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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414년 만에 대한해협 건넌 사명대사의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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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조선의 승려 사명대사가 1605년 일본 교토 고쇼지에 체류하며 남긴 유묵이 414년 만에 대한해협을 건너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다음달 17일까지 특별 전시된다. [이승환 기자]


"나팔 소리 들리고 아침저녁으로 물결 일렁이는데(角聲中朝暮浪), 청산의 그림자 속을 지나간 이 예나 지금 몇이나 될까(靑山影裏古今人)."

신라 말기 최고의 문장가로 이름을 날렸던 최치원(857~?)의 글이다.

속세의 기억이 사그라드는 자연에서 '범속과 탈속'의 양가적 고민을 집약해낸 최치원의 저 열두 한자는 800년 가까운 시간이 흘러 1605년, 일본 교토를 찾은 조선 승려에게서 다시 쓰인다.

굵고 강인하되 흐르는 듯 어지러진 필체는 고뇌의 심경을 유묵 한 점에 붙잡아두려는 결기의 이미지 같다.

청산의 햇살 아닌, 그림자(影) 속(裏)에 들어앉아 자신의 운명과 마주쳤을 스님의 이름은 한국인에게는 '사명대사'로 잘 알려진 사명 유정(四溟 惟政·1544~1610)이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과 강화를 맺고 포로 송환을 위해 일본 교토에 햇수로 2년간 머무르던 당시, 사명대사가 남겼던 유묵 다섯 점이 처음으로 고국을 찾았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일본 교토 고쇼지(興聖寺) 소장 사명대사 유묵 특별전'을 다음달 17일까지 상설전시실 1층 중근세관 조선1실에서 연다고 17일 밝혔다.

배기동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전후 조선과 일본 평화를 이끌어 백성을 구하는 동시에 '구도자'로서의 승려 본분을 잊지 않은 사명대사 뜻을 조명하고자 마련했다"고 의의를 밝혔다.

사명대사는 임진왜란 당시 의승군(義僧軍)을 이끈 승병장이면서도, 전란 후에는 양국 평화를 이끌고자 노력한 외교승이었다.

1605년 교토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담판을 지은 뒤 조선인 포로 3000명을 데리고 귀국했다.

당시 사명대사는 고쇼지에 머무르며, 이 절을 창건한 승려 엔니 료젠(円耳了然·1559~1619)과 교류했다. 유묵은 고쇼지가 소장해오다 한국에 공개됐다.

임진왜란 이후 10년간의 감회를 담아낸 '벽란도의 시운을 빌려 지은 시(詩)'에서는 교토에서의 사명을 마무리한 뒤 속세를 정리하고 선승의 본분으로 돌아가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강호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지 오래되지만 어지러운 세상에서 지낸 것이 벌써 10년이네(有約江湖晩 紅塵已十年). 갈매기는 그 뜻을 잊지 않은 듯 기웃기웃 누각 앞으로 다가오는구나(白鷗如有意 故故近樓前)." 과거 시구에서 '갈매기'는 은둔의 다른 표현이었다고 하니, 국가적 사명과 탈속에의 의지가 교차하는 마음이 느껴진다.

'대혜선사의 글씨를 보고 쓴 글'은 사명대사가 스승 서산대사가 남긴 뜻에 따라 백성을 도탄에서 구하고자 일본에 왔음을 명확하게 밝힌다. '승려 엔니에게 지어준 도호(道號·불도에 몸담은 후의 이름)'나 '승려 엔니에게 준 편지'는 양국 승려의 우애를 일러준다. 사명대사는 엔니의 자를 '허응(虛應)'으로 지었는데 관세음보살이 중생의 소리를 두루 듣고 살핀다는 뜻이었다고 한다.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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