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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주 사고자 "술 끊었다" 영상에… 판사·검사·변호사, 채팅방서 격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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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부의 '색다른 保釋 실험']

- 형벌보다 교화 목적 '치유 사법'

가족 생계 참작, 보석 석방하며 10시 前 귀가·3개월 금주 명령

- 단체 채팅방서 '보석 점검 회의'

매일 올라오는 동영상 다짐 체크… "술 끊을 수 있겠네" 응원 댓글

조선일보
이명박 전 대통령의 항소심 등을 맡고 있는 서울고법 형사1부 정준영 부장판사는 요즘 틈만 나면 스마트폰으로 자신이 만든 한 포털 사이트의 비공개 카페에 들어간다. '치유'를 뜻하는 'TREATMENT 004'라는 이름의 카페에는 그를 비롯해 형사1부 판사들과 검사, 변호사들이 회원으로 가입돼 있다. 그리고 음주운전 교통사고를 내고 1심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은 A(34)씨가 있다.

정 부장판사는 지난달 A씨 항소심에서 이례적으로 그를 보석(保釋) 석방했다. 보증금은 받지 않았다. 대신 매일 밤 10시 이전에 귀가하고, 3개월간 금주를 하라는 명령을 부과했다. 이를 감시하기 위해 A씨만을 위한 비공개 카페를 만들었고, 매일 밤 10시 이전 맨정신에 집에 있는 동영상을 직접 찍어 올리도록 했다. A씨가 깊이 반성하고 있고, 1년간 구속될 경우 어린 두 자녀가 있는 그의 가족 생계가 어려워진다는 점을 참작해 그를 '치유 사법'의 시범 케이스로 적용해 보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정 부장판사는 법원에서 치유 사법을 시도하고 있는 거의 유일한 판사다. 치유 사법은 형벌에 초점을 맞춘 단순 형사 재판이 아니라 재범률을 낮추고 교화에 목적을 둬 사회 구성원으로서 다시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사법부가 도와준다는 개념이다. 최근에도 정 부장판사는 상습 음주 난동범에게 2년간 술집 출입 금지를 조건으로 집행유예를 선고하거나, 아내를 살인한 것도 인지하지 못하는 60대 치매 살인범을 치매 병원으로 주거지를 제한해 보석 석방하기도 했다.

지난달 23일부터 현재까지 A씨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매일 자신의 저녁 일상을 담은 동영상과 글을 올리고 있다. 시계 화면을 비추면서 시작하는 동영상에는 A씨가 아내와 함께 저녁 식사하는 모습, 어린 두 자녀와 함께 놀이를 하는 모습 등이 담겨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몇 시에 퇴근했고 몇 시에 취침할 예정이라는 등 그날의 간단한 일과와 금주 다짐을 담은 일기도 매일 올린다고 한다. 정 부장판사와 A씨를 기소한 검사, A씨의 변호인 등은 매번 "수고하셨다" "아이들이 아빠랑 노니 행복해 보인다" "이렇게 금주하면 완전히 술을 끊을 수 있겠다"는 등의 격려와 응원 댓글을 달고 있다.

정 부장판사는 매주 한 차례 카페 채팅방에서 보석 조건 준수 점검 회의도 열고 있다. 실시간 채팅을 통해 A씨의 금주 의지와 상황을 체크하는 것이다. A씨와 검사, 변호인 등이 정 부장판사가 특정한 시간에 카페에 접속해 채팅을 한다. 정 부장판사는 "이렇게 단체 채팅방에서 보석 점검 회의를 하는 것은 아마 처음일 것"이라고 했다.

오는 27일에는 직접 A씨를 법정에 불러 '금주 점검 공판'도 열 예정이다. 온라인 점검에서 놓친 것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이런 식으로 3개월간 A씨가 금주 동영상을 매일 올리는 데 성공할 경우 정 부장판사는 형 선고에 이를 참작하게 된다. 그는 "A씨의 경우 중독성이 강한 음주 범죄라는 특성상 이를 또 저지르지 않도록 금주 습관을 체화할 수 있게 법원이 약간의 강제성을 부여하고 동기 부여를 해주는 것"이라며 "이 실험이 성공하면 비슷한 다른 사건에도 치유 사법 적용을 확대할 계획"이라고 했다.

[박국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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