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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시가 조성한 것으로 밝혀진 성락원은 과연 문화재 가치가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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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성락원 영벽지 서측의 바위에 새겨진 시(시냇물 끌어다 작은 연못 만들다·引水爲小池’)가 황윤명의 문집인 <춘파유고(春坡遺稿)>에 수록된 시문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이곳이 내시인 황윤명의 별서였다는 증거이기도 하다.|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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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밝혀진 내시의 별장, 문화재 가치가 있는가.’ 최근들어 조선조 철종 이조판서 심상응의 별장이자 의친왕의 별궁으로 ‘200년 조선의 비밀정원’이라는 이유를 들어 명승(제35호)으로 지정된(1992년) 성락원(서울 성북동)의 문화재적 가치를 두고 논란이 벌어졌다. 그 결과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이 1983년과 92년 “문화재적 가치가 없다”는 전문가 의견을 무시하고 문화재로 지정한 사실이 밝혀졌다. 특히 국회 문화체육관광위 김영주 의원(더불어민주당)이 국사편찬위원회를 통해 ‘철종 때 이조판서 심상응’은 사료에 등장하지 않는 인물이라는 것을 확인함으로써 논란은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성락원의 문화재적 가치는 애초부터 없었는데, 문화재관리국이 성락원 소유자의 근거없는 주장을 검증없이 받아들였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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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벽지의 바위글씨. 춘파유고 시문과 내용이 똑같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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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서화에 뛰어난 내시

그런데 새로운 변수가 생겼다. 이 성락원 영역이 ‘심상응의 별서’는 아니지만 조선조 고종(재위 1863~1907)의 최측근이던 호종내관 황윤명(1848~?)의 별서(농사 등을 지으며 기거하던 별장)였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김영주 의원실이 23일 국회의원회관 제6간담회실에서 개최하는 ‘성락원 명승지정 무엇이 문제인가’ 토론회에서는 이원호 국립문화재연구소 자연문화재연구실 학예연구사가 발표할 ‘새롭게 밝혀진 성락원 영역의 문화재적 가치’와 관련, 활발한 논쟁을 벌일 것으로 보인다.

이른바 성락원 영역에 별서를 조성했다는 ‘내시’ 황윤명은 누구인가. 고종의 호종내관 중 최고위직이자 명례궁 대차지(大次知·종1품 조선 후기 각 궁방의 재정관리 총책임자)를 역임한 인물이다. 한마디로 고종의 재산관리 총책임자라 할 수 있다. 박철상 한국문헌문화연구소장은 “황윤명은 왕명을 전달하는 내시 가운데 최고위직인 승전색(承傳色)이자 궁궐의 사무를 총괄했던 인물”이라고 밝혔다. 박철상 소장에 따르면 황윤명은 ‘시서화삼절(詩書畵三絶)’로 칭송받는 이른바 ‘문인 내시’였다. 학문과 서예, 그림에 뛰어났으며 육교시사(1870년대 후반 위항문인들의 모임)을 주도한 강위(1820~1884)와 교유하면서 이 일원으로 활동했다. 특히 황윤명은 공립학교인 삼산의숙까지 설립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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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가 황윤명 등에게 하사한 ‘일편단충’ 유묵. 그중 한 점을 하사받은 김규복의 발문에는 “중전마마(명성황후)가 글자 3본을 써서 황윤명 등에게 주었다”고 했다.|이화여대 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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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글씨와 내시 황윤명

그런데 성락원 영벽지 서측 바위에 새겨진 시(‘시냇물 끌어다 작은 연못 만들다·引水爲小池’)가 황윤명의 문집인 <춘파유고(春坡遺稿)>에 수록된 시문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온 시냇물 모아 흐르지 못하도록 막고서(百川會不流) 연못 만들어 푸른 난간 들렀어라(爲沼碧欄頭). 나는 이 연못 생긴 이후로(自吾得此水) 강호유람 발길 뜸해졌네(少作江湖遊).”

