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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가짜동요 퍼뜨린' 일본 낭인 신문 '한성신보' 불매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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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자를 알수 없는 소설 <이춘풍전>은 1896년 한성신보에 연재된 소설 ‘남준여걸’을 패러디한 작품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사진은 ‘남준여걸’이 실린 한성신보 지면. |김준형 부산교대 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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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났다 일이 났다. 이씨 가중(家中)에 일이 났다…팔장사(八壯士) 실어다가 구중궁궐 위태하니…. 백수군왕(白首君王) 섬겼으니 천명인들 보존할까…. 여전히 여송연(呂宋煙)만 찾으니 끝내 깨닫지 못하는구나. 동방예의 던져두고 서양물색(西洋物色) 그리 좋은가. 남 우스운 일 그만하고 북망산(北邙山) 돌아가오.’

■가짜동요의 파문

1896년(고종 33년) 4월19일 서울에서 발행되던 일본계 신문 한성신보는 망측한 동요를 소개한다. ‘신문사 직원이 어떤 아린아이에게 들은 동요였다’는 것이다. 동요의 내용은 망측했다. 요컨대 “백수 노릇하는 무능한 군주(고종)가 외세를 끌어들이고도 담배(여송연)만 찾고 있으니 창피하다. 이제 그만 죽어라”는 것이었다. 조선을 한껏 조롱하는 이 기사는 조선 조정과 민중의 저항을 불러모았다. 4일 뒤인 23일 경쟁지인 <독립신문>은 재동에 사는 독자의 ‘팩트체크’를 통해 그 동요가 ‘가짜’임을 규명했다.

“나(독자)도 다른 사람도 이런 동요를 들은 바 없으니 심히 아혹(괴이하고 의심스럽다)한 일이다. 이런 동요 지을 조선사람 없을 듯 하다.”

가짜뉴스가 분명했으니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다. 일본인이 발행하는 신문이 조선국왕을 조롱하는 동요, 그것도 가짜동요를 실었다는 것은 남의 나라 국가원수 모독죄가 아닌가. 독립신문 독자가 직접 팩트체크에 나섰다는 것은 백성들 사이에 여론이 들끓었음을 반증해준다. 조선 정부 역시 사태의 심각성 깨달았다.

일반 관리들에게 ‘한성신보 구독 금지’ 조치를 내렸고, 아예 한성신보의 인가취소까지 검토했다. 그러나 외국인 치외법권 문제 때문에 인가취소는 성사되지 않았다, 대신 신문배달인인 오서방, 천서방, 김서방 등에 대한 수배령을 내리는 등 강경책을 폈다. 당시 일본의 전권공사인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郞·1855~191)조차 “조선정부가 한성신보를 완전히 폐간시키려고 작정한 것 같다”고 우려할만큼 심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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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4월 19일자 <한성신보>. 고종을 한껏 조롱하는 가짜동요를 게재함으로써 공분을 샀다. 이 사건으로 들불처럼 불매운동이 번졌다.|김준형 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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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신문 불매운동

강제페간은 하지 못했지만 자발적인 구독금지운동이 벌어졌다. 일종의 한성신보 불매운동이었다.

이때 한성신보 독자수가 급감했다. 구독자수는 1911명에서 510명으로 급감했다. 당연히 경제적 손해도 막심했다. 한성신보의 창간을 지원했고, 매달 운영자금까지 댔던 일본 외무성은 긴급대책을 마련해서 보조금을 매달 170엔에서 300엔으로 대폭 인상하는 등 고육책을 썼다.

심지어 한성신보는 5월9일자에 사시(社是)에도 맞지않은 ‘독립애국가’까지 게재하는 등 무마책을 폈다.

즉 ‘가짜동요’를 실었던 방식 그대로 1면에 독립애국가를 실은 것이다. 그러면서 ‘근래 동요 창가 중 별 것이 많지만 그 중에서 문명의 실(實)을 그려 애국한 정(情)을 내어 자주독립을 칭하고 불러서 국민의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창가가 있다’고 게재이유를 밝혔다. 메시지는 자명했다. “한 달 전 쯤에 실은 동요도 그저 보고들은 것을 그대로 실은 것 뿐이다. 봐라. 우리 신문사가 조선의 ‘독립애국가’도 보고 들은대로 소개하지 않느냐. 우리는 조선을 비방할 의도가 없었다”고 해명한 것이었다.



■‘낭인신문’ 한성신보의 실체

그렇다면 궁금증이 생긴다. 한성신보는 왜 그런 ‘가짜동요’를 보도했을까. 그 전말을 알아보자.

먼저 잠깐 밝혔듯 한성신보는 1895년 2월 17일 일본 외무성의 자금 지원으로 서울에서 창간된 일본계 신문이다. 일본 정부가 왜 조선에서 발행되는 신문에 자금을 대줬을까. 시꺼먼 속내가 있었다.

