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55570567 0022019101455570567 02 0201001 6.0.16-HOTFIX 2 중앙일보 0 related

방사선 분석법으로 사건 해결, 화성 8차 살인이 처음이었다

글자크기
1988년 9월 16일 화성군 태안읍 진안리(현 화성시 진안동) 한 가정집에서 중학생 A양(당시 13세)이 숨진 채 발견됐다. 범인은 이전 화성 연쇄살인 사건과 달리 피해자의 옷가지로 피해자를 결박하거나 재갈을 물리진 않았다. 범행 장소는 야외가 아닌 집 안이었다. 그러나 성범죄를 당하고 숨진 여성이라는 공통점 때문에 8차 화성 살인 사건으로 분류됐다.

용의자를 찾던 경찰은 현장에서 발견한 남성 음모 8가닥을 결정적 증거로 삼았다. 국과수 분석결과 이 음모의 혈액형은 B형이었다. 경우의 수를 줄인 경찰은 용의자 압축을 위해 방사성 동위원소 분석을 진행했다. 중성자를 이용해 시료의 성분을 분석하는 방식이다.

경찰은 농기계를 수리하는 22세 B형 남성 윤모씨에 주목했다. 4차례에 걸쳐 윤씨의 음모를 채취했고 최종 용의자로 판단해 윤씨의 음모에 대해서만 방사성 동위원소 분석을 의뢰했다. 국과수는 분석 결과를 토대로 현장에서 수거한 음모와 윤씨의 음모가 원소 12개 중 10개의 함량이 편차 40% 이내에서 일치한다는 감정 결과를 내놓았다. 윤씨의 음모는 실체 현미경 등으로 모발의 종류, 굵기 등을 파악하는 형태 감정에서도 현장 증거물과 동일한 형태를 보였다고 한다.

경찰은 이를 토대로 윤씨를 조사해 8차 사건을 저질렀다는 자백을 받았다. 윤씨는 1심 재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그는 고문으로 허위 자백했다며 항소했지만 2심과 3심에서 기각됐다. 무기수로 복역하다 감형받아 2009년 가석방됐다.



“증거물 수집·분석 객관적이었는지 검토해야”



중앙일보

8차 화성 연쇄살인 사건이 발생한 A양의 집. [중앙포토]


다른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진범으로 지목된 이춘재(56)는 최근 8차 사건 역시 자신이 저질렀다고 자백했다. 이 사건 용의자로 20년을 복역한 윤씨 역시 “내가 한 일이 아니다”라며 재심을 준비 중이다. 이에 따라 당시 ‘국과수의 혈액형 판별이 잘못된 것 아니냐’ ‘방사성 동위원소 분석이 신뢰성 있느냐’는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다.

방사성 동위원소 분석을 이용하면 현장 증거물과 대조군(용의자의 생체시료 등)과의 유사성을 판별할 수 있다. 순서는 이렇다. 시료를 연구용 원자로에 넣고 중성자를 쪼이면 시료 안에 있는 다양한 원소들이 중성자와 반응해 불안정한 방사성 핵종이 된다. 이 핵종은 특정한 에너지를 가진 감마선을 배출한다. 이 감마선을 측정하면 시료 내 원소의 양을 파악할 수 있다. 보통 10~20개의 원소를 분석한다고 한다.

경찰 등에 따르면 화성 8차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음모를 망간, 티타늄 등 10여개 정도의 원소에 대해 분석한 결과 중금속인 티타늄이 13.7ppm 검출됐다. 일반인보다 높은 수치였다. 경찰은 이를 토대로 티타늄을 사용하는 용접공이나 생산업체 종업원 중 B형 혈액형인 460명의 음모를 취합했다.

진안리에 거주하는 남성들의 음모도 채취했다. A양이 집안에서 살해된 만큼 면식범의 소행으로 추정됐기 때문이다. 이때 이춘재의 음모도 2차례 채취됐다. 그러나 이춘재는 “B형 혈액형인데 형태가 다르다” “혈액형이 O형이고 형태도 다르다”는 결과가 나오면서 용의선상을 벗어났다. 윤씨의 음모에 대해서만 방사성 동위원소 분석을 의뢰한 경찰은 그를 범인으로 특정했다.

