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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막사발은 어떻게 일본의 국보가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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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등록문화재인 백자사발(왼쪽)과 백자 청화 국화·넝쿨무늬 접시(오른쪽). 일본 사가현립 규슈도자문화관 소장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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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써서 보낸 조선인 포로 중 세공을 하는 자와 손재주가 있는 자는 여자라도 일을 시킬 수 있도록 상부로 보내줄 것이며….”

임진왜란 도중인 1593년(선조 26년) 11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1536~1598)가 일본 사가번주(佐賀藩主)인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武·1538~1618)에게 보낸 주인장(朱印狀·해외통상을 허가하는 쇼군의 도장을 찍은 공문서)이다. 이 명령에 따라 나베시마는 1593년과 1598년 2차례에 걸쳐 도자기를 만드는 사기장과 봉제공, 잡화공, 대장장이 등 수많은 조선인 기술자를 끌고갔다. 도요토미는 또 임진왜란이 소강상태로 빠진 1595년 6월 잠시 귀국한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1535~1619)에게 직접 차를 따라주고 차 도구도 하사하면서 조선인 도공의 납치를 지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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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오이도 다완. 조선에서는 막사발로 쓰인 그릇이 일본에서는 오다 노부가나의 하사품,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증표로 활용됐다. |가라쓰시 교육위원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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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국보가 된 조선의 막사발

전체적으로 얼마나 많은 수의 조선인이 끌려갔는 지는 가늠할 수 없다. 2만~3만명설(일본측 자료)에서 10만~40만명설(조선측 자료) 등 다양하다, 일본인들이 특히 열광한 것은 바로 조선의 도자였다.

그 중 이른바 막사발로 일컬어지는 조선 그릇이 크게 인기를 끌었다. 특히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1534~1582)가 시바타 가츠이에(柴田勝家·1522~1583년)에게 준 선물(시바타 이도·柴田井戶)은 일본 국보로 지정돼 있다. 이 찻잔은 조선에서는 16세기 진주의 민가에서 사용되는 제기용 그릇으로 제사 때 김치를 담아올리던 사발이었는데 일본에서는 정치적 흥정물로 각광을 받은 것이다. 일본에서는 조선제 막사발을 이도다완(井戶茶碗·고려다완)이라 했다. 도요토미도 오다의 ‘찻잔 정치’를 이어받아 이 막사발 선물을 증표로 활용했다. 도요토미에게서 사발을 하사받은 다이묘(大名·각 지방을 다스린 유력자)는 다른 영주가 침략해오면 ‘도요토미의 증표’라며 이 사발을 보여주었다. 그러면 상대 다이묘는 공격을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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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 청화 사자무늬 큰 접시. 조선장인과 도자기술이 밑거름이 된 일본의 도자문화는 중국의 명·청 교체기에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고 자체적으로 기술혁신을 거듭하면서 발전했다.|사가 현립 규슈도자문화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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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토미는 오사카성(大阪城)과 히젠나고야성(肥前名護屋城)에 황금다실을 마련하고는 다회를 열어 충성을 시험하기도 했다. 다회에서 도요토미는 농차(濃茶·한 잔의 차를 여러 손님이 돌려 마시는 음다법)를 한모금 먼저 마시고 옆의 무사에게 건네주었다. ‘독을 타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도요토미는 오다의 은덕을 기리는 편지에서 “다도는 정치의 도”라는 말을 남겼다. 이랬기에 도요토미 주변 다이묘와 무사들이 조선 차 사발인 이도다완(고려다완)을 헌상하는 것은 권력자의 환심을 사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이도다완은 일본의 다성(茶聖)으로 통하는 센 리큐(千利休·1522∼1591년)가 천하제일로 꼽은 그릇이다. 고급 이도다완은 일본성 한 채 값에 비유될 정도로 고가의 보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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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 채색 넝쿨무늬 마름모 모양 접시. 14~15세기 무렵 일본의 도자기 산업은 낙후되어 있었다. 당대 도자기를 제작할 수 있는 나라는 중국과 조선 뿐이었다. |사가현립 규슈도자문화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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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야 짖지마라…그 개도 호고려 개로다…’

그랬으니 도요토미가 임진왜란 때 기술자 중에서도 특히 조선 도공의 납치를 지시했던 것이다.

