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3.29 (금)

[원유헌의 전원일기](4)만드느니 수입해 파는 게 남는 장사라는 예초기 그래서 우리 들녘은 ‘일제 예초기’들이 다듬는 중이다

댓글 1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예초기와 ‘노재팬’

경향신문

필자가 밤나무 아래 풀을 예초기로 베는 작업을 하고 있다. 농부에게 예초기란 학생의 볼펜, 군인의 총에 버금간다. 나도 귀농하자마자 가장 먼저 구입한 농기계가 예초기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귀농 때 주변에선 일제히 ‘일제’ 예초기를 권했다

국산은? “못 써!”…국산도 일본 부품 가져다 조립한 거란다

그러니 농기계 수리점이 ‘노저팬’ 하기는 힘든 법

예초기 수리해 제초하는 내게 장씨 아저씨가 한마디 건넨다

“힘 빼고 해, 힘주면 힘들어” 힘 뺄 건 작업인지, 인생인지…

이참에 힘 안 들이고 풀 베는 국산 예초기 좀 나왔으면


해질 녘 농장에 두 여인이 있었다. 한 손에는 들깨 모를 들고 또 한 손에는 호미를 쥐고 있었다. 그들은 허리를 숙인 채 고개만 돌려서 농장에 들어선 나를 쳐다봤다. 천천히 상체를 세우고는 ‘웬일이냐’는 듯 바라봤다. 약간은 놀라는 눈치였고 황당하다는 눈빛도 있었다. 사실은 내가 더 당황스러웠다. 내가 책임자로 근무하는 이 농장의 등기부등본상 주인은 아내지만, 그들은 내 아내도 아니었고 소실을 둔 적도 없다. 잠시 후 서로 안면을 인식한 뒤에는 엇나간 대화가 이어졌다.

“아니 할머니 지금 여기서 뭐 하시는 거예요?”

“땅속은 그나마 촉촉허요. 들깨는 옮길 때 침만 발라도 잘 산다고는 하는디….”

“저 몰래 농장에 안 오시기로 했잖아요!”

“뿌래기가 상한 것들은 심으믄 못 쓰겄네요. 푹 고꾸라져요.”

간전댁 할머니는 시선을 피하지도 않고 당당하게 딴소리를 하셨다. 할머니보다 멀찌감치 있던 S누님을 상대하기로 했다. 그는 농민의 장녀로 태어나 50년 넘게 농사와 무관하게 살아온 직업작가이다. 최근 서울 생활을 접고 내려와 다시 고향 아파트에 정착했고, 부모님으로부터 “손에 흙 좀 묻혀 볼래?” 같은 제안 한 번 안 받고 살아온 분이다. 그 누님이 손에 들깨를 들고 서서 모기에게 뜯기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누님?”

“할머니 모시러 왔다가 마저 옮기고 가자 그러셔서.”

“말씀이라도 해 주시지 누님까지 이러고 계시면 어쩐대요 그래?”

“원샌이 병원에 며칠 더 있게 됐다고 하니까 할머니가 맘이 급하셨나 봐요. 엄마가 모셔오래서 왔다가 이렇게 됐네요. 근데 몸은 괜찮은 거예요?”

건강검진을 받기 위해 서울 한 병원에 올라갔다가 검사가 추가돼 하루 더 있으라는 말을 들었고, 병원에서 통화했던 마을의 한 동생이 내용을 전하다가 몸집이 부풀어서 “원샌 몸이 많이 안 좋대”로 전개된 모양이었다.

누님 먼저 가시라고 하고, 할머니는 빨리 트럭에 타시라고 소리지르며 다가가니 그제서야 허리를 세우셨다. 순간 숨과 걸음이 멎었다. 할머니는 하얀 시스루 티셔츠 차림이었다. 상체를 살짝 제치면서 노브라 상태가 확인됐고 게다가 땀에 젖은 모습은 어우야…. 재빨리 뒤로 가서 할머니를 밀며 트럭으로 모셨다.

“힘드신데 혼자 오셔서 이러시면 어떡해요.”

“이깟 들깨모 옮기는 게 뭐이가 힘들어요. 선재 아빠 밭 맹그니냐고 괭이질 허고 논에 댕기는 게 힘들지다.”

“그거야 제 일이니까 제가 하는 게 당연하지만 할머니가 여기서 이러시면 안되죠!”

“힘 안 들어요. 힘으로 할 일이 아닌디요.”

할머니를 모셔드리고 와서 아직 밝기 남은 노을에 한 시간은 여유가 있을 것 같아 감나무밭 풀을 예초기로 베기 시작했다. 한 30분 했을까. 느낌이 이상해서 예초기를 풀어내리고 보니 몸통에서 기름이 흘렀다. 수리점에 가자니 늦었고, 기계 좀 잘 아는 친구에게 고장 원인이나 물어보려고 스마트폰을 꺼냈다. 사진을 찍으려고 앱을 켜다가 소스라쳤다. 카메라가 셀카 모드로 돼 있었다. 얼른 화면을 돌리고 한 장 찍어서 친구에게 보내고 답을 기다렸다.

