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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9 (화)

호수 잘못 보고 남의 택배 챙겼다가… 전과자 될 뻔한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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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집에 온 택배상자 들고 갔다가 절도죄 입건 / "당연히 우리 집에 온 줄 알았는데… 억울합니다" / 재판관들, "충분히 헷갈릴 법해"… 기소유예 취소

지난해 10월24일 오후. A씨에게 이날은 지금도 ‘악몽’으로 기억된다. “택배물 도착한 것이 있으니 찾아서 집에 가져다 놓아요.” 퇴근길 아내한테 받은 전화 한 통이 시작이었다.

A씨가 그의 아파트 택배보관장소에 도착한 시각은 정확히 오후 5시56분이었다. 바닥에 있던 택배상자 하나를 집어든 그는 바로 옆에 있던 택배상자도 함께 들고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엘리베이터에 올라 17층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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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우리 집에 온 줄 알았는데… 억울합니다"

정확히 보름이 지난 그해 11월8일 A씨는 경찰에서 연락을 받았다. 절도 혐의 용의자로 신고가 들어왔으니 일단 출석해 조사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경찰관한테 사건 개요를 전해 들은 A씨는 그제서야 그날 택배상자 두 개를 챙긴 것이 떠올랐다.

A씨는 일단 부인한테 전화해 문제의 택배상자와 내용물을 경찰에 제출하라고 했다. 내용물은 시가 4만원 상당의 귀걸이였다.

아내가 “남편이 우리 집으로 온 것인 줄 알고 잘못 들고 왔다”고 설명했으나 담당 경찰관은 믿지 못하겠다는 태도였다. 결국 A씨가 경찰에 직접 출석해 조사실 의자에 앉았다. 경찰은 A씨가 귀걸이가 든 택배상자를 집어 드는 장면이 찍힌 폐쇄회로(CC)TV 영상을 증거물로 제시했다.

“영상을 보면 피의자(A씨)가 택배상자 두 개를 번갈아가면서 집의 호수를 확인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어떻게 생각하나요?”(경찰)

“네, 그렇게 보여집니다. 그런데 제가 택배상자를 확인했는데도 그냥 들고 간 것은 1703호인 저희 집에 온 택배상자로 착각하고 들고 간 겁니다.”(A씨)

A씨가 ‘훔쳤다’는 의심을 받는 택배상자는 실은 같은 동 703호 앞으로 배달된 것이었다. A씨는 “우리 집 호수 1703호와 택배상자에 적힌 703호를 헷갈렸다”고 거듭 주장하며 결백을 호소했으나 경찰은 그를 절도 혐의로 입건한 뒤 검찰에 송치했다. 사건을 넘겨받은 검찰은 ‘혐의는 인정되나 여러 사정상 법원 재판에 넘기지는 않는다’는 취지의 기소유예 처분을 A씨한테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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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관들, "충분히 헷갈릴 법해"… 기소유예 취소

비록 법정에 서는 최악의 상황은 피했으나 ‘절도 혐의가 인정된다’는 수사기관 판정이 A씨는 몹시 억울했다. 각종 공문서에 기록으로 남아 앞으로 무슨 일을 하든 불이익을 받게 될 가능성이 컸다.

결국 A씨는 부장검사 출신으로 각종 형사사건에서 무혐의 판정을 이끌어낸 경험이 풍부한 중견 변호사의 조력을 얻어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냈다. “검찰의 기소유예 처분은 부당하니 이를 취소해달라”는 내용이었다.

고의로든 실수로든 남의 물건에 손을 댔다가 형사사건으로 비화한 사례는 무척 많다. 이런 일로 기소유예 처분을 받은 사람들이 “억울하다”며 낸 헌법소원 청구서가 헌재 창고에 가득 쌓여 많다. 이번에도 헌법재판관들은 A씨가 정말 고의는 없었는지, 단순 실수인 건지 등을 확인하기 위해 사건 기록을 꼼꼼히 살펴봤다.

일단 택배상자에 적힌 숫자 ‘1703’과 ‘703’은 재판관들이 봐도 충분히 헷갈릴 법했다. CCTV 영상을 보면 A씨는 1703호 자기네 집 앞으로 온 택배상자를 집은지 불과 3초 만에 703호로 배달된 택배상자를 집어 들었다. B재판관이 “그 짧은 시간에 남의 택배상자를 절취하기 위해 물색했다고 단정하긴 어렵다”고 말하자 다른 재판관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의 택배상자엔 그 내용물(귀걸이)이 적혀 있지도 않았다. A씨는 택배보관장소와 엘리베이터에 CCTV가 설치돼 허튼 짓을 하면 기록이 남는다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결국 헌재는 A씨의 헌법소원을 받아들여 검찰이 그에게 내린 기소유예 처분을 취소했다. 대신 ‘무혐의’ 처분으로 하라는 취지다. 재판관들은 결정문에서 “현재까지 수사된 내용만으로는 A씨한테 절도 범죄의 의사가 있었다고 인정할 증거가 부족하다”며 “그럼에도 검찰이 A씨에게 기소유예 처분을 한 건 증거 판단에 있어 중대한 잘못이 있었다”고 판시했다.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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