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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정민의 다산독본] 제자 따라 맞춤형 수업 한 다산, 날 좋을 땐 제자들과 나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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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단계별 학습과 전공 구분
한국일보

의학에 조예가 깊었던 다산이 학질 증세를 보이는 제자 황상을 위해 지어준 '절학가', 학질 끊는 노래의 앞부분. 정민 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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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질 끊는 노래

스승의 ‘삼근계’를 받아 든 1802년 10월 17일 이후, 황상은 스승의 곁을 잠시도 떠나지 않고 발분해서 공부했다. 1804년 4월, 황상은 학질에 걸려 여름 내내 고생을 했다. 처음엔 몸살 감기인 줄 알고 집에서 며칠 쉬면 나으려니 했더니 그렇지가 않았다. 이때 다산이 황상에게 써준 친필 편지가 남아있다.

“네 병이 어찌 이리 극심하냐? 물을 연신 찾는 인음증(引飮症)은 어떠하냐? 열의 기세가 대단하다면 떨어뜨려야 한다. 비록 돌림감기라 해도 보통 걱정이 아니로구나. 상한 음식을 먹은 게냐? 혹 한기와 열기가 오락가락 하느냐?”

의학에 조예가 깊었던 다산은 황상의 증세가 학질일 것으로 짐작했고, 그 짐작이 맞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황상을 위해 장편의 ‘절학가(截瘧歌)’, 즉 학질 끊는 노래를 지어주었다. 시는 다른 지면을 통해 전문을 소개한 적이 있으므로, 간략히 내용만 간추린다.

다산은 자신도 강진에 귀양 와서 학질에 걸린 적이 있는데, 너무 아파 어린 아이처럼 끙끙 앓는 소리를 냈고, 찌는 무더위에도 두꺼운 이불만 찾았다고 썼다. 손톱도 검어지고, 입술도 파랗게 질려서, 저도 몰래 이빨이 덜덜 떨려 다듬이질 소리가 들렸었다. 그런데 황상은 학질에 걸리고도 나와서 공부를 하는데, 파리 머리만한 작은 글자를 네댓 쪽이나 베껴 쓰면서도 필획 하나 흔들림이 없었다. 이것만 봐도 황상의 훗날 성취가 자신보다 더 높을 것을 의심 없이 알 수가 있다. 이 정신으로 더 꾸준히 노력해서 우주의 모든 일을 다 이해하는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북돋워주었다. 이렇듯 다산은 제자에게 일이 있을 때마다 진심이 통하는 감격을 선사했다.

◇집중학습

황상은 다산 문하에 든 지 1년 반쯤 된 1804년 5월부터 과거 시험 준비를 위한 부(賦) 공부의 단계로 진입했다. 아마 함께 배우던 여러 사람도 같이 지었을 것이다. 황상의 것만 ‘치원유고’에 남았다. 처음에 주어진 제목은 ‘구름’이었다.

“푸른 하늘 바라보니, 날은 서편 기울었네. 구름 기운 자옥하다. 이어진 산 같구나. 흩어졌단 몰려들고, 나아갔다 물러나네(試望穹蒼 시망궁창, 日旣西傾 일기서경. 雲氣薈蔚 운기회울, 形如連山 형여련산. 乍散乍鬱 사산사울, 載進載退 재진재퇴)”로 시작되는 긴 글이었다. 글자의 운용에 구김이 없고, 표현과 흐름이 매끄러웠다. 흡족해진 다산은 황상의 첫 작품인 ‘운부(雲賦)’ 끝에 “사혜련(謝惠連)의 ‘설부(雪賦)’에 부끄럽지 않다(不愧謝惠連之賦雪 부괴사혜련지부설)”는 평가를 친필로 남겼다.

이듬해인 1805년 4월 1일부터는 작정하고 하루에 한편씩 부(賦)를 짓게 하는 대장정이 시작되었다. 그간의 연습으로 이제 집중 학습에 들어갈 단계라는 판단이 섰던 것이다. 첫 제목으로 개인 날씨를 두고 쓴 ‘제부(霽賦)’가 내려왔다. 그런데 17세 소년 황상이 쓴 시의 마지막 구절이 이랬다. “이미 장소를 얻어 즐거움을 깃들이니, 내 장차 세상 피해 은둔해 숨으리라(旣得所而寓樂 기득소이우악, 吾將辟世而遁藏 오장피세이둔장).” 스승은 세상에 내보내려고 부를 짓게 했는데, 소년은 어린 나이에 이미 은둔의 뜻을 키우고 있었다.

