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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제에 막힌 미래차···투자액 4조, 99%가 해외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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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돈·기업 한국 떠난다]

3조 7500억원 대 405억원.

현대자동차가 최근 2년 간 자율주행ㆍ커넥티드카 등 미래차 기술 확보에 쓴 3조 8000억 원 중 99%는 해외 기업에 대한 투자로 나타났다. 현대차가 10억 원 이상 투자했거나 투자 계획을 발표한 29건(투자액 비공개는 제외)을 분석한 결과다. 한국이 타다·콜버스 같은 차량공유 플랫폼의 성장을 규제로 막고, 자율주행 제도 정비에 손을 놓은 사이 현대차는 미국ㆍ이스라엘ㆍ중국ㆍ인도 등 해외에서 투자 대상을 찾았다. 2년간 현대차의 국내 투자는 전체의 1%(약 405억원)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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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선 현대차그룹 수석부회장(왼쪽)과 케빈 클락 앱티브 최고경영자(CEO)가 지난달 23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골드만삭스 본사에서 자율주행 소프트웨어 개발을 위한 합작법인 설립 본계약에 서명하고 있다. 정 부회장은 ’2030년쯤 본격적으로 자율주행차 시대가 열릴 것“이라고 말했다.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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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을 요구한 재계 관계자는 “한국에 세계 최초 5G 통신 기술이 있으면 뭐하느냐”며 “자율주행과 승차공유 같은 미래차 시장이 구시대적인 규제 때문에 한 걸음도 못 나가고 있으니 현대차도 밖에 나가 투자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현대차는 2년 전 국내 카풀앱(럭시)에 50억원을 투자했지만 택시업계의 반대가 심하자 1년도 안돼 지분을 전량 매각했다.

규제에 지치고 혁신 기회에 목마른 대기업이 해외로 나가고 있다. 중소기업이 최저임금 인상에 떠밀려 해외로 공장을 옮긴다면 기술집약적 산업을 주도하는 대기업의 탈(脫)한국은 관련 산업에 미치는 파급효과가 더 광범위하고 장기적이다.

이런 움직임은 혁신 경쟁이 가장 치열한 모빌리티와 에너지 분야 대기업에서 두드러진다. SK이노베이션은 미국 조지아주에 17억 달러(2조 200억 원)를 투자해 전기차 배터리 공장을 짓고 있다. 중국 창저우와 헝가리에서 짓고 있는 배터리 공장은 내년에 생산을 시작한다. '제2의 반도체'로 불리는 배터리 사업을 키우기 위해 SK그룹은 수조원을 해외에 투자했다. 정부가 나서서 전기차 생태계를 키운 중국과 전기차 기술 기업이 밀집한 미국에 한국 기업도 배터리 공장을 지을 수밖에 없다.

롯데케미칼도 지난 5월 미국 루이지애나주에서 3조6000억원을 투자한 에틸렌 생산공장(ECC)을 준공했다. ‘원유’ 대체재로 떠오르는 셰일가스 최대 매장 국가인 미국에서 기회를 찾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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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조지아주에 위치한 롯데케미칼 에틸렌 생산공장.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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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시장에서 경쟁하는 대기업이 해외에 투자하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대기업이 투자 여력이 있어도 국내에 굳이 투자해야 할 이유가 줄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해 7월부터 300인 이상 기업에 적용된 주52시간제는 대기업이 국내서 연구개발(R&D) 투자를 망설이게 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10대 그룹의 한 임원은 "우리는 최고의 인재를 뽑아 미래를 위한 R&D를 기획하고 도전해야 하는데 52시간제 도입후 연구 분위기가 한풀 꺾인 면이 있다"고 말했다. 성태윤 연세대(경제학) 교수는 "대기업이 부품 조립공장은 오래전에 해외로 이전했어도 핵심 R&D는 국내에서 해왔는데, 이제는 국내에서 R&D 효율도 기대하기 어려워졌다"며 "R&D 인재도 많고 효율도 높은 선진시장으로 R&D 거점도 연쇄 이동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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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대 그룹 최근 미국 투자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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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는 미래차 산업 낙수효과 못볼 수도"



지난달 24일 국내 자동차·모빌리티 업계는 ‘좋은 소식’을 듣고도 웃질 못했다. 정의선 현대차 수석부회장이 미국에 20억 달러(2조 4000억원)를 투자해 자율주행 기술 합작벤처를 만든다는 소식이 전해진 날이다.

