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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김동호의 시시각각] 축구와 다른 한·일 경제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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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는 스타 한두 명에 좌우

기술은 노벨상 23:0의 전력차

반시장 정책 풀어야 격차 좁혀

중앙일보

김동호 논설위원


올해 U20 월드컵 16강전에서 한국은 당찬 신예 스타들의 활약으로 일본을 납작코로 만들었다. 더구나 우리 선수들은 준우승까지 올랐다. 하지만 그 사실보다 일본에 이겼다는 기억이 더 강한 건 왜일까. 영원한 숙적 일본이기 때문이다. 뭐든 일본과 맞붙으면 우린 힘이 난다. 국민을 한마음으로 만든다. 새벽잠을 쫓으며 보는 게 한·일전이다.

하지만 경제는 다르다. “다시는 지지 않겠다”는 ‘레토릭’만으로는 되는 게 아니다. 출중한 스타 한둘 있고 감독이 작전 제대로 세워 운까지 따르면 이기는 스포츠와 경제는 전혀 다른 세계라서다. 우선 객관적 전력이다. 가늠자는 노벨상이다. 평화상·문학상을 빼면 일본은 과학 분야 노벨상이 23개에 달한다. 첫 노벨상은 1868년 메이지유신을 통해 근대 과학 문명을 받아들인 지 69년 만인 1949년 받았다. 지금은 그로부터 70년이 더 흘렀다. 첫 노벨상을 기준으로 보면 선진 과학 축적의 격차는 139년에 달한다. 이에 비해 한국은 과학에선 노벨상 후보에도 거론되지 않는 게 현실이다.

경제의 외형은 그럴 듯해 보인다. 1인당 국민소득은 3만 달러를 넘었고 삼성전자·현대자동차 같은 글로벌 기업도 여럿 있다. 하지만 속을 들춰보면 어떤가. 반도체·스마트폰을 비롯한 주력산업에 필요한 소부장(소재·부품·장비)의 상당 부분은 일본·미국·네덜란드 같은 기술 선진국에서 들여온다. 비교우위에 따른 분업체제(글로벌 밸류 체인)의 자연스러운 결과다.

우리의 빈틈은 여기에 있었다. 일본이 화해치유재단 해산과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 따른 외교적 불만을 경제 보복으로 돌리면서 소부장은 한국을 찌르는 급소가 됐다. 왜 급소인지는 한·일 국교정상화 이후 지난해까지 54년간 누적된 대일 무역적자 6046억 달러(약 708조원)가 대변한다. 왜 그렇게 됐나. 한국 기업들은 기술도 취약했지만 ‘규모의 경제’에 따라 거의 모든 산업에 걸쳐 일본이 만들어낸 소부장을 사들이는 게 훨씬 이득이었다. 정부가 소부장 육성에 나서고 있지만, 현장에서 시큰둥한 반응이 나오는 이유다. 그걸 개발하기도 어렵지만 개발해봐야 국내 기업 외에는 딱히 팔 곳이 없다는 얘기다.

이런 현실에서 축구 한·일전 응원하듯 “쫄지 마라”면서 ‘의병’ ‘죽창’이란 반일(反日) 선동을 부추기는 건 손흥민·이강인 선수에 맞서 동네축구 아재들이 팔 걷어붙이고 돌진하라는 격이다. 정부가 ‘앞으로 돌격하라’니 기업들도 뛰고는 있지만 울며 겨자 먹기가 아닐까 싶다. 삼성전자가 중국·대만 업체로부터 불화수소를 수입해 테스트하고 있지만, 소수점 이하 일레븐 나인(9가 11개) 이상의 고순도가 나올지는 미지수다. 이런 특화 제품은 유명음식점 비결처럼 누구나 알 수 있는 게 아니라서다.

정부가 진정으로 일본을 이기고 싶다면 기업에도 손흥민·이강인 같은 스타 선수들이 쏟아져 뛸 수 있는 환경부터 만들어줘야 한다. 이런 점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일본에 감정적 대응보다 근본적 대책까지 생각하는 긴 호흡을 가져야 한다”고 밝힌 것은 바람직하다. 반면에 “우리한테 진짜 영향을 미치는 (일본의) 전략물자는 ‘손 한 줌’ 된다”고 한 김현종 국가안보실 2차장의 발언은 냉철한 인식의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정부는 호기롭게 소부장 100대 기술을 키워 일본 제품을 대체한다고 했다. 하지만 정부 스스로 20개는 1년, 80개는 5년 내 달성한단다. 그 사이 기업인들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 간다. 일본 수출규제 대응에 나서는 기업에는 특별연장근로를 허용했지만, 인가기업이 한 곳에 그친 이유는 무엇인가. 하루아침에 일본 제품을 대체할 엄두를 못 내기 때문 아닌가. 그게 산업현장의 현실이다. 당장 반(反)시장·반기업적 정책 실험부터 중단하라. 한·일 경제전쟁은 시장에서 기업이 할 일이지 정부가 구호만 외쳐서 될 일이 아니다. 축구 한·일전 관람하듯 경제 한·일전에 나서다간 전화위복의 기회를 그르칠 수 있다.

김동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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