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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배우들의 티타임’ 로저 미첼, 달콤하고 씁쓸한 인생에 [김노을의 디렉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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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경닷컴 MK스포츠 김노을 기자

연출자의 작품·연출관은 창작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영화, 드라마, 예능 모두 마찬가지죠. 알아두면 이해와 선택에 도움이 되는 연출자의 작품 세계. 지금부터 ‘디렉토리’가 힌트를 드릴게요. <편집자주>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태어난 로저 미첼 감독은 시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 영국 등 다양한 나라에서 성장했다.

감독의 이름을 들으면 다소 생소할 수 있으나 로맨틱 코미디계 전설처럼 여겨지는 ‘노팅 힐’을 연출한 감독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마냥 행복하기만 해서 때때로 시시하게 느껴지는 로코물이 아닌, 달고 쓰고 짭조름해서 남 얘기 같지 않은 영화를 만들어온 로저 미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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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저 미첼 감독 사진=ⓒAFPBBNews=News1


◇ 로맨틱 코미디라면 이렇게, ‘노팅 힐’(1999)

로저 미첼은 1995년 영화 ‘설득’으로 데뷔해 1998년 ‘타이타닉 다운’을 연출, 이듬해 ‘노팅 힐’을 내놨다.

애나(줄리아 로버츠 분)는 세계적인 스타이자 이 세상 누가 봐도 아름다운 여자다. 윌리엄(휴 그랜트 분)은 런던 노팅 힐에서 여행 전문 서점을 운영하는 남자다. 운명처럼 만난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한 마음을 확인하고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평범한 사랑을 기다린 애나와 특별한 사랑은 두려운 윌리엄의 마음은 자꾸만 어긋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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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노팅 힐’ 포스터 사진=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노팅 힐’은 로맨틱 코미디의 기본 조건에 충실하다. 인물 중 한 명은 감히 쳐다볼 수 없을 정도의 높은 계급에 있는 사람이고, 또 다른 이는 지극히 평범하거나 어딘가 불행하기도 하다. 좀처럼 좁혀지지 않은 간극도 존재한다.

그러나 로저 미첼은 어느 한쪽에 치우치거나 답답한 상황을 만들기보다 각 인물에 충실하다. 스토리는 단순하지만 그 특유의 유머가 깃들고 누구 하나 나쁜 인물 없이 따뜻하다. 두 주인공을 돋보이기 위해 불필요한 장치를 억지로 끌어들이는 실수도 없다. 인물들 사이 발생하는 몇 번의 오해가 스토리에 굴곡을 주면서도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로맨틱 코미디 ‘노팅 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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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위크엔드 인 파리’ 포스터 사진=판씨네마


◇ 노부부의 두 번째 허니문 ‘위크엔드 인 파리’(2013)

로저 미첼의 장기는 노부부의 두 번째 허니문을 다룬 영화 ‘위크엔드 인 파리’에서도 제대로 발휘된다.

어느덧 결혼 30주년을 맞은 닉(짐 브로드벤트 분)과 멕(린제이 던칸 분)은 소싯적 신혼여행지였던 파리로 다시 떠난다. 추억에 젖은 짐은 신혼여행 당시 묵었던 호텔을 예약하지만, 부부가 30년이라는 시간을 지나온 만큼 호텔 역시 예전의 모습은 흔적도 없이 변했다. ‘우리’의 과거를 되짚으려던 이 부부의 시작은 처음부터 삐거덕거린다. 결국 급히 다른 숙소를 찾던 도중 멕은 호텔 직원의 말만 믿고 스위트룸을 예약, 부부의 갈등은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둥둥 떠오른다.

닉과 멕은 여전히 서로를 사랑한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난 만큼 다투는 일이 잦아졌고, 상대의 기분을 생각하지 못해 서로의 마음에 생채기를 낸다. 두 인물을 지배하는 권태가 아닌 위태로움이다. 사랑을 지키고 싶어 떠난 파리에서도 위태로움은 어디로 숨을 기색 하나 없이 오히려 꼿꼿이 들이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닉과 멕은 일상에서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털어놓으며 상대의 마음, 더 나아가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본다.

로저 미첼은 수십 년을 함께 살아온 두 남녀의 이야기를 통해 관객들을 웃게도, 울게도 만든다. 이들은 젊었던 그때처럼 여전히 순수하고 서로를 사랑한다. 그리고 로저 미첼은 그런 두 인물의 사랑을 따뜻하게 녹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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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여배우들의 티타임’ 포스터 사진=영화사 오원


◇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여배우들의 티타임’(2018)

로저 미첼이 이번에는 네 명의 여배우가 가지는 티타임을 카메라에 담았다.

10일 개봉한 ‘여배우들의 티타임’은 배우 주디 덴치, 매기 스미스, 에일린 앗킨스, 조안 플로라이트의 티타임을 찍은 다큐멘터리다.

이 다큐멘터리 속 네 명의 배우는 모두 영국 왕실이 연기예술 공헌자에 수여한 데임 작위를 받은 전설들이다. 로저 미첼은 영국의 조용한 시골에 위치한 조앤 플로라이트 자택에서 만나 티타임을 가지는 이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엿듣는다.

여유 넘치는 대배우들과 로저 미첼의 현장감 가득한 연출이 만난 ‘여배우들의 티타임’은 그 어떤 영화보다 생동감 넘치는 다큐멘터리다.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기억과도 같은 이 다큐멘터리는 어쩌면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단 하나뿐인 인생 지침서가 될지도 모르겠다. sunset@mkcultur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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