이미 2013년 이같은 내용의 논문을 발표했던 이원호 학예사는 “이 시는 중국 고사에 출전이 없는 고유 창작시”라며 “이런 창작시가 성락원 영벽지와 황윤명의 문집에 똑같이 등장했다면 성락원 영벽지의 시는 황윤명의 작품이 분명하다는 뜻”이라고 밝혔다.

이 학예사는 또 “명성황후가 갑신정변(1884년) 때 황윤명의 별서로 피난했다는 자료도 찾아냈다”고 밝혔다.

즉 명성황후(1851~1895)는 1885년 12월21일 측근인 황윤명·김규복·김규석 등 3명에게 ‘일편단충(一片丹忠)’이라는 유묵을 써서 하나씩 나눠준 바 있다. 그런데 이화여대 박물관이 소장한 ‘일편단충’에 달린 김규복의 발문에 ‘명성황후의 황윤명 별서 피란 사실’이 기록돼있다는 것이다.

“(갑신정변 발발) 다음날…액례(掖隸·내시부 소속 하급관리) 5~6명이 어가를 호위해 혜화문으로 나가 성북동 황윤명 집으로 향했다. 종손 김응현 및 사인 권억과 함께 쌍류동으로 따라갔다…태후, 왕비, 세자께서 이미 어가에 머무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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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일편단충’ 유묵의 김규복 발문에는 “액례 5~6명이 어가를 호위해서 혜화문으로 나가 성북둥 황윤명 집으로 향했다”고 기록했다.|이화여대 박물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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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의 피신처?

이원호 학예사는 “이로써 ‘황윤명 별서의 조성연대’를 갑신정변이 일어난 1884년 이전까지 소급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명칭 또한 조성 당시에는 ‘성락원’으로 일컬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황윤명의 <춘파유고>를 보면 쌍괴당(雙槐堂), 쌍괴누옥(雙槐陋屋), 쌍괴실(雙槐室), 삼가루(三可婁) 등의 건조물이 확인된다. 이밖에 조선 후기 중인문사인 오횡묵(1834~?)의 문집 <총쇄록>에는 오횡묵이 황윤명(황춘파의)의 별서에 두 번 방문한 정황이 남아있다.

“1887년 4월25일 북쪽 시내로 방향을 돌려 시내가로 난 오솔길을 따라 1리 쯤 들어갔다…나는 듯한 하나의 정자가 걸음을 따라 모습을 드러내니 바로 황춘파(黃春坡: 황윤명) 선생의 별서이다.”

“1894년 10월20일 나는 혜화문에서 황춘파(황윤명)의 계정(溪亭)으로 들어갔다.…몇 시간이 지났기에 억지로 작별인사를 나누고 별장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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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락원 내에 흩어져 있는 바위글씨. 전문가들은 “이 바위글씨는 18세기 이후 근대까지 거의 200년에 걸친 자연스러운 정원 조성의 역사를 보여주는 유물들”이라고 평가했다.|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황윤명의 별서가 혜화문 근처에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총쇄록>에는 특히 오횡묵이 황윤명의 별서를 방문할 당시 경관이 자세히 묘사돼있다. 즉 ‘아름다운 나무가 무더기로 빽빽하다’, ‘기이한 새와 꽃들’, ‘소나무 숲’, ‘취병’, ‘정자’ 등과 관련된 표현들이다. 또한 오횡묵은 황윤명에게 올린 시(‘쌍괴당 선생의 높으신 글에 이어 가르침을 구하다·雙槐堂崇藻下請敎)’의 서문에서 황윤명의 별서를 ‘망천별업(輞川別業)’에 비유했다. 왕망천(王輞川)은 중국 당나라 시인이자 화가인 왕유(王維·699?~759)를 지칭한 것이다. 왕유의 정원인 ‘망천별업’은 왕유가 일찍이 경치가 빼어난 섬서성 망천 계곡에 별장을 지었고, 12경승을 담은 망천도를 통해 아름다운 정원을 널리 알렸다. 이원호 학예사는 “이 별서를 왕유의 망천별업에 비유하는 것은 정원에 대한 최고의 찬사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황윤명 별서’가 자리잡고 있던 성북동(북저동) 일원은 예부터 복사꽃이 만발한 도성내 유람지로 각광을 받은 곳이다. 황윤명의 <춘파유고>에도 ‘북저동의 그윽한 경치(北渚幽景)’라 표현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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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빙가’ 탁본. ‘완당’이라는 글씨로 보아 추사 김정희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전형적인 추사체가 아니기 때문에 추사체가 확실한지는 아직 알 수 없다.|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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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글씨는 추사체인가

