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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9월, 두 작전이 한반도 운명을 바꿨다 [박수찬의 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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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5일. 디데이(D-day)라는 암호명으로 유명한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더불어 세계 역사에서 가장 성공적인 상륙작전으로 평가받는 인천상륙작전이 벌어진 날이다.

인천상륙작전은 6.25 전쟁의 정세를 결정적으로 뒤바꾼 작전이다. 하지만 이 작전이 성공하기까지는 보이지 않는 희생이 뒤따랐다. 특히 인천상륙작전 직전 경북 영덕군 장사리 해안에서 벌어진 장사상륙작전은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위해 제대로 훈련을 받지 못한 학도병들이 전투에 나섰다.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도 이들에게 경의를 표할만큼 의미있는 작전이었지만, 장사상륙작전은 6.25 전쟁 당시에도 정전협정 직후에도 인정받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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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9월 15일 연합군 상륙정들이 인천으로 접근하고 있다. 인천시 제공


◆6.25 전쟁 판도 바꾼 인천상륙작전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T-34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은 기습 남침을 감행, 개전 41일만에 부산과 진해 등 낙동강 이남을 제외한 남한 전역이 함락됐다. 낙동강 전선을 사수하지 못한다면 대한민국은 역사에서 사라질 위기였다.

풍전등화의 위기 속에서도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의 시선은 한국의 서해, 수도 서울의 관문격이던 인천에 고정되어 있었다. 전쟁이 시작되고 며칠 뒤 맥아더 사령관은 비행기를 타고 서울 남쪽에 도착해 직접 전황을 확인한 뒤 국군이 북한군을 막아내지 못할 것이란 결론을 내렸다. 이에 따라 남쪽에서 방어를 준비하면서 병력을 모아 인천에 상륙하는 방식으로 반격을 하는 방안을 구상했다.

이같은 전략은 태평양전쟁의 교훈에서 비롯됐다. 맥아더 사령관은 일본군의 방어태세가 잘 갖춰진 섬은 우회한 뒤 일본군이 예상치 못한 곳을 공격해 적을 고립하는 섬 건너뛰기(Island Hopping) 전략으로 큰 효과를 거뒀다. 맥아더 사령관은 6.25 전쟁에서도 북한군이 몰려있는 최전방을 피해 인천에 주력부대를 집중, 적의 병참선을 차단하는 방법을 적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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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9월 15일 인천 월미도의 북한군 진지가 연합군의 포격으로 불타고 있다. 미 해군 제공


하지만 미 합참은 인천상륙작전을 강하게 반대했다. 950년 8월 일본 도쿄의 극동군사령부에서 열린 고위급 회의에서는 군 수뇌부와 맥아더 사령관의 일부 참모들도 의문을 제기했다. 병력과 전차, 트럭 등을 실은 상륙함(LST)이 해안에 닿으려면 수심이 8m 이상이어야 하지만 인천은 수심이 8m를 넘는 경우가 한 달에 며칠밖에 되지 않았다. 밀물이 들어와서 썰물이 되기까지의 시간은 3시간. 먼저 상륙한 부대는 상륙 중 썰물을 만나면 12시간 동안 고립될 수밖에 없다. 높은 방파제와 함께 부산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상륙부대와 낙동강 전선의 미 8군이 제대로 연계될 수 있는지도 미지수였다.

하지만 맥아더 사령관은 인천의 지형적 악조건이 오히려 유리하게 작용할 것으로 판단했다. 맥아더 사령관은 회고록에서 “적이 예상하지 못한 기습은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주도권을 빼앗아야 한다. 그것이 유일한 희망이다”라며 인천상륙작전 결정의 배경을 설명했다.

맥아더 사령관의 강력한 카리스마와 확신을 압도할 방법이 없었던 미 합참은 작전을 승인했다. ‘크로마이트 작전’으로 명명된 인천상륙작전의 공격 날짜는 9월 15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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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이 끝난 직후 미 해군 상륙정들이 인천항에 물자와 장비를 하역하고 있다. 미 해군 제공


공격을 이틀 앞둔 13일, 인천 앞바다는 7개국 소속 군함 수백 척으로 가득했다. 한미 육군과 해병대로 구성된 제10군단 병력 7만4000여명과 2만5000t의 물자, 6600대의 차량, 261척의 함정이 투입됐다. 해군 함정과 항공기들은 작전 개시 48시간 전부터 폭격을 감행, 북한군을 제압했다.

15일 새벽. 인천항 입구에 있는 월미도를 향한 상륙이 시작됐다. 미군은 상륙 30분만에 월미도를 피해 없이 점령했다. 다음 밀물이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미 해군 콜세어 전투기는 인천 시가지를 폭격했다. 어둠이 내리고 밀물이 시작되자 연합군 상륙정들이 인천항으로 진격했다. 작전 개시 24시간만에 연합군은 인천을 탈환했고, 연합군 전사자는 20명에 불과했다. 북한군도 연합군의 상륙작전을 눈치채고 있었지만, 인천은 지형적 악조건으로 상륙 가능성이 낮다고 판단하고 방어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

인천을 장악한 연합군은 서울과 수원으로 진격했고, 낙동강 전선에서도 연합군이 반격을 시작했다. 북한군은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했고, 27일 서울 중앙청에 태극기가 게양됐다. 북한군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위기를 넘겼지만 1953년 7월 휴전 시점까지 독자적인 작전 능력을 회복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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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당시 자원입대한 학도병들이 전선으로 이동하고 있다. 국가보훈처 제공


