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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미경] 英여왕 의회연설 때… 의원 1명 버킹엄궁 인질로 가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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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회전통 보여주는 여왕 연설]

의원 인질, 17세기 내전으로 처형된 찰스 1세 때 비롯된 의회 견제 관행

여왕의 전령 '블랙로드' 하원 문 두드리는 행위는 하원 독립성 보여줘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14일(현지 시각) 런던 웨스트민스터 의사당에서 의회 개원을 알리는 연설을 했다. 보리스 존슨 총리가 브렉시트 반대 논의를 막으려고 의회 개원을 늦추는 '꼼수'에 야당이 반발, 대법원의 "의회 개원 고의 연기는 불법"이라는 판결까지 받는 진통 끝에 이날 연설이 이뤄졌다.

여왕은 이날 9분 40초가량의 연설을 통해 상·하원 의원, 주요 관료 등 앞에서 영국 정부가 향후 중점적으로 추진할 정책 과제 등을 소개했다. 10분도 안 되는 여왕의 짧은 연설 행사에는 영국의 오랜 입헌군주제 역사와 전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통상 '여왕의 연설(Queen's Speech)'이라고 부르는 개원 연설 행사가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자리 잡은 것은 1852년부터. 엘리자베스 2세는 1952년 즉위 이후 이날 65번째 개원 연설을 했다. 두 번(1959·1963년)은 임신을 이유로 개원 연설에 불참했다. 여왕 연설은 매년 열리는데, 지난해엔 테리사 메이 당시 총리가 브렉시트 논의 때문에 의회 회기를 2년으로 연장하면서 여왕 연설이 생략됐다.

◇여왕 연설 땐 의원 1명이 인질로

여왕은 이날 오전 11시쯤 버킹엄궁에서 여섯 마리의 백마가 끄는 황금 마차를 타고 의사당으로 향했다. 여왕의 행차가 시작되기 전 왕실 근위대는 램프를 들고 의사당 지하실을 수색했다. 1605년 제임스 1세 국왕 시절 가톨릭교도들이 왕을 암살하기 위해 의사당 지하실에 화약을 묻어 놓은 '화약음모사건'에 기원을 둔 수색이다. 또 여왕이 의사당에 가 있는 동안 하원 의원 한 명은 버킹엄궁에 '인질'로 잡혀 있는다. 의원들이 여왕을 궁으로 돌려보내지 않을 때를 대비해 왕실도 의회 요인 중 한 명을 잡아놓는 것이다. 의회파와 갈등으로 내전까지 벌여 1649년 참수형을 당한 찰스 1세 국왕 사건의 재연을 피한다는 명분을 갖고 있다. 이날 인질로 궁에 간 사람은 보수당의 스튜어트 앤드루 하원 의원이었다. 인질은 여왕 궁에 있는 동안 극진한 대접을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왕 앞 자존심 굽히지 않는 평민원

오전 11시 35분쯤 의사당 북쪽 상원(귀족원) 회의실에 마련된 왕좌에 앉은 여왕은 '블랙로드(Black Rod)'에게 하원(선출직 평민원) 의원들을 불러올 것을 명했다. 블랙로드는 귀족 중심 상원과 의회 내 왕실 관련 업무를 총괄하는 의회 고위 관료다. 큼직한 지팡이를 든 블랙로드는 시종 30명가량을 끌고 하원 회의실로 향했다. 블랙로드가 하원 회의실 문에 도착하자 그의 눈앞에서 문이 쾅 닫혔다. 블랙로드는 지팡이로 문을 세 번 두드렸고, 하원 경비대장은 그제야 문을 열어줬다. 이는 국민이 선출한 하원의 독립성과 우월성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퍼포먼스다. 현직 블랙로드는 윔블던 테니스선수권대회 조직 담당자를 지냈던 세라 클라크로, 클라크는 블랙로드라는 직책이 생긴 1348년 이후 최초의 여성 블랙로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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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로드' 세라 클라크(가운데)가 14일 여왕 연설 행사가 열리는 상원 회의실로 하원 의원들을 불러오기 위해 검은 지팡이를 들고 하원 회의실로 가고 있다. /A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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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왕이 블랙로드를 하원으로 보내는 것은 자신은 하원 회의장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1642년 찰스 1세가 반대파 의원들을 체포하려고 군인들을 이끌고 하원 회의장에 들어가 의회로부터 강력한 항의를 받은 이후 영국 왕은 하원 회의장에는 들어가지 않는다. '왕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입헌군주제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이날 블랙로드가 하원 의원들에게 상원 회의실로 오라는 여왕의 지시를 전달하자, 노동당 소속 데니스 스키너 하원 의원이 "아니, 나는 안 가겠다"며 큰소리로 빈정댔다. 전통적으로 행해지는 왕에 대한 '불경스러운 반항'이다. 스키너 의원을 비롯한 노동당· 스코틀랜드국민당(SNP) 의원 등 6명이 하원 회의장에 남아 태블릿PC 등으로 여왕 연설을 지켜봤다.

◇연설은 내각이 써준 원고 대독

여왕 연설은 언제나 "나의 상원과 하원 의원들에게(My Lords and Members of the House of Commons)"란 말로 시작한다. 이날도 마찬가지였다. 여왕 연설은 주로 영국 정부가 이번 회기 어떤 법안과 정책을 추진할 것인지를 밝히고, 의회의 승인을 구하는 내용이다. 연설문은 집권당(현재 보수당) 정부 각료들이 써주는 것으로, 여왕은 이를 형식적으로 읽는 것이다. 이날 연설에는 "나의 정부의 우선순위는 한결같이 10월 31일 확실하게 영국의 EU(유럽연합) 탈퇴를 이루는 것에 있다"는 존슨 내각의 과제인 '브렉시트 결행'이 담겼다. 연설 말미에는 "다른 수단도 당신들 앞에 놓일 것"이란 말을 하는 것이 관례다. 여왕의 일방적인 지시가 아니라 의회의 논의를 존중한다는 메시지를 담는 것이다.

여왕이 제시한 정책 과제 등을 놓고 하원은 일주일 정도 토론한 뒤 이를 표결한다. 표결 의안은 보통 '여왕에게 감사를 표한다'는 단순한 내용으로, 1924년 이후 부결된 적이 없다. 그러나 이번에는 보수당이 하원 과반 의석을 잃은 상태라 부결 가능성도 있다.

◇보석 3174개 박힌 '제국 왕관'

여왕이 연설하는 동안 여왕 오른편 테이블 위엔 '제국의 왕관(Imperial State Crown)'이 올려져 있었다. 1714년 조지 1세 국왕 대관식 때 사용됐던 왕관이다. 다이아몬드 2868개, 진주 273개, 사파이어 17개, 에메랄드 11개, 루비 5개로 장식돼 무게가 1.1㎏에 달한다. 여왕은 지난 연설에 이어 이번에도 이 왕관 대신 좀 더 간소한 왕관을 썼다. 93세의 고령인 여왕이 쓰기엔 너무 무겁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옥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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