즉 청일전쟁의 승전분위기에 들뜬 일본은 이제 조선에서 침략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조선 민중의 여론을 호도할 필요성을 느꼈다. 한마디로 일본에 향한 우호적인 여론조성이 필요했다.

이 때 일본 외무성이 창간지원금 1200엔을 대고, 매달 120엔을 지급한다는 조건으로 발행된 신문이 바로 한성신보다. 그런데 문제는 한성신보사 기자와 사원들이 대부분 언론계 경력이 없던 낭인들이었다는 것이었다.

낭인(浪人)이 누구인가. ‘떠돌이 무사’라는 뜻이지만 일본 내 침략적인 정치권력과 직간접의 관계를 맺으면서 한국침략을 선도한 집단이라 할 수 있다. 봉건제도의 잔재요, 침략과 군국주의 전초병이었고, 조선을 거쳐 만주 대륙을 횡행하며 곡예와 음모를 일삼는 무법자들이었다.

한성신보 사장으로 앉은 아다치 겐조(安達謙藏·1864~1948) 역시 구마모토현(熊本縣) 출신의 대륙 낭인이었다. 훗날 체신대신과 내무대신을 역임하는 등 승승장구했다. 아다치는 호를 ‘한성(漢城)’이라 할만큼 조선생활에 자부심과 긍지를 느꼈던 자였다. 대아시아주의를 내걸고 국권확장을 표방한 우익성향의 정치결사단체인 국권당의 창당멤버였을만믐 일본의 국익을 우선순위로 둔 인물이었다. 한성신보 주필이 된 구니모토 시게아키(國友重章) 역시 국수주의적 성향의 인물이었다. 아시아주의를 추종한 구니모토가 사망한 뒤 조선의 백두산에 그의 분골을 묻었다고 한다. 아다치와 마찬가지로 조선과 만주를 넘어 대아시아 건설이라는 환상에 젖어있던 국권주의자였다.

그런데 이 둘은 주한일본전권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1846~1926)의 명령에 따라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일으킨 핵심인물이 된다. 이들과 함께 한성신보 기자와 직원 상당수도 천인공노할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간여했다.

즉 한성신보가 사건 당일(1895년 10월8일) 우익 낭인들을 총동원했고, 관련자 48명 중 상당수가 간여했다는 기록이 있다. 실제로 일본인 신문인 <대동신보> 사장을 지낸 기쿠치 겐조(菊池謙讓·1870~1953)는 훗날 “(1895년 명성황후 시해 때) 한성신보사 부대 40여명이 칼을 들고 맹렬하게 돌진했다”면서 “한성신보는 신문기자 단체라기보다는 유지가낭인(有志家浪人)들의 구락부”라고 토로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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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불매운동 후 <한성신보>는 소설을 게재함으로써 조선민중의 여론을 호도하려 했다. 1896년 5월17일부터 기존의 주의·주장을 직접 드러낸 ‘영국사요’을 고전소설(‘조부인전’)으로 대체했다. ‘조부인전’의 주제는 ‘여자도 자강하자’는 것이었다.|김준형 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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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과 훈련대의 쿠데타’ 가짜뉴스로 왜곡

한마디로 한성신보는 언론기관이 아니라 천인공노할 깡패소굴이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한성신보가 이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왜곡보도했다는게 큰 문제였다. 한성신보는 시해(1895년 10월8일) 다음날인 9일자부터 집중적으로 이 사건을 보도했다. 신문은 황후사건의 본질을 보도하지 않고 대원군이 고종을 대신해서 궁궐로 들어가 정치에 참여하게 된 경위만 보도했다. 그런데 그 경위라는게 문제였다.

“궁중의 폐단이 백출하여 뇌물이 횡행하고…돈을 받고 관직을 팔며…이 형세가 대원군으로 하여금 궐연히 일어나 궐내로 들어가기에 한 연유이다. 임금이 왕성 호위하는 소임을 훈련대 병정으로 삼았지만 이를 믿지않고 새로 시위대를 설치하니 훈련대 병정들이 불평한 마음을 품어…대원군께 호소하매…대원군이 대군주폐하를 보익하려고…훈련대를 거느리고 궐내로 들어가시기에 이르니라…”(10월9일자)

그러니까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그들 표현대로 ‘반민비세력’인 대원군과 해산위기에 직면한 훈련대가 모의한 쿠데타로 위장한 것이다. 그렇다면 고종은 왜 자신의 호위부대인 훈련대를 해산시키려 했단 말인가.