이가 아팠다. 속도를 낸답시고 몸에 힘이 들어간 탓이다. 예초기 날은 엔진이 돌리고 나는 작업대만 붙잡으면 되는데 어쩐다고 어금니까지 꽉 물고 덤비는지 모르겠다. 잠시 후 답장이 왔다.

“나도 몰라. 쉬어. 예초기도 무리했나 보네.”

다음날 일찌감치 농기계 수리점을 향했다. 구례읍내 곳곳에 일본제품 불매운동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누구는 ‘독립운동은 못했어도 불매운동은 한다’는 문구를 볼 때마다 가슴이 울컥한다고 했다. 독립운동 비슷한 걸 자신이 하고 있다는 생각에 맘이 뜨거워진단다. 내 생각에 불매운동은 독립운동과 같은 듯 다르다. 안중근, 유관순 선배들도 이 시국에 살았다면 불매운동을 택했을 것 같긴 하지만, 잡혀가거나 고문당할 걱정이 없다는 점은 많이 다르다. 어쨌든, 이런 시대에 내 예초기는 일본제품이다.

귀농 초기 어떤 예초기를 사야 좋을지 자문을 구해보니 언급하는 브랜드는 일제히 ‘일제’였다. 국산은 괜찮은 게 없냐고 물으면 똑같이 대답했다. “못 써!” 국산 예초기도 일본 부품을 들여와 조립만 하는 것이라고 했고, 같은 부품을 똑같이 조립해도 국산은 고장이 잦아 못 쓴다는 얘기도 했다. 선택지에 국산은 아예 없었다. 농기계 수리점 사장님에 따르면, 1년에 한 번 벌초하는 예초기는 몰라도 농사를 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소유한 예초기는 99% 일본제품이다.

경향신문

구례 읍내에 일본 제품 불매운동 플래카드가 내걸려 있다. 태극기와 함께 어우러져 3·1 만세운동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자동차와 반도체 강국이라면서 예초기 하나 제대로 못 만드는 게 이상했다. 얼마간 알아본 결과 이유는 의외로 간단했다. 이윤이 남지 않기 때문이다. 연구·개발 후 이익을 실현하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리고 수입해서 파는 것이 훨씬 수월하니 만들 이유가 없다는 판단이다. 장사만 된다면 동네 구멍가게와도 전투를 불사하지만 명분보다는 실리를 추구한다는 깔끔한 명제로 살아온 대기업의 관심 품목에 작고 복잡한 예초기 같은 기계는 없다.

예초기를 무시하면 안되는 이유가 있다. 역사적으로 가사노동의 질적 변화를 가져온 게 세탁기라면, 어중이떠중이에게까지 ‘농사나 지어볼까’ 하는 생각을 허락한 것이 바로 예초기다. 저 푸른 초원 위 풀들을 낫으로 베는 시대였다면 나도 아직 특별시민으로 살고 있을지 모르겠다. 어쨌든 농부에게 예초기란 학생의 볼펜, 군인의 총에 버금간다. 나도 귀농하자마자 가장 먼저 구입한 농기계가 예초기다.

벌초 인구는 빼더라도, 150만 농가에 예초기 1~2대씩은 다 있다. 대당 가격이 40만원 내외이니 1조원 가까운 돈을 주고 산 일본제품이 들녘을 다듬는 중이다. 제품마다 차이는 있을지언정, 전동톱부터 트랙터까지 일본 제품이 농기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실로 크다. 농기계 수리점이 “일본제품은 수리하지 않습니다” 플래카드 붙일 일은 절대 없다. ‘안 먹고 안 사고’는 대신 먹고 대신 살 게 있을 때 통하는 얘기지 농업에서는 그게 힘들다.

“사장님 너무 땡기셨어.”

예초기 엔진을 무리하게 돌렸다는 수리점 사장님 말씀이다.

“뭔 일을 그렇게 세게 하셨데요? 천천히 하시지. 힘 빼고 하셔요.”

와. 사장은 기계 상태만 보고도 운전할 때의 내 상태를 알아보는 내공이 있었다. 내공이 쓰여서 그런가 수리비도 세게 나왔다. 수리비가 제품값을 넘어선 지 오래다.

