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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만9992명 끌려가 죽어갔는데… 고향 돌아온 유해 131위 [잊힌 자들의 머나먼 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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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끝나지 않은 훗카이도와 사할린 / ‘절망의 땅’ 홋카이도 / 태평양전쟁 당시 대표적 강제동원 지역 / 탄광산·비행장·도로·철도·제철소서 일해 / 다코베야라 불리는 감금숙소에 갇혀 지내 / 혹한·영양 부족에 사망 속출… 위령비 세워 / 일본의 ‘양심’ 싹트다 / 2003년 삿포로서 시민단체 활동 시작 / 목사·주지·민단·총련·화교 등 5인 대표 / 강제동원 父둔 채홍철씨 유해 발굴 주도 / 한국 교수와 연결 학생들과 동참 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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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류제1댐. 당시 나무틀을 짜서 콘크리트 공사를 하는 과정에서 많은 인명사고가 발생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에서도 유난히 많은 눈이 내리고 추운 지역으로 꼽히는 일본 최북단 홋카이도에는 일제강점기 당시 15만명 이상의 조선인이 강제동원됐던 것으로 추산된다.

한국 정부가 접수한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 중 일본 동원 피해자는 15만2195명으로, 이중 가장 많은 3만9992명이 홋카이도로 끌려갔다. 이 가운데 현지에서 사망한 사람은 1863명이다. 현재까지 고국으로 봉환된 유해는 131위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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홋카이도의 대표적인 강제동원 작업장으로는 탄광기선, 미쓰비시, 스미토모 등 대기업이 운영하는 탄광산과 비행장, 도로, 철도 등의 토목공사장, 제철소 등이 있다.

홋카이도에서도 오지로 꼽히는 우류군 호로카나이정 슈마리나이(朱鞠內) 마을에 위치한 우류댐은 강제동원이 이뤄진 대표적인 곳이다. 홋카이도에서 처음으로 강제동원 희생자 발굴이 시작된 상징적인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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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켄지에 안치돼 있던 조선인 등 강제동원 희생자를 기리기 위한 위패.


◆강제동원 희생자들의 주검을 안치했던 고켄지

태평양전쟁이 진행되던 1930년대 말∼1940년대 초 슈마리나이에선 목재 운반을 위한 메이우선 철도 공사와 수력발전 댐을 만드는 대규모 토목공사가 벌어졌다. 일본 각지와 조선·중국에서 끌려온 노동자들이 ‘다코베야’(문어방)라 불리는 감금 숙소에 갇혀 혹독한 노동에 시달렸다. 적설기에는 눈이 4m나 쌓이는 이곳에서 추위와 영양 부족 등으로 사망한 강제동원 희생자들의 행렬이 끝없이 이어졌다.

댐 부근에는 홋카이도전력이 건립한 ‘순직 위령비’가 세워져 있다. 댐 공사 당시 자재를 옮기기 위해 만든 철근 탑 중 하나를 활용해 만든 것이다. 기자가 찾기 10여일 전쯤 누군가 가져다 놓은 것으로 보이는 오래된 바나나 한 송이와 낡은 꽃다발 하나가 위령비 아래쪽에 놓여져 있었다.

일본 민주당 중의원을 지낸 고바야시 지요미(小林千代美) 동아시아시민네트워크 사무국장은 “순직이란 표현이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요?”라고 되물었다. 그는 “자발적으로 일하다 숨지는 게 순직인데 강제동원 현장에 전혀 맞지 않는 단어”라면서 “정작 여기서 누가 어떻게 사망했는지는 전혀 나와 있지 않고 우류전력주식회사 사장의 이름만 적혀 있다”라고 꼬집었다. 고바야시는 의원 시절에도 ‘전후 보상을 생각하는 의원 연맹’ 등의 활동을 통해 꾸준히 한·일 문제를 환기시켜 온 바 있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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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마리나이호에 위치한 우류댐 공사 순직자 위령비. (주)홋카이도 전력에서 건립했다.


슈마리나이댐 옆에는 ‘사사노보효(笹の墓標) 전시관’이 있다. ‘대나무 숲 속의 묘지 표지’란 뜻의 이 곳은 당초 ‘고켄지(光顯寺)’라는 절이었다. 강제동원 노동자들이 숨지면 장례를 치르기 전 이곳에 주검을 하룻밤 안치했다. 당시 희생자로 신원이 밝혀진 조선인은 48명이지만 실제 희생자는 이보다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인 노동자 168명도 숨졌다. 이들의 주검은 고켄지에서 하루를 보낸 뒤 대부분 인근 공동묘지 등에 묻혔다. 간단한 인적 사항이 적힌 나무 표지만이 세워졌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며 나무 표지는 썩어 사라졌다.