14~15세기 무렵 도자기 산업은 지금으로 치면 반도체라 할만큼 최첨단 산업이었다. 이 무렵 도자기를 생산할 수 있는 나라는 중국과 조선 정도 뿐이었다. 일본의 경우 다이묘들 사이에 차문화가 유행하는 등 도자기 수요가 급증했지만 정작 자체 생산능력은 없었다.

도요토미의 조선도공 납치로 일본의 도자기 산업은 괄목상대한다. 그래서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이라고도 일컫는 것이다. 끌려간 조선도공 후예가 17세기 초 지금의 야마구치현(山口縣) 하기(萩)지역에서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한글묵서다완(일본명 추철회시문다완·萩鐵繪詩文茶碗)’에 새긴 싯구는 심금을 울린다.

“개야. 짖지 마라. 밤 사람이 다 도둑이냐. 자묵땅(다목지·지금 혹은 인명) 호고려님 ‘지슘’(계시는 곳?) 다니는 구나, 그 개도 호고려 개로다. 듣고 잠잠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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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 채색 꽃무늬 맥주잔. 다양한 색상으로 화려하게 만든 히젠 자기의 기원은 조선 장인이 만든 소박하면서도 친근한 조선도자문화에서 찾을 수 있다. |사가현립 규슈도자문화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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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호고려’는 임진왜란 때 납치된 조선인을 일본인이 부르던 호칭으로 추정된다. ‘되 고려사람’, 혹은 ‘오랑캐 고려사람’의 뜻이었지만 언제부터인가 ‘납치된 조선인’을 일컫는 보통명사가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17세기초면 납치된 뒤 50년 이상 지났던 때다. 고된 도기제작 일 때문에 밤에만 돌아다닐 수 있는 조선출신 도공들 처지를 빗대 푸념하는 내용으로 추정된다. 끌려간 도공들의 삶은 녹록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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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 채색 꽃바구니 무늬 팔각 큰 항아리. 국립진주박물관은 특별전을 위해 12점의 히젠 도자기 명품을 선별해서 일본 도자의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다고 한다. |사가현립 규슈 도자문화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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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수는 틈만 나면 고향으로 돌아갈 궁리를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황무지를 개간하면서 가마를 짓고 조잡한 일상잡기를 제작하면서 토착민과 물물교환하고 겨우 목숨을 부지했다. 물론 언어장벽 때문에 일본인들과 충돌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그냥 눌러앉으려는 이들도 생겼다.

끌려간 조선인의 귀환을 도모하려고 일본을 방문한 이경직(1577~1640)의 기행문인 <부상록>은 “돌아가려는 자는 조금 식견있는 사족이거나 일본에서 고생하는 사람이지만, 삶이 안정된 이들은 귀국의 뜻이 전혀 없었으니 가증스럽기 짝이 없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끌려가는 제 백성을 돌보지 못한 조정이 무슨 낯으로 그들을 비판한단 말인가. 이런저런 이유로 눌러앉은 이들은 소속 영주들의 보호로 정착금과 토지를 받고 자치읍을 형성하면서 일본의 도자기 산업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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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채색 동백무늬 접시. 히젠의 ‘이마리 자기’로 대표되는 일본 에도시대 도자산업 발전은 임진왜란 당시 포로로 끌려갔던 조선 장인들에게 상당부분 빚지고 있다. |사가현립 규슈도자문화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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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기의 신 ‘이삼평’

이중에 일본이 자랑하는 ‘아리타(有田)자기’의 시조로 추앙 받는 이삼평(李參平·?~1655)이 포함돼 있었다. 이삼평(일본명 가네가에 삼베에·金カ江三兵衛)은 일본에서 도자기의 신으로 일컬어진다.

