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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9 (화)

임진왜란으로 폐허된 경복궁, 270년간 왜 복원 못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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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이향우의 궁궐 가는 길(1)



서울 사람들에게 궁궐은 가깝고도 멀다. 늘 가까이 있으니 무심해지고, 궁궐에 가본들 크게 감흥도 없다. 궁궐에 들어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건물만 기웃거리며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속에 담긴 역사적 이야기와 건축의 유래를 알고 본다면 궁궐을 바라보는 시선은 달라질 것이다. 교직 생활을 하다 조각가로 전업한 필자가 우리 궁궐의 아름다운 세계로 안내한다.<편집자>

조선 시대의 궁궐이 있는 곳은 모두 서울의 한강 북쪽 지역이다. 궁궐 이야기를 하기 전에 우선 지금의 넓은 서울이 아닌 본래 조선 왕조의 수도 한양(漢陽)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1392년 7월 17일 태조 이성계가 개경의 수창궁(壽昌宮)에서 즉위했다. 고려 공양왕으로부터 선위의 형식으로 즉위했으나 역성혁명이었다.

처음에는 민심의 동요를 염려해 국호는 그대로 고려로 두었지만, 1393년 2월 15일 조선(朝鮮)이라 고치고 고려의 500년 도읍지 개경에서 천도를 결심한다. 태조는 재위 3년(1394년) 8월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로 하여금 한양을 새 도읍으로 정하게 하고, 같은 해 9월 1일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설치했다. 새 수도의 도시 계획을 구상하고 천도를 명령한 태조는 종묘와 사직 그리고 궁궐터를 정한 뒤, 그해 10월 25일 역사적 한양천도를 단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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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가 새 도읍지로 선택한 한양의 입지조건은 외사산과 내사산으로 둘러싸여 전쟁과 왜적의 방어에 유리한 지형을 갖추고 있었다. 사진은 서울을 외곽에서 감싸고 있는 북한산 인수봉.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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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가 새 도읍지로 선택한 한양 땅은 넓은 분지 형태로 한반도의 중심부에 있다. 한양의 입지조건은 외사산(外四山)과 내사산(內四山)으로 둘러싸여 전쟁과 왜적의 방어에 유리한 지형을 갖추고 있을 뿐 아니라, 한양도성을 중심으로 약 18Km의 청계천이 외수인 한강과 합수해 서해로 빠져나가는 물길로 수운(水運)에 의한 교통이 편리한 곳이다. 즉 한양은 지형적으로 정치·경제·교통·국방의 요충지로서 제반여건을 고루 갖춘 천혜의 길지였다.



서울 에워싼 외사산과 내사산



서울을 외곽에서 감싸고 있는 외사산은 북한산(北漢山)을 중심으로 동쪽의 아차산(峨嵯山), 서쪽의 덕양산(德陽山), 그리고 한강 건너 북한산과 마주 보고 있는 관악산(冠岳山)을 말한다. 한양은 북한산에 기대어 한강이 외수로 흐르는 경계까지, 즉 북한산의 남쪽부터 한강의 북쪽 지역을 가리키는 좁은 범위의 서울이다. 북한산 줄기가 남으로 내려온 백악(白岳)은 청와대 뒤편에 보이는 서울의 주산(主山)이다. 산줄기는 백악에서 동으로 벋어나가 응봉(鷹峰)을 이루고 서울의 동편에 이르러 타락산(駝駱山)이 되었다. 백악의 서편으로 인왕산(仁王山)이 솟고 남쪽에 목멱산(木覓山)이 있다. 이 네 개의 산 백악, 타락산, 인왕산, 목멱산이 바로 서울을 에워싸는 내사산이다.

그러면 서울에 있는 궁궐이란 어떤 곳일까? 조선 시대의 궁궐에는 왕이 살았다. 왕의 집이며 왕의 사무공간이고, 왕실 가족들과 그들을 보필하는 여러 사람이 함께 일하고 살던 공간이다. 그러니까 궁궐에는 각 용도에 따라 여러 채의 집과 그 집을 나누고 연결하는 담장과 문이 있다.

궁궐은 궁(宮)과 궐(闕)을 합친 말이다. 궁은 왕을 비롯한 왕실 가족 및 궁궐 사람들이 사용하는 건물을 뜻하고, 궐은 건물을 에워싼 궁장과 출입문 좌우에 설치하였던 망루(望樓)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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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국왕들은 늘 법궁과 이궁을 번갈아 오가면서 지냈다.경복궁은 태조가 고려의 기존 세력권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정치 이념을 실현하고자 한양천도를 단행하여 지은 조선왕조의 첫 번째 법궁이다. [사진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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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궁궐은 고대 중국 궁궐제도의 규범인 『주례고공기(周禮考工記)』를 기본으로 삼고 있다. 이는 유교적 군주관을 정치의 이상으로 여겼던 중국 주나라시대의 궁궐건축에 관한 제도를 받아들인 것이다. 경복궁의 왼편(동쪽)에 국가 사당인 종묘(宗廟)를, 오른편(서쪽)에 사직단(社稷壇)을 두어 종묘에 왕의 조상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고 사직단에서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나라의 번영과 안위를 빌었다.

