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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형과 미야기의 ‘존경’… 日, 존중하면 존중받는다[광화문에서/이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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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이헌재 스포츠부 차장

여자 스피드스케이팅 500m에서 혼신의 역주를 끝낸 ‘빙속여제’ 이상화(30)는 결승선을 통과한 뒤 참았던 눈물을 쏟았다. 37초33의 기록으로 만들어낸 값진 은메달이었다. 아쉬움과 후련함, 그간 힘들게 운동한 기억 등이 버무려진 투명한 눈물이 은빛 빙판 위로 떨어졌다.

연습 트랙을 한 바퀴 돌며 눈물을 쏟은 그를 기다리는 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앞 조에서 레이스를 한 금메달리스트 고다이라 나오(33·일본)였다. 고다이라는 이상화를 향해 양팔을 벌렸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둘은 서로를 끌어안았다. 이상화는 태극기를, 고다이라는 일장기를 몸에 두른 채 서로를 격려하며 트랙을 돌았다.

2018년 2월에 평창 겨울올림픽에서 나온 최고의 명장면이었다. 경쟁은 치열했다. 하지만 결과를 떠나 두 선수는 서로를 존중할 줄 알았다. 2014년 소치 겨울올림픽에서 이상화가 금메달을 딸 때 5위를 차지했던 고다이라는 이상화에게 “나는 아직도 당신을 존경한다”고 말했다. 이상화는 “이렇게까지 해낸 당신이 대단하다”고 화답했다.

최근 부산 기장군에서 열린 제29회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에서 열린 한일전 역시 근래 보기 드문 명승부였다. 일본이 달아나면, 한국이 쫓아갔다. 한국은 틈만 나면 일본을 몰아쳤고, 일본 선수들은 연이은 호수비로 한국의 예봉을 막아냈다. 승부는 연장 10회말 한국의 5-4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결과보다 더 인상적인 장면은 2-2 동점이던 9회말 한국의 공격에서 나왔다. 2사 1루에서 일본 투수 미야기 히로야가 던진 공이 한국 1번 타자 이주형(경남고)의 머리 쪽으로 날아들었다. 깜짝 놀란 이주형이 몸을 뒤로 뺐지만 공은 그의 헬멧을 스치고 지나갔다. 팽팽한 승부였고, 모든 선수의 신경이 곤두서 있던 상황이었다. 눈앞의 승부가 더 중요해 보였다. 하지만 미야기는 다음 타자 김지찬을 상대하기 전 1루 쪽을 향하더니 모자를 벗고 고개를 숙였다. 빈볼에 대한 사과의 의미였다. 이주형은 두 손으로 헬멧을 벗고 인사하며 괜찮다는 사인을 보냈다. 대회를 주관한 세계야구소프트볼협회는 이 동영상을 트위터에 올려놓으며 ‘RESPECT(존경)’라는 해시태그를 달았다.

연장 10회말 한국의 끝내기 안타로 승부가 난 뒤 한국 선수들은 환호했고, 일본 선수들은 그라운드에 주저앉아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곧바로 양 팀 선수들은 도열한 뒤 악수를 나누며 서로를 격려했다. 스무 살도 안 된 야구 소년들이 보여준 성숙한 모습이었다.

최근 한일 관계는 여러모로 좋지 않다. 정치뿐 아니라 스포츠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다. 일본 정부와 일본올림픽위원회는 2020 도쿄 올림픽에 전범을 상징하는 욱일기 사용과 일본 지도 내 독도 포함 등으로 한국의 정서를 자극하고 있다. 야구로 비유하자면 연달아 몸쪽 ‘위협구’를 던지고 있다.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은 쉴 새 없이 전쟁을 벌였다. 하지만 올림픽 경기가 열리는 기간 동안에는 전쟁을 멈추고 평화와 친선을 도모했다. 상대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바로 올림픽 정신이다. 최악의 한일 관계 속에서 열리는 도쿄 올림픽이 과연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는 앞선 두 장면이 해답을 보여주고 있지 않을까.

이헌재 스포츠부 차장 un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