가라쓰(唐津) 근방에 닿은 이삼평은 다쿠번(多口藩)에 맡겨져 가마를 짓고 도자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다쿠고가라쓰(多久古唐津)는 바로 그가 시작한 가라쓰 도자기이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양질의 점토를 구할 수 없었기에 계속 장소를 옮겨 가마를 만들다가 규슈(九州) 히젠번(肥前藩) 아리타의 이즈미야마(泉山)에서 백자광을 발견했다. 그곳에서 도예촌(덴구다니요·天狗谷窯)를 열었는데 이것이 일본자기의 시초가 됐다.

이삼평 덕분에 30년도 지나지 않아 아리타에는 수많은 도공들이 집결해 번성을 이뤄 이른바 대도향(大陶鄕)이 됐다. 생산된 도자기는 이마리항(伊万里港)을 통해 널리 수출됐다. 언젠가부터 아리타의 도자기는 ‘아리타 자기’ 혹은 ‘이마리자기(伊万里燒)’라 알려졌다. 지금도 ‘올드 이마리’, ‘이마리야키’ 등은 도자기 애호가들에게 사랑받는 ‘히젠 도자기’의 애칭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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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 채색 꽃·새무늬 육각 항아리. 일본의 도자문화는 조선의 장인과 도자기술이 밑거름이 되어 발전했다.|규슈국립박물관 소장

■조선자기와 히젠자기

국립진주박물관은 10월1일부터 12월8일까지 ‘조선도자, 히젠의 색을 입다’를 주제로 한·일 문화교류 특별전을 개최한다. 이번 특별전에는 일본의 등록문화재인 ‘백자 청화 국화·넝쿨무늬 접시(일본 사가현 규슈도자문화관 소장)’ 등 규슈 소재 8개 기관이 소장한 히젠자기 71점과, 왕실묘 부장품으로 확인된 ‘의소세손(사도세자의 장남) 의령원 출토품’(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등 국내외 기관 소장품 200여점이 선보인다. 특히 히젠자기 성립과 관련된 국내 각지의 가마터 출토품도 소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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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끌려간 조선도공의 후예가 17세기 초 야마구치현(山口縣) 하기(萩)지역에서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한글묵서다완(일본명 추철회시문다완·萩鐵繪詩文茶碗)’에 처량한 자신의 심경을 새겼다. “개야. 짖지 마라. 밤 사람이 다 도둑이냐. 자묵땅(다목지·지금 혹은 인명) 호고려님 ‘지슘’(계시는 곳?) 다니는 구나, 그 개도 호고려 개로다. 듣고 잠잠하구나”는 내용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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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1부는 임진왜란 전 일본 다도문화의 성행으로 인한 조선 도자의 수출과 조선 장인들이 미친 영향을 살펴본다. 2부는 임진왜란 당시 끌려간 조선 도공들 덕분에 탄생한 일본 자기문화가 성장·발전하고 유럽으로 수출되기까지 전개과정을, 3부는 17~19세기 조선-일본의 도자교류를 각각 살펴본다.

박아연 국립진주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조선장인과 도자기술이 밑거름이 된 일본의 도자문화는 중국의 명·청 교체기에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고 자체적으로 기술혁신을 거듭하면서 히젠의 색을 담아 꽃피웠다”고 전했다.

최영창 국립진주박물관장은 “히젠에서 꽃핀 일본의 도자문화는 조선의 영향을 빼놓고는 설명이 불가능하다”면서 “다양한 색상으로 화려하게 만든 히젠 자기의 기원은 조선 장인이 만든 소박하면서도 친근한 조선도자문화에서 찾을 수 있다”고 밝혔다. 최영창 관장은 “이번 전시는 국내에서 처음 개최되는 일본도자 특별전”이라면서 “최근 한·일관계가 최악으로 치닫고 있지만 문화교류 만큼은 지속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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