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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핏줄로 이룬 ‘정치 왕조’… 민심 향배에 집권·몰락 운명 갈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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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두드러진 전세계 정치 명문가의 ‘흥망성쇠’ / 그리스 미초타키스 ‘父子 총리’ 탄생 / “족벌주의 구태 타파” 공약… 표심 얻어 / 누나 이어 조카도 시장직… 3대가 득세 / 트럼프, 딸 이방카·사위 쿠슈너 요직에 / 각국 회담 배석… 英왕실 방문땐 총출동 / 부시·케네디 이어 정치왕조 창건 ‘야심’ / 印 총선 참패 제1야당 당수 간디 사임 / “가난은 마음 상태”… 대중 정서 못읽어 / 정치권 70년 지배 ‘네루·간디家’ 몰락

세계일보

세계 정치권에도 금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난 이들이 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대표적 예다. ‘백두 혈통’을 물려받았다는 이유로 20대 젊은 나이에 북한의 3대 세습 지도자가 된 그는 최근 여동생 김여정까지 정치·외교의 전면에 등장시키며 정상국가화를 꾀하고 있다.

이는 비단 북한과 같은 전체주의 사회나 군주제 국가에만 해당하는 게 아니다. 민주주의가 고도화된 사회에서도 성(姓)이 정치 브랜드가 되는 경우를 많이 접할 수 있다. 혈통이 정치권력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유권자의 선택’이라는 체를 한 번 걸러야 한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미국의 케네디·부시·클린턴, 캐나다 트뤼도, 프랑스 르펜, 영국 밀리밴드 집안 등 사례는 무궁무진하다. 이들 가문에는 ‘정치 명문가’ 또는 ‘정치 왕조’라는 이름이 붙는다. 한때 한·중·일 3국 정상 라인업도 전직 대통령의 딸, 전직 국무원 부총리의 아들, 전직 총리의 외손자로 꾸려진 적이 있었다.

최근 한 달여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난 일련의 정치 이벤트에서도 정치 명문가 흥망성쇠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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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명문가의 부활

지난 8일(현지시간) 그리스에서는 ‘부자(父子) 총리’가 탄생했다. 전날 총선에서 신민주당을 승리로 이끌어 총리직을 거머쥔 키리아코스 미초타키스의 아버지가 바로 콘스탄티노스 미초타키스 전 총리(1990∼93년 재임)다. 누나 도라 바코얀니스는 여성 최초의 아테네 시장·외교장관을 지냈고, 외조카 코스타스 바코얀니스는 지난달 지방선거에서 당선돼 오는 9월 아테네 시장 취임을 앞두고 있다. 미초타키스 가문이 그리스 3대 정치 명문가로 꼽히는 이유다.

나머지 두 집안은 카라만리스와 파판드레우 가문이다. 신민주당 설립자인 콘스탄티노스 카라만리스는 무려 네 차례 총리를 지냈고, 그의 조카 코스타스 카라만리스도 2004년부터 2009년까지 총리로 재임했다. 그리스 사회당(범그리스 사회주의 운동)의 파판드레우 가문은 손자 게오르기오스(2009∼11년 재임)까지 3대(代)가 총리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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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리아코스 미초타키스 그리스 신민주당 대표(오른쪽)가 총리로 취임한 8일(현지시간) 아테네에 있는 총리 집무실 막시모스 맨션 앞에서 알렉시스 치프라스 전 총리를 만나 악수하고 있다. 아테네=AP연합뉴스


1974년 군부독재 종식 이후 이들 세 가문이 정치권력을 독식하다 보니 그리스 정치는 과두적·비민주적이라는 지적을 받아 왔고, 정치권 부패 문제도 고질화했다. 퓨리서치 센터가 지난해 5∼8월 27개국 국민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그리스인의 ‘민주주의 불만족도’는 84%로 나타나 멕시코(85%)에 이은 2위였다. ‘정치인들은 부패했다’고 응답한 비율은 89%로 조사 대상국 중 단연 1위(평균 54%)였다.

족벌정치에 염증을 느낀 그리스 유권자들은 부채 위기가 심화한 2015년 신생 정당인 급진좌파연합(시리자)에 표를 몰아줬다. 그러나 시리자는 이번 총선에서 2당으로 밀려나며 ‘4년 천하’에 그쳤다. 외신들은 시리자 패배의 원인으로 긴축정책과 북마케도니아 국호 변경 합의 등을 꼽는다. 미 정치전문지 폴리티코는 여기에 시리자가 ‘족벌정치’의 구태를 답습한 점을 이유로 추가했다. 시리자 출신 국회부의장이 연줄을 이용해 자신의 딸에게 국회 내 일자리를 줬다가 유권자들의 분노를 산 것이다.

반대로 미초타키스 신임 총리는 선거전에서 “가족에게 공직을 맡기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부패, 족벌주의에 대한 단호한 태도가 정치 가문의 부활에 일조했다는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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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열패밀리의 탄생

미국 역시 선출 공직의 대물림이 두드러진 나라다. 애덤스·해리슨·루스벨트·부시 4개 가문이 대통령을 두 명씩 배출했다. 부시가(家)와 클린턴가는 1988년부터 2004년까지 매번 대선 때마다 투표용지에 이름을 올렸다. 2016년 대선 당시에도 공화당 경선에서 젭 부시 전 플로리다주 주지사가, 본선에서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이 부동산 재벌 출신 도널드 트럼프와 맞붙었다.

