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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세상사는 이야기] 우리 긴 꿈을 꾸어요-영구중립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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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지난 몇 주일 내가 지키는 여백서원에서는 매우 특별한 작업 한 가지가 이뤄졌다. 1954~1955년 판문점으로부터 스위스로 간 편지들을 타이핑하고 우리말로 옮기는 작업이었다. 편지를 쓴 사람은 정전협정으로 동란이 그나마 가까스로 멈춰지던 시점, 그 협정의 이행을 감시하러 왔던 중립국 감시단 일원인 스위스 병사다. 역사학을 전공한 반듯한 청년이 역사의 현장에서 맞닥뜨렸던 체험과 기록의 습관은 훗날 그를 장서가로도 만들어 귀중본 장서 4만~5만권이 스위스에 집적돼 있기도 하다.

이 귀한 글이 한국으로 와서 서원에 안착하게 된 경로도 예사롭지 않다. 3년 전 내가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대학에 초빙교수로 가 있을 때였다. 강연 직전, 총장이 축사를 해주러 오기로 돼 있어서-직원만 4500여 명인 대학인데 그 바쁠 총장이 오신다기에 황송해서-강연 자료를 한 번 더 점검하고 있는 참에 어떤 모르는 분이 다가와 봉투를 내밀었다. 봉해지지 않은 봉투에서 내보이는 엽서를 얼른 훑어보니 그분 어머니가 보내온 엽서라는데 이렇게 쓰여 있었다. "내가 독일 바이마르에서 전 교수의 강연을 인상 깊게 들었는데 이제 너도 그분 강연을 듣는다니 기쁘다." 놀라운 얘기였다. 강연이 끝난 후에야 인문대 학장님께 아까 그분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사회대 학장이며, 우연히 나눈 대화에서 자기가 곧 한국에 간다고 했더니 그분이 '나는 한국을 모르지만 간접적으로 아는 한국인이 하나 있다'고 했다는 것이다. 어머니를 통해서 들은 내 얘기였다. 그런데 그때 인문대 학장은 나의 손님으로 내 서원에 오기로 돼 있었다. 이 넓은 세상에서 두 사람이 직간접으로 아는 이가 동일인임이 그렇게 확인됐고, 그래서 내가 그때 마침 본교에 잠깐 와 있다는 얘기도 나와 그분이 찾아온 것이었다.

좋은 인연으로 좋은 만남이 있었고, 내가 인스브루크대학을 떠나기 전날 밤에도 그분이 연구실로 찾아왔다. 밤늦도록 부산하게 짐을 싸고 있는 내게, 출장 갔다 지금에서야 돌아왔다며 스틱 하나를 내밀었다. 작고한 스위스인 친구가 판문점에서 썼던 편지들을 스캔한 것이라고 했다.

정성스레 쓴 편지들이었건만, 사정을 모를뿐더러 간간이 섞인 스위스 독일어에다 손편지를 판독하는 일만도 만만치 않아 나는 너무도 귀한 그 자료에 손을 못 대고 그간 미뤄두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 그 사회대 학장님, 작세 교수가 서원까지 찾아왔다. 처음 한국에 오면서 곧장 서원으로 왔다. 세상 떠난 친구가 깨알같이 쓴 그 귀한 편지들을 스위스인 부인과 머리를 맞대고 해독해가며 타이핑해줬다.

타이핑이 되는 대로 받아서 곁에 앉아 번역을 해가며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주로, 예나 지금이나 강대국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힘겨운 줄타기를 해야 했던, 지금도 여전히 그런 작은 나라의 역사에 대하여.

타이핑을 마친 작세 교수가 떠나며 말했다. "한국이 장기 계획을 세워 스위스처럼 영구중립국이 되는 게 좋겠습니다." 내가 '그런 꿈 같은 생각은 감히 하지도 못하고, 통일도 차차후이고, 우선 급한 건 정전 상태만이라도 끝내고 70년 장벽에다 구멍 좀 더 내는 일'이라 했더니 작세 교수가 덧붙였다. "스위스 치즈처럼 구멍이 크고 많기를 바라요."

그가 떠나고도 구멍 숭숭한 스위스 에멘탈 치즈의 그림이 오래 눈에 남아 그 얘길 했더니 통일부로 일하러 달려간 제자가 말했다. 고맙다고, '빠른 통일'만이 아니라 '바른 통일'을 위해 애쓰겠노라고. 통일이 누가 혼자 해낼 일일 리 없고 온 국민이 마음을 모아야겠지만 얼마나 믿음직하던지. 언젠가 판문점에서, 또 퇴각한 중공군의 무기가 실려 나가는, 얼어붙는 압록강가 만포에서 쪼그리고 앉아 편지를 쓰던 한 이국의 젊은 역사학도, 또 옛 상처를 잊지 않고 철조망을 뚫는 길 내기에 매진하고 있는 지금 여기의 한 법학도- 두 젊은이 덕분에 혼잣말을 감히 소리 내어본다. 우리 긴 꿈을 꾸어요. 힘 모아 오래, 꾸준히, 장기 계획을 한번 추진해봐요. 아무도 넘보지 않는 나라, 영구중립국요.

[전영애 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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