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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검찰 중수부 이어 특수부도 역사 속으로···'조국 수사' 역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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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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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무부가 14일 일선 검찰청 특수부(특별수사부)의 명칭을 바꾸로 확정하면서 대검찰청 중수부(중앙수사부)와 함께 ‘거악 척결’을 내건 검찰의 간판부서가 6년새 모두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조국 법무부 장관 일가를 둘러싼 의혹에 대한 수사를 서울중앙지검 특수부가 맡은 것이 이번 특수부 이름 변경과 규모 축소 개편의 빌미가 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특수부라는 이름이 검찰 역사에 등장한 건 1973년 1월이다. 당시 대검찰청에 특수부가 창설돼 수사국 역할을 물려받았다. 이듬해는 서울지검과 부산지검에도 특수부가 생겼다.

대검 특수부는 1981년 중수부로 확대 개편됐다. 검찰총장 하명사건 수사는 물론 범죄정보와 형사정책 관련 여론 수집도 맡았다. 전국 지검·지청에 설치된 특수부는 대검 중수부의 지휘를 받았다.

‘특수통’으로 불리는 검사들은 대검 중수부와 일선 검찰청 특수부를 오가며 수사경험을 쌓았다. 검찰 조직의 ‘엘리트’란 자부심도 강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시절 대선자금 의혹을 수사한 안대희 전 대법관, ‘박연차 게이트’ 수사에 참여한 최재경 전 청와대 민정수석 등 이름난 특수통 검사들이 대검 중수과장, 서울지검 특수부장을 거쳐 대검 중수부장을 했다. 윤 총장 역시 대검 중수 1·2과장과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장을 역임했다.

중수부와 특수부는 중요한 사건을 기소한 경우 공소유지도 직접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첩보 생산→내사→정식 수사→기소→공소유지’로 이어지는 형사사법의 전 과정을 한 곳에서 도맡은 셈이다. 이는 기소독점·편의주의와 함께 ‘무소불위 검찰 권력’이라는 비판의 근거로 작용했다.

사회적 이목이 집중된 특수부 수사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리는 경우가 많았다. 여론의 지지를 받으면 ‘국민검사’가 탄생하곤 했다. 그러나 정치인이 연루된 사건을 수사하고 나면 ‘정치검사’, ‘권력의 시녀’라는 비아냥을 받기도 했다.

대검 중수부는 노무현 전 대통령 수사 이후 정치적 중립성 시비에 끊임없이 시달리다가 2013년 문을 닫았다. 한상대 전 검찰총장은 검찰개혁의 일환으로 중수부 폐지를 주장했다가 후배검사들과 극심한 갈등을 빚은 끝에 검찰을 떠났다. 특수통 검사들이 일으킨 ‘검란’에는 윤석열 당시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장도 역할을 했다. 중수부를 대체한 대검 반부패부(현 반부패강력부)는 직접 수사에서 손을 떼고 일선 검찰청 특별수사를 지휘·지원하는 역할만 맡았다.

대검 중수부 폐지는 특별수사 화력이 서울중앙지검 특수부에 집중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2014년에는 서울중앙지검에 특수4부를 신설했다. 2016년 연말 이른바 ‘촛불혁명’ 이후 전직 대통령 2명과 전직 국가정보원장 2명, 전직 대법원장, 재계 순위 1위 기업집단 총수가 특수통 검사들 손에 구속됐다. 윤 총장이 서울중앙지검장에서 검찰총장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서울중앙지검 특수부가 과거 대검 중수부식으로 운용된다’는 분석 내지 비판이 더 힘을 얻었다.

이같은 검찰 특수부 개편은 조 장관 일가를 둘러싼 의혹 수사를 하다가 맞은 역풍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최초에 조 장관 관련 고소·고발 사건들은 서울중앙지검 형사1부에 배당됐으나, 사건의 규모와 중요성 등 때문에 특수2부로 재배당해 수사에 착수했다. 이때 여러 의혹에 대한 수사로 인해 특수2부뿐 아니라 다른 특수부 인력까지도 동원되면서 여권에서 ‘과잉 수사’ 등 비판이 쏟아졌다.

다만 특수부를 사실상 폐지하는 이번 검찰개혁안에 대해 겉으로는 별다른 동요가 감지되지 않는다. 윤 총장은 검찰의 직접수사를 축소해 검찰개혁에 동참한다는 취지로 검찰청 3곳을 제외하고 특수부를 폐지하는 방안을 법무부보다 먼저 제시했다./조권형기자 buzz@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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