◆인천상륙작전 성공 뒷받침했는데…잊혀진 그들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결정적 계기를 만든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위해 다양한 위장작전이 이뤄졌다. 하지만 인천상륙작전 하루 전인 9월 14일 경북 영덕군 장사리 해변에서 북한군 후방을 교란하기 위해 실시된 장사상륙작전(작전명 174)은 최근까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장사상륙작전은 인천에 쏠릴 수 있는 북한군의 주의를 돌리면서 당시 포항과 경주 등을 공격하던 북한군 2군단의 후방 병참선을 차단하기 위해 실시됐다. 이를 위해 10대 학도의용군 772명이 투입됐다. 이들은 북한군 후방에 침투하는 유격대 역할을 하기 위해 대구, 밀양 등에서 모집됐으며, 대부분은 18~19세였으나 15세 학생도 있을 정도로 어린 나이였다. 북한군 무기를 사용했으며 훈련도 교량 폭파 등을 위주로 이뤄졌으나 그나마도 2주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육군본부는 이들은 장사상륙작전에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부대장 이명흠 대위는 “제대로 훈련받지 못한 유격대원들이 전원 희생될 수 있다”며 반대했으나, 육군본부는 “동원가능한 병력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수락하지 않았다. 결국 육군본부는 9월 10일 작전명령 제174호를 발령, 장사상륙작전 개시를 지시했다. 육군본부는 해군 상륙함(LST) 문산호와 통신병 12명, 유엔군 공군과의 연락을 담당할 연락장교 1명, 군사고문 등을 추가 배속해 841명 규모로 부대를 재편했다.

일반적으로 상륙작전은 기습이 핵심이다. 따라서 출정도 은밀하게 진행된다. 하지만 장사상륙작전에서는 이같은 원칙이 통하지 않았다. 부산 육군본부 연병장에서는 육해공군 총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 정일권 소장을 비롯한 군 수뇌부가 총출동한 가운데 성대한 출정식이 열렸다. 이들은 부산항으로 이동하는 동안 시민들로부터 열렬한 환송을 받았다. 탑승과정에서도 미군 장병들이 수차례 탑승과 하선을 반복했으며, 이 과정에서 보안조치는 없었다. 장사상륙작전이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을 위장하려는 의도가 잘 드러나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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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9월 15일 경북 영덕군 장사리 앞바다에 좌초한 문산호. 해군 제공


이같은 사정을 모르는 유격대원들은 문산호를 타고 14일 오전 2시 30분 장사리 해안에 도착했다. 이들은 소련제 장총, 북한군 군복, 탄약, 식량인 미숫가루 몇 봉지 등만 갖고 있었다. 문산호는 장사리 해안 50m까지 접근했으나 태풍의 영향으로 목표 지점에 배를 댈 수 없었다. 그러나 이날 오전 4시쯤 상륙 명령이 떨어졌다.

부대장의 총성을 시작으로 학도병들은 바닷물에 뛰어들어 해안에 있던 북한군의 화력을 뚫고 상륙을 감행했다. 그러나 선두에 섰던 대원 수십 명이 적의 총에 맞아 숨지고 파도에 밀려 바닷속으로 사라졌다. 미국 구축함의 함포사격 지원으로 적의 공세가 주춤하자 먼저 상륙한 대원들이 배와 해안가 소나무를 밧줄로 연결해 날이 밝을 무렵 유격대원들은 육지를 밟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문산호는 함미가 파괴되고 닻이 끊어지면서 좌초했다.

학도병들은 치열한 전투 끝에 해변을 점령하고 상륙 12시간 만에 반경 10㎞ 내 북한군을 소탕, 포항으로 통하는 7번 국도를 장악했다. 대규모 부대가 상륙한 것으로 판단한 북한군은 포항 일대 병력 일부를 장사리에 투입, T-34 전차를 앞세워 반격에 나섰다. 유격대원들은 문산호가 좌초하면서 탄약을 추가로 가져오지 못한데다 통신마저 두절돼 악전고투를 치렀다.

동해상에서 활동하던 미 해군 함정들이 함포사격으로 지원을 하고 한국 해군 LST 조치원호가 장사리 해변에 도착해 구조에 나섰다. 하지만 북한군의 공격으로 조치원호 일부가 파손되고 부상자와 사망자가 속출하자 해변에 30여명의 학도병을 남겨둔 채 철수했다. 이들은 북한군의 포로가 되어 북으로 끌려갔으며, 일부만이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했다.

장사상륙작전 과정에서 139명이 전사하고 92명이 부상하는 큰 희생을 치렀지만 육군본부는 그들을 외면했다.

6.25 전쟁 전사(戰史) 자료들에 따르면, 부대장 이명흠 대위가 대원들과 함께 부산에 돌아와 귀환보고를 하기 위해 육군본부에 출두했을 때, 육군본부 관계자들은 생환 사실에 놀라고 당혹스러워했다고 한다. 유격대원 구조는 한미 해군이 주도했으며, 당초 작전계획에 포함됐던 유엔군 공군의 공중지원은 없었다. 부산에 돌아온 유격대원들의 사후 관리도 이뤄지지 않았다. 장사리 해안에 좌초된 문산호도 휴전 이후 상당 기간 방치됐다. 유격대원들은 부산항에서 대기하던 도중 우연히 읽은 신문을 통해 장사상륙작전이 인천상륙작전을 위한 양동작전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장사상륙작전은 휴전 이후에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채 잊혀졌다가 생존 대원들의 증언 등을 통해 재조명되면서 기념사업이 진행되고 영화로도 제작되는 등 관심을 받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인천상륙작전에 가려진 부분이 많다. 맥아더 원수도 잊지 않았던 장사상륙작전의 의미를 되새기고, 나라를 지키기 위해 헌신한 유격대원들을 기려야 할 이유다.

박수찬 기자 psc@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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