4월 2일에는 새끼 제비를 노래한 ‘유연부(乳燕賦)’를 짓고, 뒤이어 강진 인근의 청조루(聽潮樓), 남당포(南塘浦), 천관산(天冠山)을 묘사하는 훈련을 거쳤다. 그 뒤로는 중국의 고사에서 따온 여러 주제로 창작 역량을 끌어올렸다. 이렇게 해서 4월 30일에 ‘주중선부(酒中仙賦)’를 끝으로 한달 간의 집중 학습이 마무리되었다. 매 작품을 지을 때마다 다산은 잘못된 구절을 지적하고 좋은 구절에는 점을 찍어 칭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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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은 봄과 가을이면 제자들과 함께 소풍을 갔다. 사의재에서 30분 떨어져 있는 금곡사를 다산은 사랑했다. 돈이 조금 마련되면 금곡사 인근의 땅을 사서, 그 산자락에 자신이 거처할 오두막을 지을 생각이라고 시에 적었을 정도다. 정민 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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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곡 소풍

다산은 봄 가을이면 늘 제자들을 이끌고 소풍을 갔다. 주막 시절에는 금곡(金谷)을 주로 갔고, 귤동 초당으로 옮긴 뒤에는 윤서유(尹書有)의 집이 있던 항동 쪽으로 가다가 용혈(龍穴)을 꼭 들르곤 했다. 겨우내 지속된 공부와 무더위 속 작업에 지친 학동들에게 생기를 불어넣는 행사였다.

금곡은 옛절 금곡사(金谷寺)가 있던 곳으로 오늘날 사의재 주막에서 걸어서 30분이 걸리지 않는 곳에 있다. 고려 때 세운 백제식 3층 석탑이 우뚝 서 있는데, 계곡 초입에 문짝처럼 가파르게 선 절벽 사이를 뚫고 올라간다. 지금도 그 숲속에 수백 년 된 차나무가 있다.

1803년 4월 26일에 다산은 제자들을 데리고 금곡으로 놀러 갔다. 그때 쓴 시가 ‘4월 26일 금곡에 놀러 가서 짓다(四月二十六日遊金谷作 사월이십륙일유김곡작)’란 작품이다. 앞 대목만 읽어본다.

오래도록 강진 땅 나그네 되어(久作耽津客 구작탐진객)

다시금 금곡으로 놀러 왔다네(重成金谷遊 중성김곡유).

문 나서자 주르륵 눈물이 흘러(出門翻有淚 출문번유루)

막대 끌며 가만히 고개 숙인다(曳杖獨低頭 예장독저두).

아득한 서울 땅 생각하면서(迢遞懷京邑 초체회경읍)

가파른 산과 시내 지나왔다네(崎嶇歷澗丘 기구력간구).

조금씩 나무꾼 길 따라서 들자(漸因樵徑入 점인초경입)

석문의 그윽함을 기뻐하누나(始喜石門幽 시희석문유).

봄날의 소풍은 그에게 자꾸 눈물을 쏟게 했다. 서울 시절의 봄나들이 생각이 겹쳐져서 그랬다. 1804년에는 9월 5일에 다시 금곡으로 놀러 가서 장시를 남겼다. 또 1805년 여름에 쓴 ‘소동파의 시에 화답함(和蘇長公東坡)’ 8수 중 제 6수에서 “지난 번 금곡에 눌러 살면서, 여러 차례 자갈밭을 일구려 했지. 올 가을 채마밭을 사기만 하면, 산 모롱이 기대어 집을 얽으리(曩欲居金谷 낭욕거김곡, 屢回凌确犖 루회릉학락. 今秋得買圃 금추득매포, 縛屋依山角 박옥의산각)”라고 노래한 것만 봐도 다산이 이곳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느껴진다. 다산은 돈이 조금 마련되면 바로 금곡사 인근의 땅을 사서, 그 산자락에 자신이 거처할 오두막을 지을 생각이라고 시에서 썼다.

1804년 봄, 스승을 따라갔던 황상도 ‘3월 2일에 금곡에 놀러 가서 짓다(三月二日遊金谷作)’란 작품을 썼다. “골짝은 낮에도 그윽도 한데, 석탑이 가운데 우뚝 서 있네. 부처 자취 황량한 지 이미 오래나, 다행히 구름 안개 예서 머문다(洞門晝窈䆗 동문주요요, 石塔正巋然 석탑정규연. 佛跡久已荒 불적구이황, 幸玆留雲煙 행자류운연).” 당시 절은 이미 황폐해져 탑 하나만 덩그러니 서 있는 상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밖에도 ‘다시 금곡에 놀러 와서(再遊金谷)’이란 시가 한 수 더 있다.

◇더 손댈 것이 없겠다

1811년 다산이 흑산도의 정약전에게 보낸 ‘상중씨(上仲氏)’에 이런 대목이 보인다. “읍내에 있을 때, 아전 집안의 아이들로 배우러 온 자가 4,5인으로 모두 몇 년 만에 그만두었습니다. 한 아이가 있었는데, 용모가 단정하고 마음이 깨끗하며, 글씨는 상등인데 문장 또한 중간 재주는 되었습니다. 무릎을 꿇고 이학( 學)을 하니, 만약 능히 고개를 숙여 힘껏 배운다면 이정과 더불어 서로 겨룰 만 하였습니다.”

