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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사건’ 누명 쓴 시민들…석방 이후 목숨 끊고, 루머 시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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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경찰, 무분별 검거해 ‘의심’ 이유 용의자로 내몰아

강압수사로 증거 없이 자백받아…검찰선 ‘무혐의 처분’

범죄자 낙인에 사회생활 ‘고통’…“이제 마음의 짐 벗어”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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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연쇄살인사건은 애꿎은 시민을 범죄자로 몰았다. 이들은 강압수사를 받고 저지르지도 않은 일을 시인했다. 가까스로 석방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례도 있다. 이 사건의 또 다른 피해자들이다.

22일 경향신문이 입수한 화성 연쇄살인사건 사건기록 등을 종합하면 1980~1990년대 무분별한 경찰 수사는 수많은 시민을 연쇄살인범으로 만들었다. 1988년엔 화성 일대를 배회하고 여성을 두 차례 폭행했다는 이유만으로 검거하거나 4000여명의 지문과 혈액을 채취한 뒤 그중 한 명인 10대 남성을 용의자로 몰아세운 경우도 있었다. 수원 교회의 한 전도사는 교회를 지을 땅을 알아보기 위해 화성 일대를 돌아다니다 여성에게 길을 물어본 것이 화근이 돼 수사를 받았다. 그는 1990년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되기까지 3년 동안 누명을 견뎌야 했다. 그는 이후 경찰을 고소하면서 경찰이 5일 동안 잠을 안 재우고 때리거나 발가벗겨 수치심을 유발했다고 했다. 1990년에는 정신질환을 앓던 한 30대 남성이 화성사건 용의자로 경찰 조사를 받고 석방된 뒤 정신분열 증세가 악화해 열차에 투신했다.

변호사 조력으로 무죄를 인정받은 경우도 있었다. 김칠준 변호사는 1993년 화성 연쇄살인 4·5차 사건의 용의자로 몰린 ㄱ씨와 1990년 2·7차 사건 용의자인 ㄴ씨를 각각 변호했다. 두 사건 모두 증거는 없고 용의자들의 자백만이 있었다. ㄱ씨는 재미교포 김모씨가 꿈에서 계시를 받아 지목했다는 이유만으로 조사를 받았다. 서대문경찰서가 김씨의 제보를 그대로 믿고 강압 수사를 동원해 범행 자백을 받아냈다. 그러나 증거 불충분 등의 이유로 수원지검이 무혐의 처분해 ㄱ씨는 석방됐다. 이후 ㄱ씨는 1993년 서대문경찰서 형사 4명 등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해 승소했다.

하지만 한번 찍힌 범죄자 낙인은 지우기 힘들었고 사회 생활은 불가능했다. ㄱ씨는 1997년 극단적 선택을 했다. ㄱ씨 죽음 이후에도 유가족의 피해는 끝나지 않았다. 재미교포 김씨는 인터넷 카페 활동을 통해 ㄱ씨가 진범이고 죽음에 유가족이 연루됐다는 허위사실을 2010년까지 유포했다. 김 변호사는 “김씨를 2009년 사자명예훼손 등 혐의로 고소해 유죄 판결까지 받아냈지만 해외에 머물러 실제 형사처벌은 집행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ㄴ씨는 1990년 강간미수로 체포된 뒤 화성사건 용의자로 몰렸다. 강간미수 범행 중 목에 두르던 수건을 사용한 게 화성 범죄와 유사했기 때문이다. ㄴ씨도 2·7차 살인사건의 범죄를 시인했다. 김 변호사에 따르면 ㄴ씨의 진술은 구체성이 떨어지고 지나치게 반복적이었다. 살인을 저질렀다는 범행 일주일 전에 첫아들이 태어났는데 그 사실도 기억하지 못했다. 결국 ㄴ씨는 김 변호사와의 대화에서 “일주일 내내 경찰들이 사진첩을 보여주면서 반복적으로 주입시킨 내용을 자백했다”고 털어놓았다. ㄴ씨는 자신이 범한 강간미수 혐의만 인정돼 집행유예를 받았다. 당시 재판부는 화성 사건의 용의자로 몰려 피해를 당한 점을 참작했다. 22일 김 변호사는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추후 ㄴ씨를 화성 살인자로 지목한 목격자 진술이 나오면서 ‘그가 진범이 아니었을까’ 하는 우려가 29년 동안 나를 괴롭혔다”며 “이번에 또 다른 용의자의 DNA 일치 결과를 본 뒤에야 마음의 짐을 벗었다”고 말했다.

윤지원 기자 yjw@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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