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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9 (화)

폐가나 다름없는 그곳···불난 전주 여인숙에 '유령' 10명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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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시청 코앞…불난 여인숙 가보니

'달방' 살며 폐지 줍던 70~80대 숨져

10명 주소 등록…위장 전입 여부 논란

중앙일보

19일 오전 4시쯤 전북 전주시 서노송동의 한 여인숙에서 불이 나 소방 당국이 진화 작업을 하고 있다. 이 불로 이곳에서 잠자던 70~80대 노인 3명이 숨졌다. [사진 전주 완산소방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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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다가 (오전 4시 조금 넘어) '펑' '펑' 소리가 크게 나 놀라서 (집 밖에) 나왔다. (전주)시청에서 축포 쏘는 연습하는 줄 알았다."

19일 오전 전북 전주시 서노송동 한 여인숙. 나무와 콘크리트로 지어진 단층짜리 건물 전체가 시커멓게 그을렸다. 폴리스라인이 쳐진 여인숙 마당과 옆 골목에는 검게 타버린 고철과 폐지 더미가 곳곳에 쌓여 있었다. 이날 오전 4시쯤 여인숙에서 불이 나 이곳에서 잠자던 70~80대 남녀 3명이 숨졌다. 이들은 여인숙에 살며 폐지·고철 등을 팔아 생계를 꾸려온 노인들이었다.

옆집에 사는 정모(80)씨는 "처음엔 불꽃이 안 보이더니 4시 10분쯤 되니 연기와 불꽃이 치솟았다"며 이같이 말했다. 정씨는 "(숨진 노인들은) 폐지를 주우러 다니며 어렵게 살았다. 우리 집 앞 쓰레기도 치워줘 고마운 마음에 음식을 해서 나눠주기도 했다. 불쌍해 죽겠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다른 집에 불이 안 옮겨붙어 천만다행"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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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전북 전주시 서노송동의 한 여인숙에서 불길을 잡은 소방관들이 정밀 감식을 하고 있다. 이날 오전 4시쯤 이곳에서 불이 나 이곳에서 잠자던 70~80대 노인 3명이 숨졌다. 김준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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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완산소방서에 따르면 신고를 받고 4분 만에 현장에 도착한 소방 당국은 2시간 만인 오전 6시 5분쯤 불길을 잡았다. 이 불로 여인숙 건물(72.94㎡)이 모두 타 일부가 무너져내렸다.

객실에서는 불에 탄 시신 3구가 발견됐다. 남성 1명과 여성 2명이다. 방 3개에서 각각 숨졌다. 여인숙 관리인 여성 김모(83)씨와 남성 투숙객 태모(76)씨 신원은 확인됐으나, 나머지 여성 1명의 인적 사항은 밝혀지지 않았다. 80대 여성으로 추정되는데, 경찰은 신원 확인을 위해 지문을 채취했다. 경찰과 소방 당국은 굴착기 2대와 인명구조견 등을 이용해 건물 잔해를 뒤졌지만, 추가 희생자는 없었다.

도대체 이 여인숙은 어떤 곳이었으며, 어떤 사람들이 살았을까. 주민들은 "불이 난 여인숙은 간판만 있을 뿐 폐가나 다름없었다"고 입을 모았다.

해당 여인숙은 전주시청 청사와 직선 거리로 20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지난 1972년 4월 지어졌다. 본채와 객실 11개로 이뤄졌다. 방 하나가 6.6㎡(2평) 크기로 말 그대로 '쪽방'이다. 건물이 48년이나 돼 투숙객이 거의 끊겼다고 한다. 해당 여인숙은 애초 숙박업으로 신고됐지만, 건축물관리대장에는 '주택'으로 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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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오전 4시쯤 전북 전주시 서노송동 한 여인숙에서 불이 나 3명이 숨졌다. 소방관들이 굴착기를 이용해 추가 피해자가 있는지 수색하고 있다.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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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들에 따르면 숨진 노인들은 '달방' 형태로 여인숙에 살았다. 달방은 여관 등에서 한 달치 숙박비를 내고 투숙하는 방을 말한다. 주로 일용직 노동자나 수입이 적은 노인 등 저소득층이 이용한다.

