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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무력진압 겁 안나” 홍콩 시민 170만 명 평화집회로 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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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센 빗줄기에도 71일째 시위 이어가… 물 흐르듯이 사방으로 흩어져

“미래 위한 일” 아이와 동행… “의문의 남성 진입” 中개입설 돌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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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시민들이 18일 송환법 반대 집회가 열린 빅토리아 공원을 가득 메웠다. 김광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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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무력진압이요? 겁나지 않아요. 오히려 시위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것이니까요.”

18일 오후 홍콩 도심 빅토리아 공원. 범죄인 인도법(송환법) 반대 집회에 남편, 아들과 함께 참가한 황(黃ㆍ35)씨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중국의 위협을 걱정했다면 애당초 가족이 다 함께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라며 “아이의 미래를 위해서도 그건 어른이 할 노릇이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엄마가 한창 이야기를 하는 동안 옆에서 말똥말똥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초등학생 아들은 갑자기 기자를 향해 “캐리 람(林鄭月娥ㆍ홍콩 행정장관) 물러나라”고 소리를 쳤다. ‘아이가 이렇게 말하는 게 걱정되지 않느냐’고 묻자 엄마는 “친구들끼리, 또 학교에서도 현재 상황을 주제로 토론을 자주 한다”고 말했다.

이날 시위는 중국이 홍콩에서 10분 거리인 광둥(廣東)성 선전(深圳)에 무장병력을 집결한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진행됐다. 지난 6월 9일 100만명, 같은 달 16일 200만명에 이어 당초 주최 측은 300만명이 모이는 대규모 집회를 공언했다. 시민들은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궂은 날씨 속에서도 약 10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빅토리아 공원 축구장을 빼곡히 채우고 주변 도로와 500m 가량 떨어진 소고 백화점까지 코즈웨이 베이 일대 곳곳으로 모여들어 진을 치며 시위에 동참했다. 민간인권진선과 현지 언론을 종합하면, 집회현장 밖 시민들까지 포함해 이날 시위에 참여한 홍콩 시민은 최소 30만명, 최대 170만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됐다.

시위대의 의도는 적중했다. 주최 측은 집회에 앞서 “경찰 요구대로 물 흐르듯 집회를 열겠다”면서 “공원과 주변 지역을 인파로 메워서 폭발해 터지게 만들자”고 호소했다. 평화적 집회로 세를 과시한 뒤, 물처럼 사방으로 흩어져 요구사항을 줄기차게 주장하자는 의미다. 시위대는 기존과 달리 경찰과 충돌을 피하며 이성적이고 비폭력적인 집회와 행진을 이어갔다. 앞서 수 차례 대규모 시위 당시 공원에서 집회를 마치고 4㎞ 가량 인파 행렬이 장시간 도심을 행진하다 폭력으로 비화돼 경찰의 무력진압에 빌미를 제공했던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겼다. 더구나 홍콩 코앞에서 무력시위 중인 중국 군에 자칫 무력진압 핑계를 줄 폭력상황을 피하기 위해 시위 지도부는 시종일관 평화로운 집회를 주장했다.

홍콩 사태는 이날 집회로 71일째를 맞았다. 2014년 9월 28일부터 79일간 행정장관 직선제를 요구하며 도심을 점거했던 ‘우산혁명’의 기록을 깨는 건 시간문제다. 이처럼 시위가 장기화하면서 시민들이 느낄 피로감이 궁금했다. 실제 일부 시민은 휴대폰의 구글 위치추적 기능을 끄고 공원으로 왔다고 한다. 나중에 혹시나 경찰 조사를 받게 되면 휴대폰부터 뒤져 꼬투리를 잡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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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민주화 집회 현장에서 18일 만난 세 자매. 팔에 모두 '광복 홍콩, 시대 혁명'이라고 쓰인 스티커를 붙였다. 김광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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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홍콩 시민들이 위축되어 있으리란 예상은 기우였다. 푸(傅ㆍ25)씨는 “우리의 요구에 응답하지 않으면 시위를 계속할 것”이라며 “중국의 무력동원보다 더 무서운 건 경찰의 폭력대응”이라고 말했다. 23살, 17살 두 동생을 포함한 세 자매는 모두 왼쪽 팔에 ‘광복 홍콩, 시대 혁명’이라고 새겨진 스티커를 붙이고 있었다. 그는 “지난 시위에는 8살 막내 동생까지 나왔다”면서 “정부가 시민들의 목소리를 제대로 듣고, 사회가 오픈되고 공정하게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시위대는 △송환법 철폐 △체포자 석방 △폭도 명칭 철회 △독립조사기구 설립 △보통선거 실시 등 5가지를 요구조건으로 내걸고 있다.

