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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만물상] 남이 한 일 사과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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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교황과 중국 황제는 오류 없는 하늘의 대리인임을 자부했다. 당 현종은 22세 며느리를 취하며 제왕(帝王)은 무치(無恥), 임금은 부끄러울 게 없다고 했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하느님의 대리인이 오류를 저지르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물론 실제론 오류 덩어리였다. 대중 정치가 자리 잡은 뒤에도 권력자는 오류를 인정하고 사과하기를 꺼린다. 심리학자 제니퍼 자케는 "권력자들은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으려 발버둥치고 주위 사람을 괴롭히는 속성이 있다"고 했다.

▶직선제 이후 우리 대통령들은 수십 차례 대국민 사과를 했다. 대형 사고, 인사(人事) 실패, 가족 등 측근 비리, 대선 공약 파기, 정책 실패 등 때문이었다. 물론 자신의 잘못에 대해 사과한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도 여러 차례 사과했다. 그런데 문 대통령의 사과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자신의 잘못에 대해 사과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한 일에 대해 사과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취임 후 첫 '사과'가 가습기 살균제 사건이었는데 "정부를 대표해 가슴 깊이 사과 말씀을 드린다"고 했다. 자신과는 상관없는 전 정부 때 일이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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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대통령은 제주 4·3 사태에 대해 사과했고, 베트남을 찾아 국군의 참전을 사과했다. 1980년 신군부의 불교 탄압 사건에 대해서도 사과했다. 5·18에 대해서도 사과하고, 일본 방문 때는 재일동포 간첩 사건을 사과했다. 이 중 자신이 한 일은 하나도 없다. 전부 전임 대통령 시절 문제를 대신 사과한 것이다. 어제는 부마 항쟁 기념식에서 "유신 독재의 피해자들에게 깊은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했다. 남이 한 일을 사과하는 것은 참 쉬운 일이다. 누구나 백 번이라도 할 수 있다. 그것은 사과라기보다는 그 일을 한 사람을 공격하는 효과도 낳을 수 있다.

▶문 대통령은 자신의 잘못에 대한 사과는 인색하다. 밀양 화재 때 "죄송하다"고 하고, 최저임금 1만원 공약 불이행에 대해 사과한 정도다. 외교부 기밀 유출 사건도 사과했지만 야당 공격이 주목적이었다. 개각 때마다 인사 참사가 벌어졌지만 한 번도 사과하지 않았다. 일자리 정부를 자처해놓고 일자리 참사가 벌어졌는데 사과하지 않았다. 청와대 대변인이 부동산 투기꾼으로 밝혀졌는데 사과하지 않고 그의 등을 두드려 내보냈다.

▶조국과 같은 파렴치 위선자를 법무장관으로 임명한 데 대해서 "국민 사이 많은 갈등을 야기한 점에 대해 매우 송구스럽게 생각한다"고 사과했다. 그 한마디 다음엔 언론 탓, 검찰 탓이었다.

[이동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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