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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빚 혼냈다고 엄마 죽인 딸 5년 감형…법이 주목한 슬픈 사연[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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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8000만원 빚지고 성매매

엄마 충격 받아 “함께 죽자”

재판장 “회생·파산 도움 못받아

극단적 선택, 사회 책임도 있다”

1심 징역 22년→2심 17년 선고

중앙일보

그래픽=신용호shin.yong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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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지고 질책 좀 들었다고 엄마 죽이고 형이 무겁다고 항소하고”

“판사가 감형은 왜 하는 거냐”

빚 때문에 어머니를 살해한 딸의 판결 기사에 달린 인터넷 댓글입니다. 어떻게 빚 때문에 낳고 길러준 어머니를 죽일 수 있는지, 1심이 판결한 22년형을 항소심은 왜 5년이나 깎았는지 등을 비판하는 내용입니다. 두 댓글에는 모두 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공감을 표했습니다. A씨가 어머니를 죽였다는 사실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는데 형은 5년이나 줄어들었으니 많은 시민이 그 이유를 궁금해할 법합니다.

먼저 사건의 전말은 이렇습니다. 스물다섯 살 A씨는 신용카드 빚을 돌려막다 8000여만원의 빚을 지게 됩니다. 전전긍긍하던 A씨는 어머니(당시 55세)에게 이를 털어놓습니다. 이전에도 딸의 빚을 대신 갚았던 어머니는 A씨에게“함께 죽자”며 딸을 혼냅니다. 며칠 칠책을 당한 뒤 A씨는 집 근처 가게에서 시너를 사와 어머니가 씻고있는 동안 집에 뿌리고 불을 지른 뒤 홀로 집을 빠져나왔습니다. A씨의 어머니는 온몸에 화상을 입고 숨지고 말았습니다.

1심과 2심 모두 A씨의 존속살해죄가 무겁다고 봤습니다. 특히 ▶A씨가 어머니의 질책을 들은 뒤 시너를 산 점 ▶어머니를 구하려는 시도를 전혀 하지 않은 점 ▶체포되기 전까지는 마치 어머니의 자살을 암시하는 내용을 진술하기도 한 점 등에 비춰 사건을 은폐하려고 한 정황도 있다고 봤습니다. 1심은 “반사회적인 이 사건 범행에 상응하는 엄중한 처벌이 필요하다”고 판결했습니다.

사건을 받은 항소심은 A씨가 범죄를 저지르게 된 배경에 조금 더 주목했습니다. A씨의 죄가 무거운 것은 맞지만 A씨의 죄에는 A씨만의 잘못이 아니라 그 가족과 사회의 잘못도 함께 있다는 취지에서입니다.

A씨가 항소심 마지막 재판을 받던 지난 7월 17일 항소심 재판장(서울고법 형사1부 정준영 부장판사)은 A씨에게 17년을 선고하며 이런 말을 합니다. “삶의 바닥까지 내려갔던 A씨는 어머니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정서적 지지를 받기 어려웠다”는 말입니다. 항소심은 법정에서나 항소심 판결문에서 구체적으로 ‘삶의 바닥’이 무엇인지 표현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1심 판결문 등을 찬찬히 살펴보면 당시 A씨가 처했던 상황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엄마, 8000만원 갚으려 12시간 식당일

늘어나는 빚에 시달리던 A씨는 빚을 갚으려 성매매에까지 손을 대게 됩니다. 빚을 갚을 수 있을 거란 기대와 달리 A씨는 빚을 갚을 수 없었습니다. 막다른 길에 선 A씨는 어렵게 이를 어머니에게 털어놓습니다. 예상치 못한 딸의 고백에 A씨 어머니는 큰 충격을 받고 맙니다. “함께 죽자”는 어머니의 질책은 단순히 빚 때문이 아니라 이런 이유에서 나오게 된 겁니다.

A씨의 양형 이유를 설명하는 4장의 판결문에서 항소심 재판부는 묻습니다. “과연 우리 사회는 A씨가 빚을 스스로 청산할 기회를 제대로 준 적이 있느냐”고 말입니다. 어느 순간 자신이 감당하기 어려운 빚을 지게 된 A씨. 나이도 어리고 가진 것도 없는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일자리는 많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A씨에게 세상의 유혹은 너무도 쉽게 다가왔을 겁니다. ‘여성 고수익 아르바이트’ ‘숙식제공’처럼 인터넷만 켜면 쏟아져나오는 수많은 유혹 말입니다.

A씨의 어머니는 A씨의 빚 고백에 다음 날부터 식당 종업원으로 일합니다. 12시간씩 일해 딸의 빚을 조금이라도 갚으려는 노력이었습니다. 하지만 A씨도, A씨 어머니에게도 8000만원은 결코 쉽게 갚을 수 있는 빚은 아니었을 겁니다. 항소심 재판장은 “젊은 나이에 감당하기 어려운 빚을 진 A씨가 개인회생이나 파산같은 사회 제도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한 데에는 사회의 책임도 있다”고 지적합니다.

1심 “반사회적” 2심선 범죄 배경 중점

우리나라의 개인회생·파산제도는 1997년 외환위기사태(IMF) 이후 제도적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2019년 대법원 사법연감에 따르면 지난해 전국 법원에 접수된 개인회생 건수는 9만1219건, 개인파산 건수는 4만3402건입니다. 한 해 1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개인회생이나 파산제도를 고민합니다. 최근에는 동유럽에서 한국의 도산제도를 벤치마킹하려 할 정도로 나름대로 자리를 잡았다고 하는데 아직 모든 국민의 삶에 가까이 다가가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A씨와 A씨 어머니도 빚을 갚을 수 있는 사회적 제도를 조금이라도 알았다면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나라에 접수된 첫 개인 파산 사건을 맡기도 한 정 재판장은 “신용 대출이나 은행 서비스는 국가가 허가한 금융 서비스인 만큼 빚을 갚지 못하는 일부 국민이 있다는 위험성도 국가가 부담해야 하지만 갚지 못하는 이들에 대해 ‘모른척’ 눈을 감는 것이 사회 현실”이라고 진단합니다.

“17년 후 어머니께 다시한번 용서를 구하십시오” 항소심 재판장은 A씨의 선고 공판에서 A씨에게 이런 말을 건넸습니다. 어머니가 이미 돌아가신 이상 A씨가 어머니를 살해한 죄는 누구에게도 용서받기 어려울지 모릅니다. 하지만 단순히 A씨를 비난하기에는 우리 사회가 손놓고 있었던 점이 너무 많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수정 기자 lee.sujeong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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