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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답없는 日전범기업 제재법, 왜 또 나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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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연금, 미쓰비시 계열사 등 75곳에 1조2300억원…사실 알려지자 비난 쏟아져



경향신문

2013년 12월 홍콩의 반일 시위에서 일본 욱일기 위에 제2차 세계대전 전범 도조 히데키와 아베 신조 현 일본 총리의 사진을 붙인 뒤 신발로 누르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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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재팬(NO JAPAN)’이 정치권으로 넘어왔다. 타깃은 일본 전범기업이다. 국회에서는 일본 전범기업에 대한 한국 정부(국민연금공단·한국투자공사)의 투자 제한과 공공사업 입찰·수의계약을 금지하는 전범기업 제재법안이 쏟아진다.

전범기업 관련 법안은 일본의 수출규제에 대한 정치권의 대응책이다. 일본 전범기업으로 흐르는 정부·공공기관의 자금을 법으로 막겠다는 취지다. 최근 경색된 한·일관계 속에 이들이 내민 카드는 ‘사이다’처럼 느껴진다.

법안의 취지와 뜻에는 국회와 정부 부처, 여론 간 이견이 없지만 전범기업에 대한 제재를 현실에서 가동하려면 넘어야 할 장애물과 해결해야 할 과제가 적지 않다. 당장 발의된 전범기업 관련 법안 통과부터 요원하다. 보건복지부와 국민연금은 과거 투자에 대한 기금운용본부의 독립성·자율성 훼손과 수익성 저해를 이유로 전범기업 투자 제한 방침에 난색을 표한다.

투자 제한은 두 나라 간 또 다른 경제분쟁의 불씨가 된다. 국내법을 근거로 국민연금 전범기업 투자를 제한할 경우 일본 역시 공적연금(GPIF)의 한국 증시 투자 배제라는 맞불 카드를 들고 나올 가능성이 크다.

전범기업 입찰 배제도 한국과 일본이 함께 가입한 세계무역기구(WTO)의 정부조달협정 위반 소지가 있다. 법안을 강행할 경우 조달협정 위반으로 제소될 수 있다. 일본 수출규제 이전에 발의된 전범기업 제재 법안들이 모두 폐기되거나 계류 중인 이유다. 이런 상황에서 국회와 지방의회에서는 또다시 이전 법안과 비슷한 내용의 법안·조례를 내놓고 있다. ‘일본 대응책’ 명분으로 나온 전범기업 때리기 법안을 두고 반일감정에 편승한 실효성 없는 ‘선거용’ 대책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국민 정서에 안 맞다” 제재 법안 봇물

전범기업 제재의 중심에 있는 기관은 국민연금이다. 지난해 국민연금은 일본 미쓰비시 계열사를 비롯한 일본 전범기업 75곳에 1조2300억원을 투자한 것으로 집계됐다. 지난 8월 6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김광수 의원(민주평화당)은 국민 정서에 부합하지 않는 국민연금의 투자 원칙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취지의 법안(국민연금법 일부개정법률안·이하 국민연금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법안에는 대일 항쟁기에 한국 국민의 생명·신체·재산 등의 피해를 입힌 후 공식 사과 및 피해배상을 하지 않은 일본 전범기업에 대한 투자를 제한하도록 하는 조항을 신설했다. 김 의원은 입법 취지를 설명하며 “국민연금이 투자한 일본 전범기업 75곳 중 84%에 해당하는 63곳은 수익률이 마이너스(-)를 기록해 수익성 측면에서도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른바 국민연금법 개정안에서 밝힌 전범기업 투자 배제에 대한 근거는 국민연금의 사회책임투자 원칙이다. 현행법상 ‘국민연금기금을 관리·운용하는 경우에 있어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수익 증대를 위해 투자대상과 관련한 비재무적 요소인 환경·사회·지배구조(ESG) 등을 고려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으니 사회책임투자 원칙에 따라 전범기업 투자를 제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본 전범기업의 역사인식과 윤리, 과거 행태가 사회책임투자 원칙과 ESG 요소에 어긋난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일본 전범기업에 대한 투자를 사회책임투자 원칙에 대한 훼손으로 볼 수 있을까. 국민연금을 비롯한 해외 연기금의 사회책임투자는 ‘수익률 확대’를 전제로 한다. ESG 지표를 고려한 투자는 위험관리 차원에서 이뤄진다. 장기적인 수익률 하락 리스크를 줄이기 위한 방편이다. 사회책임투자 역시 수익성과 안정성 추구를 기본으로 ‘최적의 투자수익률’을 추구한다. 사회책임을 위해 투자를 하는 것이 아니라 책임투자를 해야 높은 수익을 거둘 수 있기 때문에 사회책임투자를 택한다는 얘기다. 사회책임투자 리서치기관 서스틴베스트의 류영재 대표는 “민족과 역사는 ESG 요소가 아니다”라며 “전범기업 투자 배제는 전통적인 윤리투자에 해당하는데 현재 공적 연기금이 추구하는 책임투자와 윤리투자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라고 말했다.

