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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우리 안보에 괴이하고 불안한 일이 장작처럼 쌓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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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부가 11일 유엔 총회 제1위원회에서 북핵 문제에 관한 발언권을 얻고도 명백한 안보리 결의 위반인 북 SLBM(잠수함 발사 탄도미사일) 도발에 대해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7분간 발언하면서 비판은커녕 "우리는 미국과 함께 북한과 대화하는 자리에 남겠다"고 했다. 오히려 북핵 사정권에서 떨어져 있는 유럽 국가들이 "북은 핵과 탄도미사일을 제거하려는 어떤 진지한 행동도 하지 않았다"며 대북 제재 유지를 강조했다. 북핵 최대 피해국인 우리가 해야 할 말을 남이 대신 해준 것이다.

문재인 정부의 김정은 대변인 역할이 북핵 폐기를 위한 고육책이 아니라면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SLBM은 북핵 미사일 개발의 최종 단계다. 그것을 막기 위해 온갖 굴욕을 참는 것인데, 정작 북핵 미사일의 결정적 도발에 침묵하면 대체 김정은 대변인 역할은 무엇을 위해 하는 건가. 문 대통령도 2017년 북 SLBM 발사 때 "한반도 안전에 대한 심각한 도전 행위로 강력 규탄한다"고 했다. 그래놓고 성능이 향상된 이번 SLBM에 대해선 청와대·외교부·국방부 모두 침묵한다. 과거 김대중·노무현 정부도 이런 정도는 아니었다.

국방부는 군사분계선 인근에서 '멧돼지 소탕 작전'을 개시했다. 국방장관이 "북 멧돼지는 절대 들어올 수 없다"고 장담한 직후 휴전선 인근에서 돼지열병에 걸린 멧돼지 사체가 속출하자 뒤늦게 저격병을 동원하는 등 난리다. 코미디 같은 일인데 웃음이 나오지 않고 불안하다. 국방장관은 북이 NLL 인근 함박도에 군사 시설을 확충했는데도 계속 별일 아니라는 식이다. 그런데 NLL 방어를 책임진 해병대 사령관은 국회에서 "함박도 초토화 계획을 세웠다"고 했다. 대체 누구 말이 맞는가. "북이 우리의 적(敵)"이라는 사령관 발언은 인터넷 검색어 상위에 올랐다. 너무 당연한 말이 화제가 되는 희한한 세상이다.

그제 우리 국민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축구 대표팀 '봉화식' 중계를 봤다. 북이 생중계를 거부해 평양 경기 내용을 알리는 '문자'가 아시아축구연맹이 있는 말레이시아를 거쳐 서울에 도착했다. 내용은 출전 선수와 경고 등 9줄이 전부였다. "동네 축구도 드론을 띄워 생중계하는 21세기에 봉화 올리기 중계" "차라리 파발마나 전서구(비둘기)를 띄우라"는 개탄이 쏟아진다. 경기장엔 관중이 한 명도 없었다. 뒤늦게 사진을 보니 무슨 유령 경기장 같다. '김일성 경기장'에서 한국에 질까 봐 이랬다는데 이런 집단에 그토록 공을 들이고 굴욕을 참은 결과가 이렇다.

그런 기괴한 결정을 내린 김정은은 난데없이 백마를 타고 백두산을 달리는 모습으로 등장했다. 김일성이 하던 '백마 쇼'다. 김정은은 장성택 처형 등 무슨 결단을 앞두고 백두산에 오르곤 했다. 이번에는 "미국에 인민이 분노하고 있다"고 했다.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그런데도 정부는 감싸는 데 급급하다. 우리 안보에 괴이하고, 희한하고, 불안한 일이 장작처럼 쌓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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