닝, 마크 로스코 등 뉴욕 화파 산파 역할을 하고 이탈리아 베네치아에 페기 구겐하임 미술관을 남겼다.

[전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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