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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조국과 '기생충'…영화는 어떻게 정치가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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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장관의 부인 정경심 교수가 영화 '기생충' 속 내용과 흡사한 수법으로 표창장을 위조한 것으로 검찰이 보고 있다는 소식이 전국을 뜨겁게 달구더니, 곧이어 최악의 장기 미제사건으로 남아있던 화성 연쇄 살인 사건의 용의자가 특정됐습니다. 영화 '살인의 추억'의 소재가 된 바로 그 사건입니다.

공교롭게도 '기생충'과 '살인의 추억'은 모두 봉준호 감독 작품입니다. 이 때문에 인터넷과 SNS에 '봉스트라다무스'라는 단어가 연일 쏟아집니다. 봉준호 감독과 전설적인 예언자 노스트라다무스를 합친 이름입니다.

"서울대 문서위조학과 뭐 이런 거 없나?"
"아버지, 전 이게 위조나 범죄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전 내년에 꼭 이 학교 학생 될 거거든요."

천만 넘는 관객들이 본 영화 '기생충' 속 대사들입니다. 현재 정경심 교수는 표창장 위조 혐의를 부인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재판의 결과는 좀 더 지켜봐야 합니다. 하지만 어쨌든, 저 짧은 대사 두 줄 속에 명문대, 문서, 위조, 범죄, 입학 등 그 동안 제기된 의혹의 핵심들이 모두 담겼다는 사실만으로도 우연 치고는 놀라운 일입니다.

봉 감독의 '예지력'이 화제가 되는 또 다른 축엔 '살인의 추억' 개봉 당시 봉 감독의 인터뷰가 있습니다. 지난 2003년, 개봉에 맞춰 관객들과 만나는 행사장에서 봉 감독은 "범인은 1971년 이전 출생자이고 과시적인 성격이기 때문에 이 자리에 와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영화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취재한 내용을 바탕으로 범인의 나이와 성격을 추정한 것은 물론 구체적인 행동에 대한 예측까지 내놓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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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실제 봉 감독이 두 영화를 통해 미래를 예언한 것일 리는 없습니다. 사실 '기생충'이나 '살인의 추억'이 아니더라도 '영화 같은 현실'은 그 동안도 많았습니다. 특히 한국 관객들에게 '영화 같은 범죄', '영화 같은 사건', '영화 같은 비리'는 유난히 익숙합니다. '내부자들', '베테랑', '변호인', '도가니' 등 굵직한 흥행작들만 나열해도 꽤 긴 목록이 나옵니다.

영화계에선 한국 관객들이 사회적 소재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를 유난히 좋아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다 보니 정치인이나 재벌, 권력층과 특권층의 부패와 비리를 폭로하는 범죄 스릴러물들이 해마다 여러 편 쏟아져 나옵니다. 드라마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생충'이나 '스카이캐슬'같은 작품들이 큰 인기를 끈 건 미래를 예언했기 때문이 아니라 현재를 실감나게 담아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영화가 현실의 반영이다 보니 굵직한 이슈들이 터질 때마다 영화는 자주 갈등과 대립, 분열과 반목의 최전선에 서게 됩니다. 시대와 사회의 산물이라는 특성상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지만, 자신의 이익을 위해 문화 콘텐트의 힘을 악용하는 정치인들의 계산 탓도 있습니다. 영화가 이른바 '정치공학'의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영화 '광해'를 제작한 CJ가 박근혜 정부에 '좌파 성향'으로 찍혀 심한 탄압을 받은 건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영화사 NEW는 '변호인'이 천만 영화로 크게 흥행한 뒤 영문도 모르게 들이닥친 국세청 세무조사에 쑥대밭이 됐습니다. '코드'를 기준으로 문화계 전반에 무자비한 칼을 휘두른 '블랙리스트'는 입맛에 맞지 않는 콘텐트를 차단해서 국민들의 생각과 여론까지 통제하려는 정치권의 행태가 얼마나 치밀하고 집요한지 여실히 보여줬습니다.

반대 경우도 있습니다. '좌파 영화'를 전방위로 탄압하던 박근혜 전 대통령은 2016년 직접 영화관을 찾아 '인천상륙작전'을 관람했습니다. 반대로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해 영화 '1987'을 직접 관람했습니다. 정치인의 영화 관람은 그 자체로 메시지이고 정치활동입니다. '코드'에 맞는 영화를 노골적으로 드러냄으로써 지지층 결집과 이미지 메이킹, 자신의 주장을 확산하는 도구로 활용하려는 데는 보수·진보의 구분이 없습니다.