또하나 ‘성락원 내’ 바위글씨 6기는 동시대가 아니라 정원 조성 이전부터 오랫동안 개별적으로 새겨진 글씨인 것으로 확인됐다. 이중 영벽지 일원에 새겨진 ‘장빙가(檣氷家·고드름)’ 바위글씨엔 추사 김정희(1786~1856)의 다른 호인 ‘완당’이라는 글씨가 새겨져있다. 1차 전문가위원회에 참석한 이동국 예술의 전당 수석큐레이터는 추사체가 맞다고 평가했다. “직획 위주의 고예 스타일 글자구조로 바위에 새겨진 추사체”라는 것이다. 2차 전문가회의에 참석한 박철상 소장은 “바위글씨를 보면 전형적인 추사체는 아니지만 “유배(1840년) 이전의 추사글씨일 가능성은 있다”면서 최종 판단을 유보했다. 손환일 대전대 서화연구소책임연구원은 “이 글씨는 추사체와는 거리가 멀다”고 부정했다.

■“‘문인 내시’의 유적이니 가치 충분하다”

이렇게 새롭게 밝혀진 사실을 두고 2차례에 걸쳐 진행된 고문헌·조경·서예·역사 관련 전문가회의는 ‘명승으로서의 가치가 충분하다’는 결론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시대 정원의 구성요소와 당시의 모습이 새롭게 확인됐고, 이 일대가 황윤명이 별서로 조성하기 이전에도 경승지였다”는 것이다. ‘황윤명 별서’는 의친왕 이강(1877~1955)-이건(1909~1990)과, 박용하라는 인물을 거쳐 1954년 심상준(1917~1991)의 소유로 바뀌었다.

전문가회의는 영벽지 등 정원의 중요 요소가 남아있고, 2008~2009년의 복원화사업 과정에서 콘크리트를 제거하고 계류 원형을 복원했으며, 상류동천 바위글씨를 확인하고, 조선시대 가마길 추정 암반을 발견했으며, 자연석 쌓기로 축대를 조성하는 등 원형 회복단계에 돌입했다는 점을 들어 “문화재 가치가 충분하다”고 보았다.

이날 발표회에서 토론자로 나서는 박철상 소장은 “황윤명은 내시에 대한 고정관념을 깬 ‘문인 내시’였다”고 평가했다. 서법에도 이름을 날린 황윤명의 글씨는 위창 오세창(1864~1953)의 <근묵>에 실려있고, 역대서화가의 평전인 <근역사화징>에도 이름이 올라있다. 황윤명이 남긴 글은 양손(養孫)인 안태영이 <춘파유고>라는 이름으로 1983년 간행했는데, 내시출신으로 문집을 남긴 유일한 사례이다. ‘문인 내시’라는 이름이 어울린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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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횡묵의 <총서>에 표현된 황윤명 별서 방문기록. 1877년 4월25일 오횡묵은 “소나무 숲이 우거지고 취병이 있는 아름다운 길을 지나 하나의 정자가 걸음을 따라 드러내니 바로 황춘파(황윤명)의 별서”라 했다.

그런 황윤명이 중국과 조선의 명적을 모아 <난운관법첩> 3책을 목판으로 간행했는데, 고종이 1898년(광무 2년) 자신을 알현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에게 이 책을 하사한 기록이 있다. 고종은 황윤명에게 ‘윤명(胤明), 윤명(允明), 수연(壽延)’ 등 3차례에 걸쳐 어사명(御賜名)을 내려주기도 했다. 박철상 소장은 “황윤명 별서는 국왕이나 사대부가 아니라 그동안 철저히 무시당했던 내시가 역사 주체로도 나설 수 있다는 예를 보여준다”면서 “그런 의미에서도 이 별서는 문화재 가치가 차고 넘친다”고 주장했다.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역시 “특수계층인 내관이 경영한 정원이라는 점 하나만으로도 문화재가치가 충분하다”며 “또한 영벽지를 비롯한 바위글씨들은 18세기 이후 근대까지 거의 200년에 걸친 자연스러운 정원 조성의 역사를 보여주는 유물”이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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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파유고>에 표현된 황윤명의 인물적인 가치, “춘파의 풍류가 넓고 뛰어나며 시명이 대단하여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는 김문연의 인물평이 있다.