여인숙 관리인 김씨는 40여 년 전 충남에서 전주로 넘어 와 여인숙 등에서 일했다고 한다. 10여 년 전 원주인이 숨지자 유족 부탁으로 여인숙을 관리해 온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지난 14일 팔복동의 한 임대아파트로 주소지를 옮겼으나, 이날 여인숙에서 자다 화마를 피하지 못했다. 김씨와 가깝게 지냈다는 한 주민은 "천성이 착해 법 없이도 살 사람인데 너무 안타깝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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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오전 4시쯤 전북 전주시 서노송동의 한 여인숙에서 불이 나 소방 당국이 진화 작업을 하고 있다. 이 불로 이곳에서 잠자던 70~80대 노인 3명이 숨졌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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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씨는 3~4년 전부터 해당 여인숙에 머문 것으로 알려졌다. 한 주민은 "할아버지(태씨)가 여인숙에 오면서 관리인 김씨도 폐지 줍는 일을 했다"며 "여인숙 마당과 골목에 고철과 폐지 등을 잔뜩 쌓아 놔 통행이 어려울 정도였다"고 말했다.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여성은 '진안댁'으로 불렸다. 석 달 전쯤 여인숙에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들이 살던 여인숙은 주택가에 자리했지만, 주민들과는 왕래가 뜸했다고 한다. 화재 소식을 듣고 현장에 나온 김윤철 전주시의원(노송·풍남·인후3동)은 "폐지를 주우러 나가 집은 대부분 잠겨 있었고, 주민들과도 거의 단절된 상태였다"고 했다. 그는 "건물이 오래되고 낡아 거주 공간으로는 마땅치 않았다"며 "악취가 심하고, 들고양이가 들끓었다"고 했다. 전주시에서는 해당 여인숙을 철거해 공용주차장 등으로 쓰려고 건물주에게 수차례 연락했으나 허사였다고 한다.

전주 완산소방서에 따르면 해당 여인숙은 소방시설물 정기 점검 대상도 아니다. 다중이용업소가 아닌 데다 연면적 기준 400㎡가 안 돼서다.

"숨진 노인 3명 말고는 사람이 살지 않았다"는 주민들 설명과 달리 전주시는 "해당 여인숙에는 현재 10세대가 거주하는 것으로 나온다"고 밝혔다. "지난 2004년부터 올해까지 10명이 전입 신고를 했다"는 것이다.

노송동주민센터가 올 상반기에 사실 조사를 한 결과 통장이 '전입 신고한 10세대 모두 실제 거주한다'고 확인해 줬다고 한다. 하지만 김 의원은 "전입 신고자 10명 모두가 여인숙에 살고 있지 않은 것으로 안다. 위장 전입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정작 이날 화재로 숨진 노인 3명의 주소지는 여인숙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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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오전 4시쯤 전북 전주시 서노송동의 한 여인숙에서 불이 나 소방 당국이 진화 작업을 하고 있다. 이 불로 이곳에서 잠자던 70~80대 노인 3명이 숨졌다. [사진 전주 완산소방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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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입 신고는 행정안전부 포털 '정부24' 등을 통해 신고자의 인적 사항과 옮길 주소지만 확인되면 온라인 처리가 가능하다고 한다. 전주시 관계자는 "행정에서 일일이 현장에 나가 확인할 수 없어 전입 신고 이후 통장이 '옮긴 주소지에 전입 신고자가 산다'고 하면 그대로 믿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 때문에 "행정이 방치한 건물에 형편이 어려운 노인 3명이 머물다 변을 당했고, 전입 신고자 10명은 이런 사각지대를 악용해 '유령 주민' 행세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해당 여인숙에는 LP가스 통 하나가 설치돼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객실 안에는 부탄가스 통이 무더기로 발견됐다. 주민들은 "(숨진 노인들이) 방 안에서 휴대용 버너를 이용해 음식을 해먹었다"고 했다. 발화 지점은 확인되지 않았다.

경찰은 방화 가능성은 낮게 봤다. 주변 폐쇄회로TV(CCTV) 확인 결과 화재 전후로 여인숙에 드나든 사람이 없어서다. 경찰과 소방 당국은 부탄가스 더미에서 불이 났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정확한 화재 원인을 조사하고 있다.

전주=김준희 기자 kim.junh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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