집회 30분전쯤 한 청년이 중국 국기인 오성홍기를 치켜들면서 시선이 쏠렸다. 그는 “중국 본토에서 왔다”며 “나는 중국을 사랑한다”고 외쳤다. 이에 시민들이 몰려들어 한때 소란이 일었다. 일부 시위 참가자는 그가 맨 가방에 ‘제정신이냐’고 적힌 종이를 매달았다. 일부 시민들은 ‘캐리 람 퇴진, 송환법 철폐’라고 적힌 부적 모양의 노란색 스티커를 각자의 등에 자발적으로 붙였다. 귀신을 내쫓듯 홍콩 정부의 만행을 앞장서 규탄하겠다는 취지다. 시위를 주도한 지미 샴 민진 의장은 연단에 올라 “경찰이 건달들과 손잡고 시민들을 공격하는 것을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일각에선 정체불명의 남성들이 중국으로부터 넘어왔으며 이들이 홍콩시위에 무력 대응한다는 의혹이 일기도 했다.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은 흰옷을 입은 남성 수십명이 선전에서 홍콩으로 입경했다고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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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왔다는 한 청년이 18일 송환법 반대 집회가 열린 빅토리아 공원에서 오성홍기를 들고 있다가 시민들과 언쟁을 하고 있다. 김광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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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회가 시작된 지 한 시간쯤 지나자 빗줄기가 쏟아졌다. 이에 우산을 쓴 시민들은 ‘홍콩에 자유를, 민주주의는 즉시’라고 구호를 외치며 거리로 나갔다. 반대로 밖에서 집회 현장에 들어오지 못하던 시민들은 공원 안으로 진입하며 양방향 도로를 시민들이 점령했다. 순식간에 홍콩 중심가는 ‘우산의 바다’를 이뤘다. 지켜보던 경찰은 불어난 인파에 어쩔 수 없이 주변 도로까지 시민들이 오가는 건 허용하며 한발 물러섰다.

그렇다고 예전 같은 가두시위는 아니었다. 너무 인파가 불어 지하철이 빅토리아 공원 주변 역을 모두 정차하지 않고 지나치는 바람에 집으로 향하는 시민들은 서쪽으로 3㎞ 떨어진 센트럴, 동쪽으로는 2㎞ 거리 노스포인트 역까지 한참을 걸어가야 했다. 예고대로 물처럼 사방으로 흩어진 셈이다. 다만 이 과정에서 극히 일부 참가자들만 영국 국기를 흔들거나‘폭력 반대, 보통선거 실시’가 적힌 대형 플래카드를 꺼냈을 뿐 대부분은 조용히 우산을 받쳐들고 삼삼오오 묵묵히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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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홍콩 빅토리아 공원에서 집회를 마친 시위대가 도심을 관통하는 헤네시 로드를 행진하며 '폭력과 혼란은 그만, 유일한 해법은 보통선거'라는 대형 플래카드를 들고 거리를 행진하고 있다. 하지만 일부 시민들만 이런 식으로 의사를 표현했을 뿐, 대부분 시민들은 빗속에 우산을 든 채 조용히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김광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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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과정에서 빗길로 미끄러운 데다 시위대가 양쪽으로 몰리면서 곳곳에 다치고 쓰러져 응급처치를 받는 경우가 발생했다. 민주화를 갈망하는 집회 연설과 시민들의 구호, 거기에 앰뷸런스 사이렌 소리까지 뒤섞이면서 빗줄기와 먹구름으로 시커멓게 변한 빅토리아 공원 일대는 밤늦게까지 소란스러운 상황이 지속됐다. 당초 집회가 시작된 빅토리아 공원의 스피커는 자정까지도 꺼지지 않았다.

시위대는 19일 오전 출근길에 도심 지하철역 곳곳에서 다시 투쟁에 나설 예정이다. 명칭은 ‘전동차 청소’로 잡았다. 최근 경찰이 야외가 아닌 객차 안에서 최루탄을 쏜 것에 반발하는 의미다. 아직 남아있는 최루가스를 깨끗하게 치운다는 취지이지만, 이로 인해 열차 운행이 지체되면서 또다시 출근 대란이 벌어질 전망이다.

홍콩=김광수 특파원 rollings@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