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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경덕 칼럼] 한국 경제, 긴 겨울이 오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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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겨울이 오고 있다.'

느닷없이 조지 R R 마틴의 판타지 '왕좌의 게임'에 나오는 말을 떠올리는 건 왜인가. 폭염의 기억이 채 가시지도 않은 지금.

소설 속 겨울은 몇 년간 계속될 수 있다. 한 세대 내내 이어질 수도 있다. 세상이 얼어붙으면 장벽 너머에서 밀려올 백귀들과 전쟁을 해야 한다. 그래서 스타크 가문은 늘 '겨울이 오고 있다'며 경계했다.

한국 경제에도 긴 겨울이 오고 있는지 모른다. 끝을 가늠할 수 없어서 더욱 무서운 겨울이다. 이미 슬쩍 모습을 내비친 디플레이션은 백귀처럼 두려운 존재다.

디플레이션은 왜 무서운가. 물가가 지속적으로 떨어지면 사람들은 소비를 미룬다. 실질이자(명목이자-인플레이션)가 높아질수록 오늘 소비하기보다 내일을 위해 저축하려는 이들이 늘어난다. 기업은 투자를 꺼린다. 쥐꼬리만 한 (명목)이자에도 빚을 주려는 이는 넘치지만 빚을 얻으려는 이는 찾기 힘들다. 남아도는 돈은 생산에 쓰이지 못하고 소득을 안겨주지도 못한다. 예상보다 낮은 인플레이션은 빚의 실질적인 무게를 늘린다. 과중한 빚과 디플레이션이 겹치면 죽음의 칵테일이 된다. 레버리지 효과를 노리고 한껏 빚을 늘렸던 이들이 더 버티지 못하면 자산시장도 무너진다. 소득은 줄고 자산 가격은 떨어지고 실질부채는 무거워지는 상황이 바로 1930년대 어빙 피셔가 말한 '부채 디플레이션'이다.

이런 때는 통화정책도 함정에 빠진다. 인플레이션이 3%일 때는 제로금리로 실질이자를 -3%까지 끌어내릴 수 있다. 인플레이션이 사라지면 실질이자를 낮춰 소비와 투자를 유인할 수 없다. 노동시장은 더 경직된다. 명목임금을 깎기 어려운 기업은 고용을 줄인다. 디플레이션은 통화전쟁을 부른다. 너도나도 자국 통화가치를 떨어뜨리며 이웃 나라 벗겨먹기(beggar-thy-neighbor)에 혈안이 된다.

물론 아직 한국 경제가 이런 함정에 빠진 건 아니다. 지금은 물가상승률이 낮아지는 디스인플레이션 단계다. 생산성 향상과 에너지 가격 하락 같은 공급부문의 '착한 디플레이션' 요인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결코 '하쿠나 마타타(근심 걱정 떨쳐 버려)'란 주문을 되뇔 때가 아니다. 부채 디플레이션은 판타지 속 백귀로만 치부할 수 없다.

우리 국민의 작년 말 금융자산은 모두 1경5919조원이다. 금융부채는 1경5457조원이다. '누군가의 부채는 다른 누군가의 자산이므로, 빚을 진 쪽의 손실은 빚을 준 쪽의 이득이므로 디플레이션이 와도 경제 전체로는 제로섬'이라는 건 틀린 생각이다. 자산 거품이 꺼지면 양쪽 빚쟁이가 한꺼번에 망할 수 있다. 디플레이션을 견딜 수 있는 기초체력은 어떤가. 금리 인하라는 스테로이드제를 너무 오래 맞아서 경제의 뼈대는 약해졌다. 2000년대 초만 해도 5%를 웃돌았던 잠재성장률은 2% 중반으로 반 토막 났다. 우리는 환란과 글로벌 금융위기 때 혹독하지만 짧은 겨울을 겪었다. 당시 원화가치가 급락하면서 날개를 단 수출이 V자 반등을 이끌었다. 하지만 지금은 글로벌 경제의 거인들 모두 제 코가 석 자다. 그만큼 통화 절하는 용인되기 어렵다.

정부의 해법은 재정 살포뿐이다. 민간이 소비도, 투자도 하지 않고 저축만 늘리면 부족한 수요를 정부가 메울 수밖에 없다. 민간이 돈을 빌리지 않으면 정부라도 빌려 써야 한다. 물론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는 안 된다. 성장잠재력을 높이고 미래세대를 키울 연구개발과 교육혁명, 혁신적 기반시설에 투자해야 한다. 하지만 디플레이션에 맞서는 데는 이것만으로는 어림없다.

한국 경제에는 인플레이션이라는 뜨거운 여름과 덥지도 춥지도 않은 골디락스의 가을만 있었다. 디플레이션이라는 백귀가 덮쳐올 긴 겨울은 한 번도 없었다. 대통령도 경제사령탑도 '겨울이 오고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은 모두가 움츠리고만 있다. 이게 위기가 아니면 무엇이 위기인가.

[장경덕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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