■“관광차원서 복원한 성락원, 서울시기념물 정도가 적당하다”

그러나 성락원의 문화재적 가치에 줄곧 의문을 제기해왔던 황평우 문화유산정책연구소장은 “환관의 정원, 명성황후의 피난처가 역사적 가치가 있다면 서울도성 안은 모두 사적이고 명승이 돼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황 소장은 “현재의 성락원은 문화재로서 복원한게 아니라 관광차원에서 복원한 것”이라며 “그렇다면 용인 민속촌과 호암미술관의 ‘희원’도 문화재가 돼야 한다”고 반박했다. 황소장은 특히 국립중앙박물관 야외에 서있는 ‘북묘비’에 “‘갑신년 겨울에 역란(갑신정변)이 일어나자 대왕대비, 왕대비, 왕비 등과 더불어 관우장군 사당(북묘)으로 피신했다’는 내용이 있다”면서 “명성황후가 황윤명 별서로 피신했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고 주장했다. 황소장은 “왕비가 도망가 숨은 것은 6일 오후 전투 중이었는데 궁에서 성락원까지 가려면 동소문을 나가야 하는데 쉽게 도달하기 어려운 거리”라고 주장했다. 황소장은 결국 “성락원의 명승 자격은 취소해야 하지만 그동안의 ‘가꿈’을 인정하고, 막대한 시민세금이 투입된 점을 감안해서 ‘서울시기념물’ 정도가 타당할 것”이라고 밝혔다.

■“지정 당시의 의혹은 철저히 파헤쳐야”

토론자들은 온도차는 있었지만 문화재관리국(문화재청)이 별다른 고증없이 소유자 주장만 빋고 사적으로 지정하고 명승으로 전환한 것에 대해서는 입을 모아 비판했다. 특히 1983년과 92년 전문가들이 “문화재 가치가 없다”고 일관되게 주장했는데도 문화재 지정을 강행한 부분과 관련해서는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들이었다. 이 가운데 황평우 소장은 “문화재위원들과 관련 공무원들이 용역을 나눠주고 용역을 나눠준 공무원들은 용역을 맡은 이가 근무하는 대학에서 학위를 취득하고 장학금을 받았다”는 의혹을 제기하면서 “철저한 검증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결국 이번 ‘성낙원’ 문제는 문화재 지정과정에서의 의혹을 철저히 파헤치고, 다른 한편으로는 새롭게 확인된 사실을 토대로 ‘원점에서 다시 문화재 가치’를 논하는 투트랙으로 진행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된 셈이다.

명칭부터 ‘성락원’이 아닌 조성당시의 이름인 쌍괴당(雙槐堂), 쌍괴누옥(雙槐陋屋), 쌍괴실(雙槐室), 삼가루(三可婁) 등을 고려해야 한다. 김영주 의원은 “문헌사와 조경, 고고, 서예 등 각 분야를 망라한 전문가회의에서 집중적인 연구를 통해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결론을 내려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와 함께 초창기 국보·보물 등으로 지정되었거나 해제된 문화재 가운데 논란의 소지가 있는 유물이나 유적에 대해서는 대대적인 재평가가 이뤄져야 할 것이다. 단적인 예로 일제강점기(1939년)부터 해방후까지 국보(제367호)였다가 1962년 한 불교미술사학자에 의해 ‘일제 짝퉁’으로 분류돼 국보에서 해제된 상원사 동종 등이 그 것이다. 이 동종은 2012년 통일신라 시대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짙다는 과학적 분석결과에도 여전히 재검증되지 않고 있다. 논란을 일으킬만한 문화유산이 성락원 한 곳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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