정치 명문과의 싸움에서 연거푸 승리해 대권을 거머쥔 트럼프 대통령은 아예 왕조 창건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취임하자마자 큰딸 이방카와 사위 재러드 쿠슈너를 백악관 고위직에 앉히더니, 지난달 초 영국 국빈 방문에는 온 가족이 총출동해 영국 왕실을 가문 대 가문으로 상대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이방카와 쿠슈너는 아버지가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함께 영국 왕실 근위대를 사열하는 모습을 버킹엄궁 발코니에서 내려다보고 있었고, 그날 저녁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베푼 만찬에는 장남 도널드 주니어, 차남 에릭·라라 부부, 차녀 티파니까지 등장했다. 이들은 궁전 곳곳을 누비며 사진을 찍고 여왕의 보좌관과 대화를 나눴다. 트위터에는 “우리 가족이 여왕 폐하에게 초대를 받아 영광스럽다” 따위의 소감을 남겼다. 트럼프 대통령의 자녀들은 심지어 다음날 영·미 정상 공동기자회견장 두 번째 줄 좌석을 차지하기까지 했다. 뉴욕타임스(NYT)는 “미국 정치문화에서 케네디 집안이 오랫동안 비공식적인 로열패밀리 지위를 차지해 왔다면, 이번에 트럼프 집안은 자신들을 2019년판 로열패밀리로 등장시켰다”고 촌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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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왼쪽)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오른쪽)이 지난 6월 29일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의 특별 세션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딸 이방카를 사이에 두고 서로 손을 잡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연합


이방카는 지난달 말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G20(주요 20개국) 정상회의에서 존재감을 더욱 키웠다. 각국 정상과의 양자회담에 수차례 배석하는가 하면 여성역량강화 특별세션에도 아버지와 함께 참석해 연설을 했다. 각국 및 국제기구 수장들의 대화 자리에 끼는 장면도 포착됐다. 순방에 동행하지 않은 멜라니아 트럼프 여사를 대신해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한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마치 미국의 핵심 외교관처럼 회의장을 종횡무진 누비는 모습은 많은 이들의 눈총을 샀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방카가 대선에 출마한다면 매우 강력한 후보일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도널드 주니어도 몇 차례 정계 진출에 관심을 보였었다. 영국 국빈 방문과 G20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공적 시간과 비용을 들여 자녀들에게 정치적 유산을 남기는 데 썼다는 비판이 제기되는 이유다. 그러나 트럼프의 측근들은 폴리티코에 “도널드 주니어는 자신이 직접 출마하는 데는 큰 관심이 없다. 그는 아버지의 재선을 돕는 데 100% 초점을 맞추고 있다”며 “이방카는 재선 캠프로 가지 않고 백악관에 남아 국제 여성역량강화 업무에 계속 집중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2024년이나 2028년쯤 트럼프 대통령의 자녀 중 하나가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의 동생으로 법무장관을 지낸 로버트 케네디의 손자인 조 F 케네디 3세 민주당 하원의원이나 조지 H W 부시 전 대통령의 손자인 조지 P 부시 텍사스주 토지공사 토지집행관, 빌·힐러리 클린턴 부부의 딸 첼시와 대선에서 맞붙는 일이 생길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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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의 몰락

지난 3일 인도에서는 제1야당 인도국민회의(INC)의 당수 라훌 간디가 사임했다. 당대표가 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것은 민주주의 정당정치에서 흔한 일이다. 그러나 당사자가 INC의 네루·간디 가문의 후계자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인도 정치권을 70년간 지배해 온 ‘왕조’의 몰락을 의미하는 ‘대사건’이기 때문이다.

네루·간디가는 인도 현대 정치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집안이다. 초대 총리 자와할랄 네루(1947~64년 재임)와 그의 딸 인디라 간디(1966∼77년, 1980∼84년), 외손자 라지브 간디(1984∼89년) 3대가 총리를 지냈다. 라지브 간디의 부인 소냐 간디는 1998년 정치권에 입문한 뒤 집권당 대표 등을 지내며 국정의 한 축을 맡았었다. 라지브·소냐 간디의 아들이 바로 라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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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부모의 지역구였던 우타르프라데시주 아메티에서 하원의원으로 당선되며 정치를 시작한 라훌은 네루·간디가의 네 번째 총리감으로 거론돼 왔다. 그러나 그가 당 부총재를 맡아 지휘한 2014년 총선과 총재 취임 후 치른 올해 총선에서 INC는 나렌드라 모디 총리의 인도국민당(BJP)에 잇따라 참패했다. INC는 올해 하원 543석 중 52석을 건져 집권 BJP 의석의 6분의 1을 차지하는 데 그쳤고, 30개주 가운데 14곳에서는 단 1석도 얻지 못했다. “가난은 마음의 상태일 뿐”이라는 대중 정서와 동떨어진 말 등으로 여론의 십자포화를 받은 적도 여러 번이다.

라훌 간디는 사임 서한에서 당이 철저히 혁신할 것을 주문했다. 혁신과 변화는 ‘과거’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족벌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당이 인도의 ‘미래’를 위한 정당으로 거듭나는 것에서 시작돼야 할 것이라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지적했다.

유태영 기자 anarchy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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