얼마 전엔 당시 민정수석에서 물러난 직후였던 조국 장관이 SNS에 '주전장'이라는 영화의 관람 후기를 자세히 적었습니다. '주전장'은 위안부 문제를 부인하는 일본 극우세력들의 주장을 적나라하게 비판한 다큐멘터리 영화입니다. 발언의 적절성을 놓고 논란이 일긴 했지만 그 만큼 반향도 컸습니다. 조 장관의 이른바 '페북 항일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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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김무성 의원은 조국 장관을 비판하면서 "조국 스카이캐슬", "'기생충' 가족 드라마"로 지칭했습니다. 국민들의 공분을 일으켰던 영화와 드라마 속 상황들과 '기생충'이라는 단어의 이미지가 결합해 조 장관 측엔 꽤 아픈 공격이 됐을 듯합니다. 이런 '효율성'이야말로 정치인들이 끊임없이 영화를 '도구'로 활용하려는 이유입니다.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문화 콘텐트를 장악하려는 불법적인 시도는 근절돼야 마땅한 일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정치적 이상과 주장을 펼치기 위해 적절히 영화를 활용하는 전략마저 모두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영화계에 깊숙이 스며든 '정치공학'의 위력을 지켜보다 보면 우려스러운 부분이 없지 않습니다. 관객들마저 정치공학의 공식에 맞춰 영화를 재단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념 갈등이 첨예해지면서 수시로 벌어지는 '국뽕 영화', '좌빨 영화' 논란이 대표적입니다. 이런 상황은 관객들이 영화를 영화 자체로 받아들일 수 없게 만듭니다. 많은 이들이 순수한 열정으로 애써 만든 영화들이 부당한 공격과 편견 때문에 실패하는 안타까운 상황을 낳기도 합니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서 사회 갈등이 격화하고 대립과 반목이 심화한다는 것입니다. 피해자는 결국 관객, 국민들입니다.

최근 며칠 동안 뜨거운 이슈의 한 복판에서 영화 제목들이 잇달아 거론되는 걸 보면서 영화와 정치의 관계를 생각하다가 문득 미국 오바마 전 대통령이 떠올랐습니다. 지난 2015년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가 개봉했을 때 일입니다. 기자회견을 마친 오바마 전 대통령이 "저는 이제 스타워즈 보러 갑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회견장을 떠났습니다.

이보다 앞서 2012년엔 트위터에 이런 글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방금 어벤져스를 봤다. 재미있긴 했는데, 다음 편에서 '필'이 살아있는 게 확인되지 않으면 아마 내가 대통령의 권한을 부당하게 쓰게 될 거야." 좋아하는 영화 속 인물이 영화 속에서 사망한 데 대한 안타까움을 재치있게 표현한 것입니다.

오바마 전 대통령의 이 발언들은 당시 미국은 물론 전 세계 언론에 줄줄이 보도되며 큰 화제를 낳았습니다. 화려한 연설 솜씨 못지 않은 유머와 함께 서민적이고 소탈한 성격을 잘 드러내주는 발언이라는 호평이 쏟아졌습니다. 민주당 지지자든 공화당 지지자든, 스타워즈나 어벤져스 팬이든 아니든 누구나 공감할만한 평가입니다. 정치인 오바마에 대한 친근감과 호감도도 당연히 상승했을 것입니다.

사회와 현실의 반영인 영화가 정치공학적 계산으로부터 완벽하게 분리되길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같은 공학용 계산기라도 덧셈 공식을 입력하면 답이 커지고 뺄셈 공식을 입력하면 답이 작아집니다. 그러니 우리도 계산기를 두드리는 정치인들의 공식이 좀 더 세련돼 졌으면 좋겠습니다. 배타와 정쟁, 비난과 공격의 공식보다 포용과 협력, 칭찬과 응원의 공식을 쓰는 정치인들이 좀 더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정치도 살고, 영화도 살고, 우리 사회도 더 건강해지지 않을까요?

(사진=영화진흥위원회 홈페이지, CJ ENM 제공, 연합뉴스)
김영아 기자(youngah@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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