이곳의 유해 발굴을 기획하고 이끌어간 시민단체는 2003년 삿포로에서 출범한 ‘강제연행·강제노동 희생자를 생각하는 홋카이도 포럼’이다. 5명의 공동대표 중 한 명인 채홍철씨는 재일동포 2세다. 경북 출신인 그의 부친은 1940년 강제동원돼 규슈, 홋카이도의 탄광에서 노역을 했다. 광복 이후에도 홋카이도에 남아 강제동원 증언과 유해 발굴 활동 등에 힘을 쏟다가 세상을 떠났다. 채씨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가 하시는 유해 발굴 활동 등을 옆에서 보고 배웠고 어느새 내가 이어받게 됐다”면서 “처음에도 정치 문제가 아니냐며 참여해 소극적이던 사람들도 순수 민간의 힘으로 이뤄지는 우리 활동을 보고 뜻을 함께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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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씨는 2005년 사전답사를 위해 포럼 관계자들과 함께 이곳 공동묘지를 찾았다. 묘지는 어느새 울창한 대나무 숲으로 변해있었고, 발굴 작업에도 상당한 난관이 예상됐다. 그러던 중 갑자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천막으로 급히 피하던 그의 발 하나가 갑자기 무릎까지 땅속에 푹 빠졌다. 그곳을 중심으로 땅을 팠더니 한 시간도 채 안돼 유골 2구가 나왔다. 이는 이듬해 본격적 발굴 작업으로 이어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채씨는 “내 다리 길이가 짧아 땅에 깊숙이 빠진 덕분에 유해를 찾을 수 있었기망정이지 큰일 날 뻔했다”고 웃으며 당시 상황을 회상했다.

발굴 작업에는 일본뿐 아니라 한국의 청년들도 대거 참여해 힘을 보탰다. 한양대 정병호 교수와 홋카이도 유해발굴·봉환 운동을 이끌어온 도노히라 요시히코(殿平善彦) 동아시아시민네트워크 대표의 우연한 만남이 계기가 됐다. 정 교수가 과거 연구 차원에서 도노히라 대표를 찾았다가 유해 발굴 운동 얘길 듣게 됐고, 이후 한국 학생들과 함께 홋카이도를 다시 찾아 발굴 운동에 힘을 더한 것이다.

사사노보효 전시관은 슈마리나이 강제동원 희생자와 관련된 다양한 자료들이 전시돼 있다. 1997년부터 매년 한국과 일본 등 동아시아 청년들이 모여서 함께 평화를 토론하는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한 공동 워크숍’을 열고 숙박하는 장소로도 사용돼 오고 있다. 홋카이도의 유해 발굴·봉환 운동의 대표하는 곳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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홋카이도 중북부 슈마리나이 우류댐 인근에 있는 사사노보효 전시관. 강제노동 희생자 유해가 임시로 모셔졌던 절 고켄지(光顯寺)를 전시관으로 바꿨다. 올해 초 폭설로 심하게 망가져 출입이 금지된 상태다.


◆사사노보효 전시관, 폭설로 붕괴 위기 놓여

하지만 올해 초 이 지역에 폭설이 내리면서 최근 사사노보효 전시관은 문을 닫은 상태다. 이미 오래된 건물이 눈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크게 기울어진 것이다. 붕괴 위험으로 인해 사람의 출입을 막고, 이곳에서 보관하던 유해와 위패들은 바로 옆 임시 건물에 옮겨놓은 상태다.

도노히라 대표는 “처음에는 재건이 어렵지 않을까 했는데 활동가들이 모여 회의를 한 끝에 건물을 다시 짓자는 결론을 내렸다”며 “아시아의 청년들이 이곳에 모여서 많은 얘기를 나누고 시민들의 노력이 깃들어 있는 상징적인 곳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과거 한국에서 온 자원봉사 학생이 사사노보효 전시관 지붕에 올라가 쌓인 눈을 치우다가 낙상 사고를 당한 일도 있었다. 당시 일본 보험도 없는 상태여서 많은 치료비가 나왔는데, 일본 시민 성금을 통해 치료를 무사히 받았고, 성금이 남아 동아시아네트워크 설립자금이 된 에피소드도 있다. 고바야시 사무국장은 “한국과 일본 양국에서 성금을 받아 전시관 재건 자금을 마련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며 “많은 한국 시민들의 관심을 부탁한다”고 말했다.

홋카이도=장혜진 기자 janghj@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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