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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IF] 청량감으로 뇌 속이는 박하, 통증 신경도 마비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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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염(暴炎)에 아이스크림이 인기다. 시원하기로는 그중에서도 박하 향(민트) 아이스크림이 최고다. 다른 아이스크림과 온도가 같아도 뇌의 체감(體感) 온도는 더 낮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은 민트 아이스크림에서 만성 통증이나 편두통을 치료할 단서를 찾고 있다. 정반대로 입이 불타는 듯한 착각을 주는 고추 성분도 진통제로 개발되고 있다. 뇌를 착각시키는 진통제들은 어떻게 작동하는 것일까.

뇌에 얼음으로 다가오는 박하 잎

피부에는 온도와 촉감, 통증을 감지하는 감각기관들이 있다. 통증을 일으키거나 온도 변화를 유발하는 물질이 이곳에 결합하면 뇌가 아프거나 차갑거나 뜨겁다고 느낀다. 대표적인 것이 낮은 온도를 감지하는 '트립(TRP) M8' 단백질이다. 세포막에서 전기를 띤 입자인 이온이 오가는 통로 역할을 한다. 트립M8 단백질은 섭씨 25도 이하에서 열린다. 일종의 냉(冷) 센서인 셈이다.

2002년 미국 UC샌프란시스코 연구진과 노바티스 연구재단 과학자들이 거의 동시에 트립M8 단백질의 기능을 밝혀냈다. 온도가 낮은 물질이 이 단백질에 결합하면 (+)전기를 띤 칼슘 이온이 세포 안으로 들어온다. 이로 인해 신경세포에 전류가 발생한다. 바로 뇌로 가는 전기신호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뇌는 이 신호를 받고 온도가 낮다고 감지하고 몸을 떨어 체온을 높인다.

신기하게도 박하 잎 성분인 멘톨도 트립M8 단백질에 결합해 이온 통로를 연다. 이로 인해 멘톨 자체는 온도가 낮지 않지만 뇌가 마치 얼음이라도 만난 듯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멘톨이 과도하게 쌓이면 감염이 일어나 오히려 체온이 올라가는데도 말이다.

미국 듀크대에 있는 한국인 과학자 이석용 교수는 지난 3월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에 멘톨이 트립M8 단백질을 작동시키는 과정을 새롭게 밝힌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연구진은 사람 단백질과 구조가 거의 같은 목도리딱새의 트립M8을 극저온 전자현미경으로 관찰했다. 이를테면 단백질에 멘톨이 결합하는 과정을 순간순간 급속 냉각해 3차원 구조를 파악한 것이다. 멘톨이나 온도가 낮은 물질은 특정 지방 성분과 비슷한 곳에서 트립M8에 결합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연구진은 지방이 이온 통로 개폐 조절에 관여한다고 추정하고 있다.

고추의 캡사이신은 멘톨과 정반대로 작동한다. 1997년 UC샌프란시스코 연구진은 '트립V1' 단백질이 인체의 열(熱) 센서임을 알아냈다. 온도가 높은 물질이 이 단백질에 결합하면 마찬가지로 이온 통로가 열리면서 칼슘 이온이 신경세포 안으로 들어온다. 뇌는 이때 발생하는 전류를 감지해 뜨겁다고 느낀다. 캡사이신도 이 단백질에 결합한다. 결국 고추 자체는 뜨겁지 않아도 뇌는 입에 불이 났다고 생각하고 땀을 흘려 몸을 식힌다.

온도 센서 결합 물질로 통증 치료

과학자들은 멘톨이나 캡사이신이 인체의 온도 센서에 무임승차한 것은 식물이 동물에게 잡아먹히지 않으려고 진화한 결과라고 본다. 한번 고추의 뜨거운 맛을 본 동물은 실제로는 고추가 뜨겁지 않은데도 마치 불 보듯 멀리하게 된다는 것이다.

반면 같은 동물이라도 새는 고추를 즐겨 먹는다. 새의 트립V1 단백질은 캡사이신을 감지하지 못한다. 진화생물학자들은 어금니가 있는 포유동물은 고추를 먹으면서 씨를 뭉개 싹을 틔우지 못하게 하지만, 새는 어금니가 없어 고추를 먹고 배설물을 통해 씨앗을 온전히 퍼뜨릴 수 있기 때문에 식물과 경쟁하지 않게 됐다고 설명한다.

인간도 최근 식물의 방어 체계에서 도움을 얻고 있다. 얼음찜질을 하면 감각이 무뎌져 통증이 가시는 것처럼 멘톨 성분은 진통 효과를 낼 수 있다. 유칼립투스나 레몬그라스 추출물도 멘톨처럼 냉센서에 결합해 진통제가 된다. 이석용 교수는 "온도가 조금만 내려가도 극심한 통증을 느끼는 환자도 멘톨로 냉 센서를 조절하면 치료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캡사이신도 진통제로 개발할 수 있다. 캡사이신이 과도하게 쌓이면 신경세포가 극심한 통증 반응으로 아예 죽어버린다. 캡사이신 진통 크림은 이 방식으로 통증을 원천 차단한다.

이석용 교수는 "정향나무 추출물인 유지놀도 트립V1에 결합하지만 열감을 느끼기보다 감각을 둔화시키는 작용을 해 진통제로 쓰인다"고 말했다. 오우택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뇌과학연구소장은 서울대 교수로 있으면서 염증 물질이 열 센서인 트립V1에 결합해도 이온 통로가 열리지 못하게 하는 진통제 성분을 개발했다.





이영완 과학전문기자(ywle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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