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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경제포커스] 이 나라의 '집단 면역'이 깨지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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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신 95% 접종해야 '집단 면역'

잘살려면 함께 일해야 하는데 나는 파업, 너는 일해서 세금 내라

경제 집단 면역이 무너진다

조선일보

이진석 사회정책부 차장


이틀 전부터 전국 보건소 등 의료 기관 2만여 곳에서 독감 백신을 무료 접종하고 있다. 12세 이하와 만 65세 이상, 임신부가 대상이다. 세금 1358억원이 들어간다. 매년 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 무료 접종을 하는데 보건복지부는 올해 접종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모양이다. 지난 3월 신학기를 맞은 초등학교에 독감이 대유행했기 때문이다. 독감 결석 사태가 전국적으로 벌어졌다.

'집단 면역'이 깨진 것이 원인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집단 구성원 대부분이 백신을 맞으면 인플루엔자가 유행하더라도 전염 대상이 제한돼 확산을 막을 수 있다는 방역 이론이 집단 면역이다. 구성원의 95%가 백신을 맞아야 방어막이 생긴다. 그런데 초등학교 고학년(4~6학년) 10명 가운데 6명만 백신을 맞았다.

질병관리본부의 12세 이하 백신 무료 접종 통계를 보면 생후 6개월~만 5세 미만은 접종률이 85%에 달했지만, 초등학교 1~3학년(만 7~9세)은 70%로 떨어진다. 4~6학년(만 10~12세)은 58%에 그쳤다. 보건소 못 믿는다고 동네 병원에서 돈을 주고 맞힌 부모도 있을 테지만, 접종률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듯싶다. 집단 면역이 깨지면서 독감은 삽시간에 퍼졌다. '남의 집 아이들 다 맞으면 독감이 유행하지 않을 테니 내 아이는 안 맞혀도 되겠지' 하고 생각했던 부모들이 만든 일이라고 했다. 세금 퍼주고 선거 때 표로 돌려받으려는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덕분에 온갖 '무상(無償) 시리즈'가 쏟아지고, 부정 수급이니 복지 누수니 하는 말이 끊이지 않을 정도로 편법, 불법으로 더 받아 내려는 사람이 넘쳐나는 나라에서 백신 무료 접종은 유일하게 인기 없는 무상이다.

내가 일 안 해도 남들이 일해서 나는 세금으로 지원받고, 이런 지원금, 저런 급여 늘려준다는 정부 발표가 꼬리를 물면서 경제와 사회를 지켜왔던 집단 방어막이 깨져 간다. 나는 파업할 테니, 회사는 기술 개발하고 해외 판로 개척해서 돈 많이 벌어 월급 올려달라는 나라가 됐다. 나는 철도, 지하철, 공장을 멈춰 세우지만, 너는 열심히 일해서 세금 많이 내라고 한다. 1970년대 독일 함보른 탄광에서 일했던 광부 중에서 옆 사람은 일하는데, 어차피 같은 월급이니 게으름 피웠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모두 내가 열심히 일해서 가족을 먹여 살리고, 나라도 부강하게 된다고 지옥 같은 막장을 견뎠을 것이다. '공순이' 소리를 들었던 그 많은 여공은 무슨 생각을 했겠나. 그 시절 우리는 너나없이 고되고 힘들게 일했다. '우리도 한번 잘살아보세'라는 노래를 불렀다. 나는 놀 테니 네가 일해서 잘사는 나라 만들라고 하지 않았다.

이 정부는 집단 면역이 깨지는 것을 방치하고 있고, 한술 더 떠서 "아무 문제 없다"는 '집단 최면'까지 걸려고 한다. 대통령은 우리 경제가 순항하고 있다고 한다. 얼마 전 청와대에서 근무하는 이에게 솔직한 얘기를 들었다. "대통령도 경제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안다"고 했다. 청와대에 두 가지 목소리가 있다고 했다. "경제가 어렵다는 것을 알리고 답을 찾자"는 참모들이 있지만 "경제는 심리인데, 청와대마저 경제가 어렵다고 하면 정말로 얼어붙는다"는 참모가 더 많다고 했다. "대통령이 고민하더니 그 사람들 목소리를 픽(pick· 뽑다)하더라"고 했다. 경제가 어렵다는 걸 알면서 어렵지 않다고 하는 건 국민을 안심시키는 것이 아니다. 속이는 것이다. "결석한 사람 손 들어 보라고 했는데 손 든 사람이 없으니 결석한 사람이 없다"는 식의 통계로 최저임금 인상, 근로시간 단축, 기업 옥죄기로 경제가 독감에 걸린 것을 감추고 있다. 이미 백신을 맞기에는 너무 늦었는지 모른다. 앓아누울 일이 걱정이다.

[이진석 사회정책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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