일본 전범기업의 마이너스 수익률(2018년 말 기준)도 투자 배제의 명분으로 보기 어렵다. 김성주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은 자신의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국민연금이 일제 전범기업에 투자해 손해를 보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라며 “2018년 일본 투자에서 손실이 발생했으나 2016년과 2017년 그리고 올해는 좋은 수익을 올리고 있다”고 밝혔다.

사회책임투자가 정착된 노르웨이·스웨덴·네덜란드 등 해외 연기금의 경우 네거티브 스크리닝(투자 제한) 방식을 통해 특정 기업의 투자 비중을 줄이고 투자 대상에서 제외한다. ‘나쁜 기업’을 걸러내자는 취지다. 이들은 사회적 합의과정을 거친 ESG 관련 투자원칙과 지침을 근거로 투자 제한조치를 취한다.

“장기투자 리스크 크다” 신중 결정론도

예컨대 2019년 기준 155개 기업에 대한 투자 제외 방침을 세운 노르웨이 정부연금펀드(GPFG)는 노르웨이 재무부가 정한 국부펀드 운영지침 ‘투자 배제와 감시를 위한 가이드라인’을 따른다. 투자 대상 기업이 석탄화력발전 사업을 하거나 특수한 형태의 무기를 생산할 경우 투자를 배제하는데 집속탄(한 개의 큰 폭탄이 폭발하면 함께 탑재된 작은 폭탄이 연쇄폭발을 일으키는 살상무기)을 만드는 국내 기업 ‘풍산’도 GPFG의 투자 배제 기업에 포함된다. 노르웨이는 집속탄을 비인도적 살상무기로 규정하고 사용을 금지한 오슬로 협약(2008년 발효) 체결 국가다. 국제사회의 합의가 GPFG의 기업 투자 배제 방침을 받쳐주는 셈이다.

반면 국민연금에는 사회책임투자에 대한 체계적인 지침·가이드 라인이 마련돼 있지 않다. 2009년 유엔 사회책임투자원칙(PRI)에 가입했고 같은 해 의결권 행사 지침에 ESG 원칙을 명시했지만 형식적인 조치에 불과했다.

일본 전범기업을 사회책임투자에 따라 투자 배제 영역으로 끌어들이려면 국제사회에서 통용될 수 있는 공신력 있는 지침이 필요하다. 일본 전범기업에 대한 명확한 정의와 합의된 기준을 세운 뒤 이들 기업의 배상 책임 부인행위가 장기투자에 리스크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알리는 게 순서다.

국민연금 수탁자책임전문위원인 권순원 교수(숙명여대 경영학)는 “단순히 과거 전범기업이기 때문에 현재 투자를 막는다는 것은 원칙에 맞지 않는다”며 “투자 배제는 일본 불매운동·사죄 요구와 별개로 미래의 위험요소들을 감안해 신중히 결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나온 전범기업 제재 법안은 사회책임투자를 위한 절차와 합의과정을 생략하고 내놓은 결과물에 가깝다. 이찬진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참여연대 집행위원장)은 “국제사회로부터 공인된 전범기업 리스트가 없는 상황에서 특정 일본 기업을 지정해 투자 제한을 할 경우 돌아올 리스크가 너무 크다”며 “법으로 제재를 하겠다는 발상은 정치권의 포퓰리즘”이라고 말했다.

반기웅 기자 ba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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