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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세계포럼] ‘컨틴전시 플랜’은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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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미사일 도발 눈감는 트럼프 / ‘통미봉남’ 노골화하는 김정은 / 북·미간 직거래 방치하면 안돼 / 위기의식 갖고 국익 지켜내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지상과제는 내년 대선에서 재선에 성공하는 것이다. 표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다. 재선 가도에서 내세울 치적이 필요하다. 친이스라엘 노선, 중국과의 무역전쟁, 북핵 문제가 후보군에 든다. 북한과의 비핵화 협상은 트럼프가 자신의 업적이라고 여기는 데다 버락 오바마 전 미 대통령과의 차별성을 부각하기에도 좋은 이슈다. 내년 본격적인 대선 레이스에 들어가기 전에 북핵 문제를 진전시키거나 최소한 북한이 대화 궤도에서 이탈하는 걸 막기 위해 상황 관리에 주력할 것이다.

트럼프가 북한의 잇단 미사일 도발에도 “단거리 미사일은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하는 것은 국내 정치를 의식한 측면이 크다. 북한과의 비핵화 협상을 재개하기 위해 미국 본토까지 날아올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이 아니면 문제 삼지 않겠다는 뜻이다.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최근 “북·미 정상 사이에 ICBM을 발사하지 않는다는 합의가 있다”고 했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연초 북·미 협상과 관련해 “궁극적으로 미국 국민의 안전이 목표”라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국제정치의 냉엄한 현실이다.

세계일보

원재연 논설위원


우리는 미국과는 사정이 다르다. 북한 단거리 탄도미사일은 남한 전역을 사정권에 둔다. 성능도 날로 개선되고 있다. 우리에게는 직접적인 위협이다. 북한은 최근 보름 남짓한 기간 사흘에 한 번꼴로 미사일을 발사했다. 청와대를 향해 ‘겁 먹은 개’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등 입에 담지 못할 막말도 해댔다. 그런데도 정부는 항의나 경고를 하기는커녕 엉뚱한 소리를 한다. 청와대 핵심관계자는 “한·미 연합훈련이 끝나면 북·미 실무협상을 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라는 뜬금없는 해석을 내놓았다. 북한의 미사일 도발을 두고 “비핵화의 전조”라는 장관급 인사의 발언에는 실소를 금할 수 없다.

북한과의 대화 동력을 살려나가려는 정부의 고민을 모르지는 않는다. 잘못을 따지면 북한이 반발할 것이고 어렵게 조성된 한반도 화해 무드에 찬물을 끼얹는 결과로 이어질 것을 우려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해야 할 말조차 하지 않는다면 북한에 잘못된 신호를 줄 뿐이다. 대화를 위해 유연한 자세를 보이는 것과 북한에 끌려다니는 건 엄연히 다르다. 더욱이 북한이 ‘통미봉남(通美封南)’ 전략을 노골화하는 마당이다. 북한은 미국에는 김정은 국무위원장 친서를 통해 한·미 연합훈련 종료 후 협상에 나설 뜻을 밝히면서도 남한에는 “(한·미) 군사연습에 대해 해명하기 전에는 접촉 자체가 어렵다”고 했다.

트럼프는 동맹의 안전은 외면하면서 ‘안보 청구서’를 내민다.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증액 압박과 호르무즈해협 파병 요청에 중국을 겨냥한 중거리 미사일 배치까지 거론되는 상황이다. 동맹관계마저 경제적 관점에서 보는 게 트럼프다. 안보 참여의 대가로 동맹국들로부터 더 많은 돈을 받아야 한다는 게 트럼프의 논리다. ‘한국에서 방위비 분담금을 받아내는 게 아파트 월세 받는 것보다 쉬웠다’는 무례한 말도 스스럼없이 한다. 한·미동맹의 상징인 한·미 연합훈련에 대해서도 “터무니없고 값비싼 훈련”이라며 북한 입장에 동조하는 듯이 말했다. 앞으로 우리가 져야 할 외교적 부담은 더 커질 것이다.

미국 대선이 가까워질수록 가시적인 비핵화 성과를 내야 한다는 트럼프의 조바심은 더욱 강해질 것이다. 적당한 선에서 김정은 정권과 직거래에 나서려는 유혹을 느낄 수 있다. 트럼프가 북·미 협상을 그럴듯하게 포장해 외교적 성과로 내세울 수 있는 것이다. 김정은이 이를 모를 리 없다. 북한이 우리를 밀어내고 미국을 상대하려는 움직임을 본격화하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북·미 비핵화 협상 과정에서 당사자인 우리가 소외될 수 있는 것이다. 트럼프와 김정은이 적당한 합의로 실익을 챙기고 우리는 안보청구서를 받아드는 일은 막아야 한다. 일본과 경제전쟁을 벌이는 마당에 코리아 패싱까지 걱정해야 하는 처지다. 정부는 이제라도 위기의식을 갖고 ‘컨틴전시 플랜(비상계획)’을 짜야 할 것이다. 그 일은 북한에 우선순위를 둔 기존 외교안보정책을 재고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원재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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