농장으로 돌아와 일시 정지했던 풀밭 제초작업을 재개했다. 풀을 깎을 때마다 고민이 된다. 씨를 말려 죽일 각오로 바짝 깎을지, 아니면 밑동에 여유를 두고 자르되 여러 번 깎을지 선택한다. “매 한 번보다 설렁 두 번이 낫다”는 말이 있다. 잡초를 맬 때 너무 잘하려고 하는 것보다 호미로 슥슥 긁어 주듯이 하고 대신 자주 하는 게 낫다는 뜻이다. 맞는 얘기다. 예초기로 풀을 바짝 깎다 보면 돌도 많이 튀고 날도 쉽게 휘어져 작업 효율이 떨어진다. 뻔한 결론에도 고민하는 이유는 대부분 ‘설렁 두 번’을 선택해놓고 정작 두 번째 설렁을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옳은 말씀이 나의 문제를 해결해 주진 못한다.

잠시 앉아서 쉬는데 장씨 아저씨가 농장으로 들어오셨다. 아저씨에 대한 설명을 하자면, 8년 전 농사를 짓기 시작할 때부터 지도와 참견을 아끼지 않아 온 분으로 아저씨 뜻과 관계 없이 내가 멘토로 지정한 어르신이다. 모르는 게 있으면 시도 때도 없이 전화해서 여쭤보고, 부족한 게 있으면 아저씨 하우스로 가서 일단 갖다 쓴 후 말씀드리기도 한다. 나이 차이로 볼 때 ‘아버님’이라고 불러도 무방하지만 아저씨 동생분을 형님이라고 부르는 탓에 애매한 관계가 될 것을 우려해 ‘아저씨’로 선택하셨다.

농사를 짓다가 어떤 시도를 해보려고 할 때, 많은 사람들이 ‘뻘짓’으로 평가하는 일도 아저씨는 “그래? 그럼 해 봐”라는 일관된 지지와 격려로 응원을 해주셨다. 아저씨의 ‘해 봐’라는 말씀에는 ‘①그렇게 하면 어찌 될지 당신도 궁금하다 ②그렇게 한다고 큰 일 나진 않을 것 같다 ③그렇게 했다가 망하면 당신 것을 나눠주겠다’ 하는 의미도 있어서 내겐 큰 힘이 되곤 했다.

장씨 아저씨는 특유의 철학과 논리로 몇 가지 어록을 남기신 게 있다.

“가장이 왜 가장인 줄 아는가? 가장 힘들어서 가장인 거여.”

“일을 미루고 미루다 안 하고 넘어가면 그게 젤루 잘하는 거여.”

그중에서도 2012년 태풍 볼라벤을 앞두고 아저씨와 나눴던 대화는 매년 몇 차례씩 만나는 태풍의 위협에 대처하는 자세를 잡아줬다.

“아저씨, 태풍이 올라온다는데요?”

“그라믄 태풍이 올라오지 내려가겄는가.”

“감이랑 밤이랑 다 떨어질까 봐 걱정돼서요.”

“감나무 가지 좀 뿌라지고 밤나무도 좀 뽑히고 그러니까 태풍이지 아님 걍 바람이제.”

이후에도 장씨 아저씨는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의지할 수 있는 키다리아저씨였다.

“몸은 괜찮은가?”

예초기를 내리고 손수건 접은 두건과 모자를 벗어 땀을 닦으면서 아저씨께 인사를 드렸다. 아저씨도 부풀린 소문을 들으셨나 보다. 아주머니는 올가을에 허리 재수술 일정이 잡힌 모양이었다. 비닐하우스에서 호박 재배를 하시느라 연중 여름 한 달 남짓 쉬는 기간에 여러 가지 일정을 몰아서 세우시는 듯하다. 아저씨는 점심 약속이 있다며 돌아서셨다.

“온다던 태풍이 약해졌나 보더만.”

“예, 비만 많이 내릴 거래요. 힘이 빠졌나봐요.”

“다행이네. 자네도 힘 빼고 해. 힘 주면 힘들어.”

애매했다. 예초기 작업할 때 힘을 빼라는 건지, 살면서 힘 빼고 살라는 말씀인지. 어쨌든 힘 들어가서 좋은 건 없다. 몸의 이완이 가장 강한 상태라는 연구 결과도 있다. 일본제품 불매운동도 목소리 높이고 힘줘 떠들 게 아니라, 편안한 마음으로 으레 그랬던 것처럼 낮은 곳에서 길게 가면 좋겠다. 그렇게 가는 것 같아 멋있다. 그리고 힘 안 들이고 풀 베는 기똥찬 국산 예초기 좀 빨리 나오면 참 좋겠다.

▶필자 원유헌

경향신문

1967년생. 44년간 서울에서 살다가 2011년 연고가 전혀 없는 전남 구례로 내려가 농부입네 살고 있다. 농사만으로는 먹고살기 힘들어 각종 아르바이트로 현찰을 보충하며 연명한다. 2018년 <힘들어도 괴롭진 않아>(르네상스)라는 책을 만들기도 했으나 8년째 나아진 건 없다. 웬만하면 그러려니 하며 산다.


원유헌

최신 뉴스두고 두고 읽는 뉴스인기 무료만화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