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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르포] 숨진 탈북 母子...아동수당 끊기고, 가스 끊겨도 아무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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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고 시달리다 숨진 ‘탈북여성과 여섯살배기 아들’
텅빈 방엔 아들이 그린 낙서와 낡은 성경책 하나 뿐
주민센터 "아동수당도 직접 신청했는데…가슴 아프다"
이웃들 "중국사람인 줄만 알고...쌀이라도 줬을텐데"

조선일보

/조선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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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관악구 봉천동의 한 임대아파트 20층. 16가구가 다닥다닥 붙어있는 복도 한 가운데 ‘청소완료. 소독 중’이라고 적힌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창문 틈으로 들여다보니 1.5평 남짓한 방 안은 텅비어 있었다. 베이지색 방문엔 까만 싸인펜, 연필로 사람과 컵 등을 그려놓은 낙서가 가득했다. 방 한쪽 귀퉁이에는 낡은 성경책 한권과 먼지 쌓인 선풍기만 덩그러니 놓여져 있었다. 방 너머엔 햇살이 내리쬐는 조금 더 큰 방, 혹은 거실은 장판도 없이 시멘트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지난달 말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숨진 채 발견된 탈북여성 한모(42)씨 모자(母子)가 살던 곳이다.

한씨는 여섯살짜리 아들과 함께 숨을 거둔지 두달여가 지나서야 발견됐다. 지난달 31일 아파트 경비원이 처음 발견했다. 수도검침원이 이상한 냄새가 난다고 해서 가봤더니 엄마는 거실에, 아이는 작은 방 안에 누워있었다는 것이다. 신고를 받고 도착한 경찰은 "집안에 쌀이나 물은 없었고, 고춧가루만 조금 있었다"고 했다. 집 앞 도시가스 검침표에는 지난 4월 적은 숫자가 마지막이었다. 두달 가량을 가스가 끊긴 채 지냈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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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 오전 40대 탈북여성과 그의 아들이 숨진 채 발견된 서울 관악구 봉천동의 한 임대아파트 모습. 아들 김모(6)군이 숨지기 전 그린 낙서들이 보인다. /배미래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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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센터 찾아 자필로 ‘아동수당’ 신청도 했는데..."
관악구와 경찰에 따르면, 한씨는 지난 2009년 12월 남한에 정착했다. 초기엔 기초생활수급 지원을 받았지만, 이듬해 8월 한씨가 한 대학의 생활협동조합에 취직하면서 지원받지 않고도 살 수 있게 됐다. 이후 2012년 3월엔 아들도 낳았다. 이어 같은 해 5월 중국동포와 결혼도 했다. 봉천동 집은 비워둔 채 남편, 아들과 함께 경남 통영으로 이사했다. 보증금 1000만원에 월세 13~14만원은 미루지 않고 꼬박꼬박 냈다고 한다. 2017년 8월에는 남편을 따라 중국으로 건너갔다가, 작년 9월 귀국했다. 돌아올 때는 한씨와 아들, 둘 뿐이었고, 비워뒀던 봉천동 집으로 다시 들어왔다. 올 1월 남편과 이혼했다.

작년 10월 봉천동에서 이사와서는 주민센터를 찾아 전입신고도, 아동수당·양육수당 신청도 직접했다고 한다. 주민센터 한 직원은 "(한씨가) 신청서 작성을 어려워해서 도와줬던 기억이 난다"면서 "사회보장제도도 알 정도였으면, 주민센터에라도 도움을 요청했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텐데..."라고 했다.
그것도 잠시, 해가 바뀌면서 아동수당 지원은 끝이 났다. 아들이 만 6세가 넘었기 때문이다. 오는 9월부터는 ‘만 7세 이하’로 지원 대상이 확대됐지만, 한씨의 경우 올해 3월로 지원이 끊긴 것이다. 경찰과 관할 지자체가 파악하기로, 한씨 모자의 생활비는 보건복지부에서 지급하는 양육수당 월 10만원 가량이 전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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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 오전 찾은 탈북 모자(母子)가 숨진 채 발견된 서울 관악구 봉천동 한 임대아파트의 모습. 한 층에 16세대가 모여산다. /배미래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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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씨 때문에 중국인인 줄만 알았어"...이웃도 잘 몰랐던 母子
한씨 모자가 살던 임대아파트는 한 동에 10여평 짜리 360여 가구나 모여산다. 복도식이고, 서민들이 사는 곳이어서 여름이면 문을 열어놓고 지내는 집도 더러 있다. 웬만하면 오가면서 얼굴 정도는 아는 사이들이다. 특히 문을 열고 지내는 노인 가구가 많아 한씨 아들처럼 어린아이가 뛰어 다니면 눈에 잘 띈다

"누가 몇 호에 사는지는 잘 몰라도, 여기 사는 사람인지 정도는 알 수 있었을텐데...전혀 못봤어. 아이까지 있는 새댁이면 알았을텐데 못봤어."

주민 이모(81) 할머니가 안타깝다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 할머니는 "이럴 줄 알았으면 나라도 아는 척하고 쌀이라도 좀 줬을텐데..."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같은 층 주민 유모(30)씨는 "말씨가 우리와는 조금 달라 중국인인 줄로만 알았다"며 "집을 너무 자주 비워서 고향(중국)으로 건너가서 사는 것이겠거니 생각했다"고 했다. 또 다른 주민 장모(63)씨는 "맨날 모자를 쓰고 다녔고, 이웃이랑 전혀 교류가 없었다"면서 "어린 아들과 함께 안타까운 일을 당했다고 하니 어렴풋이 얼굴이 떠오른다"고 했다. 장씨는 "아이가 복도에 뛰어다니는 모습을 한두 보긴 했는데… 그래도 참 얌전한 아이였다"고 했다.

경찰 관계자는 "집 안에 먹을 것이 다 떨어져 있었고,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던 정황이 있어 ‘아사(餓死)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있다"며 "현재까지 극단적 선택이나 타살 혐의점은 없었다"고 했다. 경찰은 현재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한씨 모자의 부검을 의뢰해 두고 결과를 기다리는 중이다.

[박소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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