지금 서울에는 조선 시대에 법궁(法宮)이나 이궁(離宮)으로 쓰였던 다섯 개의 궁궐이 남아 있다. 법궁은 왕이 주로 머물면서 정사를 돌보던 핵심 궁궐을, 이궁은 필요에 따라 옮겨 갈 수 있는 여벌의 궁궐을 각각 말한다. 서울의 주산 백악에 기대어 지은 경복궁은 반듯한 터에 전각들도 남북축에 맞추어 질서 있게 배치돼 있다.

백악이 동쪽으로 흐르다 솟은 응봉의 한 줄기는 창덕궁의 인정전을, 또 한 줄기는 창경궁의 명정전을 받쳐주고, 그 남쪽 산줄기는 종묘 정전을 받치고 있다. 경희궁은 백악의 서쪽 인왕산에 기대어 지은 궁궐이고 덕수궁은 원래 이름이 경운궁으로 고종 대에 지은 대한제국의 황궐(皇闕)이다. 조선 왕조가 이 다섯 궁궐을 모두 동시에 운영했던 것은 아니고 시기적으로 번갈아 사용하다 폐쇄하기도 하고 또 새로 지어 오늘 다섯 궁궐이 남게 된 것이다.



법궁과 이궁의 양궁체제



조선왕조의 궁궐 경영방식은 크게 법궁과 이궁의 양궐(兩闕) 체제로 볼 수 있다. 조선의 국왕들은 늘 두 궁궐을 번갈아 오가면서 지냈다. 경복궁은 태조가 고려의 기존 세력권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정치 이념을 실현하고자 한양천도를 단행하고 나서 지은 조선왕조의 첫 번째 법궁이다. 태종은 1405년(태종5년) 향교동에 창덕궁을 이궁으로 짓고 이어 했다. 이후 성종 대에는 왕실 가족을 위한 생활공간의 확장으로 창덕궁에 잇대어 창경궁을 짓고, 경복궁을 법궁으로 창덕궁과 창경궁을 이궁으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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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은 창덕궁과 창경궁을 중건하고 경희궁을 영건했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창덕궁이 법궁이 되고 경희궁이 이궁이 되는 새로운 양궐 체제가 정립되었다. 사진은 경희궁 숭정전. [사진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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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으로 한양의 모든 궁궐이 불탔고, 피난을 갔던 선조는 1년 후 한양으로 돌아와 임시로 정릉동에 있던 월산대군의 사저를 행궁으로 사용하다가 그곳에서 승하했다. 1608년 2월 2일 정릉동행궁 서청에서 즉위한 광해군은 창덕궁과 창경궁을 중건하고 경희궁을 지었다. 광해군은 창덕궁으로 이어 하면서 정릉동행궁을 경운궁이라 이름 지었다. 궁궐의 면모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행궁이지만 국왕이 한때 정사를 보았던 거처를 그냥 둘 수 없으니 궁이라 칭한 것이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창덕궁이 법궁이 되고 경희궁이 이궁이 되는 새로운 양궐 체제가 정립됐다. 그러나 역대 국왕들은 임진왜란으로 불탄 조선왕조의 첫 번째 궁궐인 경복궁을 국가 재정적인 형편으로 복원하지 못하는 데 따른 부담을 떨칠 수 없었다. 1863년 고종이 즉위한 후 대왕대비(신정왕후)는 흥선대원군에게 경복궁 중건을 명했다. 임진왜란 후 270여년간 폐허로 두어야 했던 경복궁의 면모를 되살린 것이다. 드디어 고종 5년(1868년) 국왕이 대왕대비를 모시고 경복궁으로 이어 하면서 창덕궁은 다시 이궁이 되었다.



법궁 지위 주고받은 경복궁과 창덕궁



그 이후 동아시아의 격랑 속에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1895년 10월 경복궁 내 건청궁에서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이 일어났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이듬해 2월 11일 왕세자를 데리고 정동에 있는 러시아 공사관으로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단행하였다.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는 1년 동안 경운궁을 수리해 1897년 환궁하고, 그해 8월 14일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황제위에 올랐다. 그러나 1907년 일제의 압력으로 고종이 퇴위당하고 황제 위에 오른 순종이 창덕궁으로 이어 한 뒤, 고종이 머무는 경운궁은 덕수궁(德壽宮)으로 궁호가 바뀌었다.

조각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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