이날 현대ㆍ기아차는 세계 3위 수준의 자율주행 기술을 보유한 미국 앱티브와 손잡고 40억 달러 규모의 벤처를 만들겠다고 발표했다. 현대ㆍ기아차가 지분 50%를 갖는 이 벤처의 본사는 미국 보스턴이다. 합작벤처는 자율주행 시험 운전을 허용하는 미국 캘리포니아ㆍ네바다 주와 싱가포르에서 테스트할 예정이다. 현대ㆍ기아차의 투자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달 30일 “빅뉴스다. 위대한 일자리가 미국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트윗을 날리며 환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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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차, 최근 2년 미래차 기술투자 분석해보니.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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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을 요구한 모빌리티 업계 관계자는 “한국은 자동차 2200만대가 있는 대표적인 자동차 소비국인데 현대차 같은 기업이 해외에서 거액 투자를 한다는 소식을 들으니 걱정이 크다"고 말했다. 이어서 그는 “한국 대기업이 해외에 나가 인재와 기술을 사올 수밖에 없다면 한국 경제는 그 낙수효과를 보지 못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정부가 15일 미래차 산업에 대한 비전을 발표했지만, 한국은 이 분야에서 후발국가다. 자율주행의 경우 지난 7월에야 레벨4(전체 5단계) 수준의 고도 자율주행을 테스트할 수 있는 규제자유특구가 세종시에 들어섰다. 국내에선 도로교통법에 따라 운행 중 휴대폰이나 영상장치를 조작하면 안 돼 높은 레벨의 자율주행을 실험하기 어렵다. 반면, 미국ㆍ독일ㆍ중국 등은 최근 3~4년 사이 잇따라 규제를 풀면서 구글(웨이모)ㆍGMㆍBMWㆍ인텔ㆍ바이두 등은 자율주행 데이터를 축적했다. 구글 웨이모는 지난 7월 미국 캘리포니아 주로부터 자율주행 택시 운행 허가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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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가 2014년 중국 시안에 완공한 반도체 공장 전경.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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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오래 전부터 산업 클러스터를 육성하겠다고 했지만 정작 규제 때문에 클러스터가 가로막히는 경우가 많았다. SK하이닉스의 이천 반도체공장 M14 라인은 증설 신청 후 준공(2015년)까지 7년이 걸렸다. 올해 초 정부가 예외적으로 수도권 규제를 풀어 SK하이닉스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부지를 확보한 것처럼 전향적인 자세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하지만 정부가 전국에서 신산업 육성을 위해 추진 중인 규제자유특구 대상에서 수도권은 제외됐다. 문종철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한국 대기업과 합작에 관심 있는 외국 기업을 유치하려고 해도, 이들은 인천공항에서부터 거리를 따져 입지를 정하려고 한다"며 "수도권과 지방의 격차가 커 수도권 이외 지역으로 투자 유치는 쉽지 않다”고 말했다.

경직된 노동시장도 대기업의 투자 의지를 꺾는다. 한국의 노동생산성은 시간당 34.3달러(2017년 기준),경제협력개발기구 내 꼴찌 수준이다. 일본은 41.8달러, 독일은 59.9달러다. 자동차산업협회 관계자는 “국내 완성차 5개사의 평균 임금(8915만원)은 도요타(8484만원)나 폴크스바겐(8892만원)보다 높고 매출액 중 임금 비중도 12.1%로 최고”라고 말했다. 불황과 노사갈등으로 지쳐 있는 한국GM과 르노삼성은 한국 시장 철수 얘기까지 나온다.

하지만 정부는 노동시장 개혁에는 손도 못 대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공장 자동화·기계화가 확대되면 대기업이라도 현재 일자리를 보전하는데 한계가 있는데, 정부가 이런 사정을 너무 모르는 체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지난달 정부는 기업에 60세 정년 이후에도 고용을 의무화하는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기업은 이 방안이 기업의 신규 채용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우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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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원 SK그룹 회장(왼쪽)은 지난달 19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D.C에서 미국 정제2회 SK Night(SK 나이트)를 열고 "앞으로 3년간 미국에서 100억달러를 더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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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계 고위 관계자는 “최근 대기업이 돌아가며 국내에서 대규모 투자ㆍ고용 계획을 발표한 것은 국내 경기 침체를 우려한 정부를 의식한 측면이 크다”며 “해외에 생산설비를 투자해야 한다는 경영진의 주장에도 국내 투자를 발표한 것은 총수의 의지”라고 전했다. 또 다른 경제단체 관계자는 “광주시와 현대차가 투자해 완성차 공장을 만드는 ‘광주형 일자리’가 구미 등으로 확산하는 것은 대통령 공약사항에 기업이 화답하는 성격”이라고 꼬집었다.

이렇게 국내에서 답답해하는 대기업이 공들여 투자하는 곳은 ‘기업의 나라’ 미국이다. SK그룹 최태원 회장은 지난달 19일 미국 워싱턴D.C에서 미국 정ㆍ관ㆍ재계 인사가 모인 자리에서 “지난 3년간 미국에서 50억달러(5조9300억원)를 투자했고 앞으로 3년간 100억 달러(12조원)를 더 투자하겠다”고 말했다. 전봉걸 서울시립대(경제학) 교수는 “국내 경기가 이렇게 침체했을 때 대기업의 해외진출을 정부가 '어쩔 수 없다'고 해선 안 된다"며 "기업이 국내에서 사업하고 싶게끔 분위기를 조성하고 제도를 정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수련 기자 park.sury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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