이유가 있다. 일본은 청일전쟁(1894~95) 승리 후 시모노세키 조약(1895년 4월17일)에 따라 요동반도를 차지했지만 이른바 ‘3국간섭(러시아 프랑스 독일)’ 때문에 바로 청나라에 반환해야 했다. 이로써 일본의 국제적인 지위가 실추됐고, 그 와중에 조선에서도 친러 정치세력이 대두됐다. 이때 일본은 고종과 명성황후의 친러적인 태도를 우려한 나머지 국왕 주변의 호위병을 폐하고 일본군이 지도하고 있던 ‘훈련대’로 교체하려 했다.

이에 일본의 의도를 간파한 고종은 아예 일본군이 지도했던 훈련대를 혁파하고 새로운 군병으로 시위대를 조직해서 자신의 호위를 맡기려 했다. 일본과 한성신보는 바로 ‘고종의 훈련대 혁파’와 ‘고종의 무능’을 명성황후 시해의 원인으로 몰아간 것이다. 한성신보는 한마디로 명성황후 시해를 ‘흥선대원군과 훈련대’의 쿠데타로 왜곡했다.

■“(명성황후는) 의연히 대처하지 못하고 도망쳤다”고 호도 댗

한성신보는 이미 시해된 명성황후의 신상을 두고도 천인공노할 가짜뉴스를 계속 퍼뜨렸다.

시해 하루 뒤인 10월9일 ‘왕후폐하의 소재가 불명(不知所之)’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왕성에서의 작은 다툼 속에서 고종과 왕세자는 무사하지만 황후의 소재지는 알 수 없다”고 했다. 이미 황후를 시해해놓고는 “황후가 가신 곳을 알 수 없다”든지, “군병 틈에 섞여 충주로 피란했을 것”이라든지, 황후가 임오군란 때도 장호원으로 탈출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남복을 하고’ 피란했을 것”이라든지 하는 가짜뉴스를 양산했다.

가증스러운 여론호도였다. 특히 “왕궁생활에 부족함이 없는 황후가 변을 만나 의연히 대처하지 못하고 민간으로 도망치듯 달아났으니 민망하다”(10월9일)는 표현까지 썼다. 이미 궁궐에 침입한 일본 병사과 낭인들에 의해 시해되고 시신까지 불태워지는 만행의 희생양이 된 황후를 두고 ‘황후의 자질이 의심스럽다’느니, ‘남복을 하고 도망쳤다’느니 하며 허황된 뉴스를 퍼뜨린 것이다.

한성신보는 결국 황후시해사건하고 일본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을 강변하려고 가짜뉴스를 양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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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화후가 시해된 경복궁 건청궁 내 옥호루. 한성신보는 명성황후를 시해한 다음에도 ‘명성황후가 민망하게 도망쳤다’는 등의 가짜뉴스를 양산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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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관파천를 맹비판한 한성신보

그렇게 일본정부의 비호아래 뻔뻔스럽게 사세를 꾸준히 확장하던 한성신보는 1896년 아관파천 이후 폐간위기에 몰린다. 즉 1896년 2월11일 고종은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후 일본의 무자비한 공격에 신변에 위협을 느낀 나머지 왕세자와 함께 왕궁을 떠나 비밀리에 러시아 공관(공사관)에 옮겼다. 이것이 아관파천이다.

일본으로서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이로써 김홍집(1842~1896)의 온건 친일 내각이 무너지고 친러파 신정부가 구성됐다. 일본 정부의 주구노릇을 한 한성신보는 조선의 천러 정부를 작심하고 비판하고 나섰다.

특히 2월24일자는 ‘의병들에 의해 피살된 충주관찰사 김규식’ 기사를 쓰면서 “동양에서도 야만인종의 의병이 있다면 구미의 문명적 인사에게 무슨 면목이 있겠느냐”고 혹평했다. 일본인이 발행하는 신문이 조선사람을 야만인종으로 폄훼한 것이다. 이것은 조선 조정의 야만성을 비판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조선 조정도 가만있지 않았다. ‘한성신문 기사의 무례를 항의하고 신중한 보도를 요구’하는 문서를 한성신보에 보냈다. 하지만 한성신보는 꿈쩍도 않았다. 오히려 조선의 친러 정부를 더욱 비판하는 기사를 계곡 내보냈다.

“그날(아관파천) 이후 범사가 변해서 개화하는 일도 막혔고, 치민치국지법도 없어지고, 팔도 각지의 폭도들도 의병이라는 명색을 받아 충군애국하는 무리가 되고…”(한성신보 1896년 3월3일)

한성신보는 당시 조선의 개화·치안·사회·법률·물가 등의 사회문제가 모두 아관파천 때문에 일어났다고 비판했다. 이에 ‘난신적자가 일본정부의 은혜를 배신하고 은덕을 망각해서 나라의 정체를 손상시켰다’(3월3일자)는 등, ‘신하가 군주를 겁박해서 다른 나라 공관에 옮겨서 유폐시켰다’(3월13일)는 등의 기사를 잇달아 내보냈다. 특히 이런 내용을 직접적인 기사 대신 독자투고 형식으로 교묘하게 게재하는 꼼수를 냈다. 그러면서 ‘본 난에 실린 내용 때문에 우리 신문사에 책임을 지울 수 없다’는 사고까지 게재했다. 기자가 직접 조선조정을 비판할 수 없으니까 독자란이라는 편법을 통해 조선 조정을 흠집낸 것이다. 기사 중에는 ‘백성을 돌보지 않고 자신의 이득만 돌보는 조선정부’라고 우회적으로 조롱하는 칠언시를 제시하기도 했다.

