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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퇴정 명령해달라” 한밤 중의 ‘양승태 재판 거부’ 공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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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밤 11시5분 서울중앙지방법원의 311호 법정, 피고인석에 앉아있던 양승태 전 대법원장(71)이 “제가 말씀을 좀 드리겠습니다”라며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양 전 대법원장이 사법농단 재판에서 발언한 것은 지난 5월29일 1회 공판 이후로 두달 여 만이다. 서울중앙지법 형사35부(재판장 박남천 부장판사) 심리로 오전 10시부터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 심의관이었던 김민수 판사에 대한 증인 신문이 진행되던 와중이었다.

“유감스럽게도 제 체력이 따라가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13시간째 증인의 증언을 듣다보니까 판단력도 떨어지고 있습니다. 더 이상 (재판을) 해도 아무 의미가 없는 것 같습니다. 남아있는 반대신문까지 다 하면 최소한 5시간 이상, 예정 시간만 3시간이 걸립니다.” 양 전 대법원장은 들릴락말락 작은 목소리로 재판부를 향해 말을 이어갔다. “제 체력이 견딜 수가 없고 그렇다고 해서 재판부가 하시는 이 재판을 방해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제가 없어도 변호인이 있고 재판은 진행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재판장께서 퇴정 명령을 내려주시면 (저는) 퇴정을 하고 재판을 계속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대단히 죄송합니다만 (저에게) 퇴정 명령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경향신문

지난 1월11일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조사를 받기 위해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에 출석하기 전 대법원 청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우철훈 기자


더 이상 재판에 참여할 수 없다는 양 전 대법원장 말에 검찰이 즉각 날을 세웠다. 박주성 부부장검사는 ‘국정농단’ 사건의 피고인인 박근혜 전 대통령이 재판 거부 선언을 한 사례를 언급했다. 박 검사는 “양승태 피고인이 갑자기 재판을 거부하면서 증인신문을 더 이상 할 수 없다고 하는 이상, 피고인 없이도 재판을 진행할 수 있는 경우로 보인다”며 “피고인 주장에도 불구하고 재판 절차는 흔들림없이 진행돼야 한다”고 했다.

그러자 이번엔 양 전 대법원장 측 이상원 변호사가 ‘재판 거부’라는 말은 가당찮다며 반발했다. 이 변호사는 격앙된 톤으로 “피고인이 아파서, 몸이 안좋아서 본인이라도 퇴정하게 조치해달라고 말을 하는 게 재판 거부인지 상당히 의문스럽다”며 “야간 재판은 최소한 소송관계인들의 동의가 있어야만 가능하다”고 말했다. 이 변호사는 이어 “소송관계인이 다 반대해도 (야간 재판을) 강행하는 게 가능하다면 밤샘 조사에 대해서 검사들은 왜 (피의자) 동의를 받느냐, 동의도 안 받고 밤샘 조사해도 된다는 게 재판부 뜻이냐”며 “검사가 재판 거부라는 말을 붙일만한 상황이 아니다”라고 했다.

박 검사는 또 반박했다. 박 검사는 “재판장님이 분명히 오늘 증인신문을 하겠다고 소송지휘를 했는데 (양 전 대법원장이) 양해를 구하는 것을 넘어서 퇴정 명령을 내려달라고 발언했다”며 “이런 피고인을 저는 본 적이 없다”고 했다. “본인이 건강상 이유 때문에 더 이상 법정에 있는 게 어렵다면 양해를 구하는 게 정상이지, 퇴정명령까지 구하는 것은 납득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이번엔 고영한 전 법원행정처장(대법관)의 변호인이 양 전 대법원장을 옹호하고 나섰다. 고일광 변호사는 “양 전 대법원장의 말은 최대한 재판장님에게 양해를 구하는 것으로 이해된다”며 “(양 전 대법원장이) 고령에 구치소 생활이 힘든데 혹시라도 퇴정명령을 해줄 수 있으면 해달라고 아이디어를 낸 것에 불과한데 (검찰이) 다른 사례(박 전 대통령의 재판 거부)를 갖다붙이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했다.

박 재판장은 결국 양 전 대법원장 의견을 받아들여 이날 재판을 그만하기로 했다. 박 재판장은 “퇴정명령의 요건에 해당되는지 불분명하고, 피고인의 출석 없이 공판절차를 진행할 수 있는 경우에 해당되기도 어렵다”며 “피고인의 건강상태를 고려했을 때 계속 증인신문을 진행하는 것은 무리가 된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남은 증인신문은 추가 기일을 잡아서 하기로 했다.

한편 양 전 대법원장 측은 이날 오전에는 재판부의 직권 보석 허가 방안에 대해 협조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박 재판장이 보석 허가를 검토하기 위해 양 전 대법원장의 주소지를 물었지만 이 변호사는 “변호인 입장을 이해해달라”고만 답변했다. 박 재판장이 이어 보증서를 제출할 수 있는 사람의 인적사항을 물었는데도 이 변호사는 “재판부가 가능한 방법으로 (알아서) 파악하는 게 맞다”며 “정보 제공을 요청한다면 피고인과 상의를 더 해보겠다”고 했다. 양 전 대법원장 구속기간은 다음달 11일 0시 끝난다. 재판부는 보석 허가할지를 22일 결정하기로 했다.

이혜리 기자 lh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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