또 황상에게 준 친필 편지 글에서는 고성사(高聲寺)의 승려 은봉(恩峯) 근은(謹恩)에 대해 언급했다. “은봉의 시재(詩才)는 사람을 크게 놀라게 하는구나. 내가 십 년간 관각에서 노닐었지만, 이처럼 신속한 사람은 본 적이 없다. 내가 이미 너를 얻었는데 또 은봉을 얻었으니 시사(詩社)가 원만하겠다.”

위 두 글은 다산이 제자 각 사람의 성품과 특장을 고려하여 전공을 두고 가르쳤음을 잘 보여준다. 앞서 이정과 다른 한 사람은 이학( 學)을 전공시켰고, 황상과 근은은 문학(文學) 공부에 중점을 두었다. 이학이 학술 방면이라면 문학은 시문 창작을 위주로 한 문예 역량을 기르는 쪽이었다.

1944년 장흥 사람 마상덕(馬相㥁)이 황상의 증손인 황호영(黃鎬穎)의 요청에 따라 황상 집안에 전해오거나 이미 흩어진 왕복 서한과 필첩을 정리해서 ‘치원처사사우왕복급수창록(巵園處士師友往復及酬唱錄)’을 묶었다. 이중 황지초가 황상의 시에 차운해서 학림(鶴林) 이정에게 부친 시가 나온다. ‘차운기학림(次韻寄鶴林)’이 그것이다. 황지초의 시 한 수를 적고 나서, 다산은 그 뒤에 이 시에 대한 자신의 평을 덧붙였다.

다산의 평은 이렇다. “어제 황상의 시를 얻고 몹시 기뻤다. 오늘 지초로 하여금 차운케 했더니 훌륭한 구절과 빼어난 표현이 경악할만한 것이 몹시 많았다. 다만 끝의 두 운자가 매끄럽지 않은지라 대략 두세 글자를 고쳤다. 나머지는 손댈 것이 없다. 근은(謹恩)이 이를 증명하리라.” 그리고는 시 중에 뛰어난 표현 옆에 ‘천고절창(千古絶唱)’이니, ‘묘절묘절(妙絶妙絶)’이니 하는 평어를 달았다. 그러고도 충분치 않다고 여겼던지, 평을 하나 더 추가했다. “매번 시재(詩才)가 그 형 황상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말했는데 오늘 보니 손색이 없음을 알겠다.”

같은 운자를 두고 여러 제자들이 동시에 시를 지었다. 고성사(高聲寺) 승려 은봉(恩峯) 근은과 황경, 손순(孫恂) 등 세 사람의 시가 더 남아있다. 황상과 황지초는 다섯 살 터울의 사촌간이었다. 손순은 손병조와 동일인인 듯하나 분명치 않다. 다산은 손순의 시 구절 옆에도 ‘기구(起句)가 자연스러워 좋다(起句自然得好 기구자연득호)’라는 평을 달았다.

또 ‘다산시문집’에 실린 ‘이금초의 시권에 제함(題李琴招詩卷 제리금초시권)’이란 글은 금초, 즉 이정이 지은 시권(詩卷)에 앞서와 같은 방식으로 써준 글이다. 내용은 이렇다. 1805년, 이정이 열 네 살 때였다. 다산이 운서(韻書)를 보다 말고 이정에게 물었다. “대(大)와 양(羊)을 합해 ‘달(羍)’ 자(字)가 되었는데, 어째서 어린 양이라 하는 걸까?(大羊爲羍 대양위달, 何謂小羊? 하위소양?)” ‘달(羍)’의 의미가 어린 양인데, 어째서 글자는 큰 대와 양 양자를 합했느냐고 물은 것이다.

이정이 대뜸 받았다. “범(凡)과 조(鳥)를 합해 ‘봉(鳳)’ 자가 되었으니 그래서 신조(神鳥)라 부릅니다(凡鳥爲鳳 범조위봉, 故稱神鳥 고칭신조).” 평범한 새란 의미의 ‘범조(凡鳥)’ 두 글 자를 합친 것이 ‘봉(鳳)’이다. 하지만 이 새도 평범하지 않고 신령스런 새가 아니냐고 맞받아쳤다. 대단한 순발력이다. 다산은 이 일합을 소개한 뒤 “그의 지혜로움이 이와 같았다. 그의 시는 기상이 조금 부족하지만, 세월을 두고 공부를 더한다면 훌륭하게 발전할 것이다”라고 썼다.

제자들은 스승의 이 같은 칭찬을 받으며 하루가 다르게 으쓱으쓱 성장했다.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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