■역대급 필화사건

그러다 한성신보에 결정타를 먹이는 두 사건이 일어난다. 한 사건은 ‘독립신문 창간’(1896년 4월7일)이고, 다른 한 사건은 ‘가짜동요 게재 사건’(4월19일)이었다. 한성신보가 일본 외무성의 자금으로 창간됐다면, 독립신문은 조선 조정의 비밀지원을 받는 신문이었다. 한성신보로서는 경쟁지가 생긴 셈이다. 아무래도 조선인 독자들은 한성신보를 끊고 독립신문 구독으로 바꿨을 것이다.

그런데 독립신문이 창간된지 10여일만인 4월19일 역대급 필화사건이 벌어진다. 그것이 바로 모두에 인용한 ‘가짜동요 게재’ 사건이었다. 앞서 밝힌대로 조선 임금과 조선 그 자체를 모독했다는 이유로 여론의 십자포화를 당하고 미증유의 불매운동에 직면한 한성신보는 갖가지 대책을 마련한다. 심지어 조선의 ‘독립애국가’까지 소개하는 고육책을 쓰지만 별무신통이었다.

■소설의 게재로 위기탈출 고육책

폐간위기에 직면한 한성신보가 마지막에 마련한 방책이 있었으니 바로 ‘소설의 게재’였다.

일본의 기밀문서(1896년 ‘기밀’ 제 37호)는 “한성신보에 소설란을 두어 각곳의 이언속설(里諺俗說)을 게재해서 아동 부녀자 또한 이것을 읽게해서 한인 일반의 기호를 이용하여 부지불식간에 이를 계도하도록 힘쓴다”고 촉구했다. 이때부터 한성신보는 조선인의 일상을 소개하고 일상에서 벌어지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빈번하게 실었다. 한성신보는 잠깐 정치색 기사를 접어두고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면서도 세속의 기호에 맞는 얼굴로 치장했다. 민중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게 한 이른바 3S(스크린, 스포츠, 섹스) 정책을 방불케한다.

특히 1896년 5월17일부터 기존의 주의·주장을 직접 드러낸 ‘영국사요’을 고전소설(‘조부인전’)으로 대체했다. ‘조부인전’의 주제는 ‘여자도 자강하자’는 것이었다. <한성신보>가 게재한 또한편의 소설은 1896년 9월28일부터 10월22일까지 12회에 걸쳐 연재된 ‘남준여걸’이다. ‘어리석은 남자(男蠢)’와 ‘여걸(女傑)’의 이야기인 ‘남준여걸’은 지금까지 전래되고 있는 <이춘풍전>의 원작 같은 느낌이다. 최근 김준형 부산교대 교수가 “소설 <이춘풍전>은 한성신보에 실린 ‘남준여걸’을 패러디해서 완성한 작품”이라고 주장한 내용이다.

‘남준여걸’과 <이춘풍전>과 전반부는 다소 이질적이지만 전체적인 내용은 같다.

‘다방골의 부자 이경원에게 아들 이춘풍이 있는데…아비가 죽자 재산을 탕진하고…아내가 친정오빠에게 빌린 돈 500냥을 주니…평양에 간 춘풍이…기생 추월에게 재산을 다 털리고…춘풍은 추월의 집에서 사환이 되고….’

<이춘풍전>이라는 소설에서 가짜뉴스에 저항한 조선인의 불매운동 역사를 알게 되었으니 참으로 뜻밖이 아닌가.

<참고자료>

김준형, ‘사회적 갈등과 정치적 글쓰기’, 한성신보 수재 고전소설의 등장‘, <고소설연구> 제40호, 2015

’남준여걸과 이춘풍전‘, 제223회 한국어문교육연구회 학술대회 발표문, 2019

장영숙, ’한성신보의 명성황후 시해사건 보도태도와 사후조치‘, <한국근현대사연구> 82, 한국근현대사학회, 2017

박용규, ’구한말 일본의 침략적 언론활동‘, <한국언론학보> 43, 한국언론학회, 1998

김종준, ‘한성신보의 한국민권운동에 대한 인식’, <사학연구> 126, 한국사학회, 2017

경향신문 선임 기자 lk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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