중앙일보

윤씨의 구속을 알리며 '화성 사건 미궁에서 벗어나려나'를 기대한 1989년 7월 29일자 중앙일보 기사. [중앙포토]



윤씨의 재심을 맡은 박준영 변호사는 8차 사건 증거물 수집과 분석이 객관적인지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박 변호사는 “윤씨가 지난주 면담에서 과거 경찰이 윤씨의 음모를 5~6번 뽑아갔다고 증언했다”며 “경찰이 반복해서 음모를 채취해 갈 때 ‘잃어버려서 다시 뽑아야 한다’는 말도 했다고 한다. 당시 진안리와 공장 근로자 등을 상대로 음모를 뽑아갔는데 이런 증거물들이 제대로 관리가 됐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방사성 동위원소 분석, 정확한가



한국 원자력 연구원 관계자에 따르면 방사성 동위원소 분석법은 도입된 지 40~50년 된 기술이다. 지금은 중성자 방사학 분석법이라 불린다. 음모 등 생체시료뿐만 아니라 플라스틱, 유리 등 다양한 시료를 분석할 수 있다. 이전에도 수사와 관련해 차량 페인트 ·생체 시료 분석을 위해 사용된 적이 있었지만, 해결에 쓰인 것은 8차 화성 살인 사건이 처음이라고 한다.

연구원 관계자는 이 기법은 정확한 개별 시료 성분 분석법이라고 밝혔다. “체모 등 생체시료의 경우 일반 시료와 다르게 생활 환경, 신체 대사 등에 따라 개인 편차가 발생하지만 ‘40%의 편차 이내’는 평균적인 수치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충분히 판단 근거로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 국과수는 방사성 동위원소 분석 대신 X선을 이용해 성분 분석을 하는 ‘XRF’와 시료를 고온상태로 만든 뒤 분광기로 성분 분석을 하는 ‘ICP’ 등을 사용하고 있다. 국과수 관계자는 "방사성 동위원소 분석법은 원자로를 사용해야 하므로 비용과 시간이 많이 소요돼 편리성 등의 이유로 다른 기법을 사용한다”면서 “방사성 동위원소 분석법이 부정확한 기법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원자력 연구원 관계자도 “XRF나 ICP가 방사성 동위원소 분석보다 나중에 나오긴 했지만, 어느 것이 우월하다고 말하긴 어렵다”고 말했다.



“용의자 좁히는 용도로 쓰여”



중앙일보

화성연쇄살인사건 수사본부. [뉴스1]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과거 국과수에서 근무한 임시근 성균관대 과학수사학과 교수는 “윤씨를 범인으로 특정하는 과정에서 사용된 방사성 동위원소 분석은 DNA 분석 도입 전 최선의 방법이었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DNA 분석보다는 식별력이 떨어지지만, 용의자 특정이 어려울 경우 충분히 용의자의 범위를 좁히는 용도로 사용 가능하다는 것이다.

임 교수에 따르면 국과수에서 본격적으로 DNA 분석 기법을 사용한 시기는 1990년대 중반이다. 국과수에 개인 DB(데이터베이스)를 갖춘 것도 2010년 이후라고 한다. 현재 혈액형 분석 등은 과거와 달리 DNA 분석으로 이뤄지고 있다. 최근 이춘재의 DNA 분석에는 2010년대에 도입한 장비가 사용됐다고 한다.

임 교수는 “8차 사건 범인을 특정하는 과정에서 가장 주요한 증거는 용의자의 자백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방사성 동위원소 분석 결과만으로는 용의자의 범위를 좁힐 뿐 특정하기 어려워 자백이 없었으면 유죄로 인정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경찰은 8차 화성 연쇄살인 사건 관련해 이춘재의 자백 신빙성을 확인하는 한편 과거 수사 과정에 문제가 있었는지 들여다보기로 했다. 이 사건을 수사하고 있는 경기남부지방경찰청 전담수사본부는 지난 10일 “논란이 되는 8차 화성 살인 사건에 대해 오류가 남지 않도록 하겠다”라고 밝혔다.

심석용·최모란·최종권 기자 shim.seokyong@joongang.co.kr

중앙일보 '홈페이지' / '페이스북' 친구추가

이슈를 쉽게 정리해주는 '썰리'

ⓒ중앙일보(https://joongang.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함께 볼만한 영상 - TV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