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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가족 극단적 선택 아닙니다, 부모의 범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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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 실패했다고 빚 시달린다고

잘못된 선택…2주새 아이 8명 사망

제주서 숨진 초등 5학년의 친구

“우리는 부모의 소유물 아니다”

전문가 “개인 파산 신청하면

국가가 자녀 돌보는 시스템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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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자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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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일 제주도 제주시 연동에 살던 A군(12·초등학교 5학년)은 부모에 의해 짧은 생을 마쳤다. 사업실패를 비관해온 아버지(42)가 스스로 목숨을 끊기 전 가족을 숨지게 했다. 당시 A군은 부모, 동생(8) 등과 함께 아파트 한 방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A군의 친구(12)는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해 반장까지 했던 친구”라며 “우리는 부모의 소유물이 아닌데, 죄 없는 친구까지 세상을 떠나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했다.

생활고나 신변을 비관해온 부모에 의해 아이들이 목숨을 잃는 사례가 줄을 잇고 있다. 이달 들어서만 2주 새 전국에서 4건의 일가족 살해·자살사건이 발생해 8명의 아이가 목숨을 잃었다. 전문가들은 “자녀를 숨지게 한 후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동반 자살’이 아니라 명백한 살인 행위”라고 입을 모았다.

제주 일가족 사망사건은 부모의 잘못된 결정이 아이의 목숨을 앗아간 전형적 사례다.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가 빚을 갚지 못하게 되자 가족들과 함께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사건 현장에서 자살도구가 발견됐고, 외부침입 흔적이 없는 점 등으로 미뤄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판단했다. 가족이 숨진 아파트에서는 “사기를 당해 억울하다”는 내용의 글이 발견됐다. 지인들에 따르면 A군 가족은 최근 가정형편이 급격히 나빠졌다. 사업하던 아버지의 빚이 늘어나면서 살던 아파트까지 경매에 넘어갔다. 사망 당시 가족이 살던 아파트 1층 우편함에는 저축은행의 대출상환 독촉장이 꽂혀 있었다.

“가부장 문화가 부른 살인 행위”

지난 15일 경남 거제에서 발생한 일가족 사망사건도 부모의 사업실패가 원인이 됐다. 경찰에 따르면 이날 오전 10시 3분께 거제시 상동 한 원룸에서 B씨(39)와 6세, 8세 아들 2명이 숨진 채 발견됐다. 함께 현장에서 발견된 B씨의 아내(39)도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목숨이 위독한 상태다. 최근 B씨는 주식투자 및 사업실패로 인해 힘들어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가족 살해 후 자살은 국내외 경기, 가정형편과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 사건 대부분이 부모의 생활고나 빚, 가정불화 때문에 발생한다. 중앙일보가 경찰청과 통계청, 관련 논문 등의 자료를 분석한 결과 1997년 외환위기를 전후로 급증하다 다소 감소세를 보였던 가족 살해·자살 건수가 최근 다시 증가세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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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가족 동반자살 추이.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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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가족 살해·자살은 1995년과 1996년 각각 16건, 18건에서 금융위기를 맞은 1997년과 1998년 각각 28건, 25건으로 늘었다. 이후 1999년과 2000년 각각 17건, 14건 등으로 감소세를 보이다가 지난해 다시 20건으로 늘었다. 올해는 10월 현재까지 17건의 가족 살해 후 자살 사건이 발생한 가운데 이달에만 4건(가족 살해 후 자해 사건 포함) 이 잇따랐다.

경기 시흥에서는 최근 5개월 새에 두 가족이 목숨을 끊었다. 지난 7일 시흥시 정왕동 한 주택가 방안에서는 C씨(48) 부부와 아들(15), 딸(12) 등 4명이 숨진 채 발견됐다. 앞서 어린이날인 지난 5월 5일 새벽에는 시흥의 한 농로에서 D씨(35) 부부와 아들(4), 딸(2) 등 4명이 렌터카 안에서 숨졌다.

전문가들은 자녀 살해 후 자살을 막기 위해서는 “자녀를 소유물로 여기는 의식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한다. 자살 후 남겨질 자녀에게 고통이 이어질 것을 우려해 부모가 살해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다. 전문가들은 부모 없이 남겨진 아이들을 위해 복지제도나 사회안전망 등을 확충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자녀를 독립된 개체로 보지 않고 끝까지 자신이 책임진다는 어긋난 관념이 문제를 키운다”며 “개인파산 신청을 할 경우 국가가 해당 가정의 아이들에 대한 보호를 맡는 식으로 불안한 가정을 지원할 복지정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부모 때문에 아이만 목숨 잃기도

대법원은 지난 4월 26일 ‘광주 3남매 화재 사망’ 사건의 피고인 친모 E씨(23·여)에 대해 징역 20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E씨는 2017년 12월 31일 오전 2시쯤 4세·2세 아들과 생후 15개월 된 여아 등 3남매가 자던 집에 불을 내 숨지게 한 혐의로 기소됐다.

화재 직후 E씨는 “만취한 상태로 귀가한 뒤 잠이 들어 불이 난 사실을 몰랐다”고 진술했다가 나중에야 실화 혐의를 인정했다. 경찰은 E씨가 실수로 불을 낸 것으로 보고 중과실치사 혐의를 적용했지만, 검찰은 형량이 더 높은 방화치사 혐의를 적용해 재판에 넘겼다. E씨가 수차례 진술을 바꾼 데다 화재 직전 남편에게 “죽을 거다”라는 내용의 문자메시지를 보낸 사실이 드러나서다. 불이 난 후에도 아이들을 대피시키지 않고 혼자 베란다로 나간 점 등도 방화 정황을 뒷받침했다.

1·2심 재판부는 이런 E씨에 대해 “(사망한) 3남매들은 고귀한 생명을 빼앗겼을 뿐만 아니라 사망에 이르는 과정에서 끔찍한 고통과 극심한 공포감을 느꼈을 것”이라며 징역 20년을 선고했다.

이윤호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어른들이 아이를 죽인 후 자살하는 것을 ‘동반자살’이라 불렀던 사회적 인식은 살인을 방조하는 행위”라며 “자식들의 생사를 어른들 마음대로 결정한다는 것은 지극히 가부장적이며,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아동학대”라고 말했다.

광주·제주·거제=최경호·최충일·위성욱 기자 choi.kyeongho@joongang.co.kr

※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이 있거나 주변에 이런 어려움을 겪는 가족·지인이 있을 경우 자살 예방 핫라인 ☎1577-0199, 희망의 전화 ☎129, 생명의 전화 ☎1588-9191, 청소년 전화 ☎1388 등에서 24시간 전문가의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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