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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이중근 칼럼]정치권, 정말 군을 이렇게 이용할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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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어선의 삼척항 입항에 해군 2함대사령부 허위 자수 사건으로 군이 몰매를 맞고 있다. 시민들의 실망감과 배신감은 이해가 간다. 군은 경계 실패와 거짓 해명, 그리고 기강 해이에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하지만 지난달 15일 북한 어선이 삼척항에 도착한 이후 하루도 거르지 않고 군을 두들기는 것은 과도하다는 생각이 든다. 정치권과 언론은 물론 심지어 정부 내에서조차 군을 강도 높게 비판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심한 것이 정치권이다. 여야 모두 안보를 걱정한다면서도 필요에 따라 이리저리 군을 끌어대고 있다. 과거 군사독재 정부가 군을 정권의 기반으로 활용한 것과 반대 방향으로 군을 이용하고 있다고 해도 과한 말은 아니다.

경향신문

자유한국당의 군 비판에는 군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와 존중마저 결여돼 있다. 9·19 군사합의를 공격하던 차에 북한 어선 사태까지 터지자 두 사안을 엮어서 기다렸다는 듯 무차별 공세를 펴고 있다. 오랫동안 운용돼온 군의 경계근무 실태 등 안보 현실은 깡그리 무시한 채 오로지 문재인 정부 비판을 위한 도구로 군을 활용하고 있다. 한국당은 정경두 국방부 장관 해임결의안을 걸어 추경을 막고 있지만, 이 정도 사안으로 국방장관을 해임한 사례는 없다. 한국당은 과거 집권 시 천안함 폭침과 목함지뢰 도발은 물론 일명 ‘노크 귀순’ 때 자신들이 어떻게 했는지는 애써 무시하고 있다. 황교안 대표가 지난 5월 전방부대를 방문해 군인들에게 “군은 정부와 입장이 달라야 한다”고 말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북한=주적’이라는 인식을 빼면 한국당이 스스로 안보정당이라고 일컬을 만한 근거는 이제 없다. 가관인 것은 군 출신 인사들이 이런 공세에 앞장서고 있다는 사실이다. 알량한 지식을 활용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얄밉게 군을 공격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군을 지휘하던 시절에는 더 많은 은폐와 조작이 있었다는 것을 사람들은 너무나 잘 안다.

군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는 여당도 별반 다르지 않다. 과거 군의 잘못된 행태를 바로잡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과도하게 이를 부각해 군의 입지를 흔들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옛 국군기무사의 계엄 문건에 대한 대응이 과도했다는 점은 관련 수사가 더 이상 진행되지 않는 데서도 확인되고 있다. 국방개혁에서도 미래 지향적인 안목을 보여주지 못한 채 병사들의 복지 등 인기에 치중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보수야당의 대척점에 서는 이념성 강한 정책을 제시하는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정치권이 군을 필요 이상으로 두들긴 후과는 이미 현실화하고 있다. 이달 초 동해에서 북방한계선을 넘어오는 새떼를 북한 비행기로 의심해 쫓더니, 그제는 서해에서 북한 잠수함을 본 것 같다는 신고를 받고 5시간 동안 수색하는 소동을 벌였다. 이제 군 지휘관들이 할 일은 불 보듯 뻔하다. 담당 작전 구역에서 사고가 나지 않도록 하는 데 부대의 역량을 결집할 것이다. 사소한 빈틈도 보이지 않아야 진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군이 자초한 일이라거나 군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가기 위한 진통이라고 할지 몰라도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전력 손실은 어떻게 할 것인가.

남북관계와 더불어 일본과 중국 등 주변국 군사 정세가 크게 변하고 있다. 일본은 한국군을 잠재적 적국으로 취급하기 시작했다는 정황들이 나오고 있다. 주변국과 전쟁할 일이 없을 것이라는 전제가 흔들리고 있다. 북한 어선 한 척에 온 나라가 매달릴 때가 아니다. 군은 부여받은 임무를 수행하는 집단이고, 그 군의 임무를 선택하는 것은 시민이다. 군은 변화하는 안보 환경에서 자신들이 어떤 임무를 우선 수행해야 할지를 국민에게 묻고 있다. 북한의 도발에도 대응하고, 대양에서 국익도 보호하고, 그러면서 북한 어선의 침투까지 물 샐 틈 없이 다 잡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시민을 대표하는 정치권이 군의 임무를 정해줘야 하는데 “모든 것을, 그냥 무조건 다 잘하라”고 주문하고 있다. 또 그걸 못하면 회초리 한 대로 충분한데 몽둥이로 3박4일간 두들겨 패고 있다. 이것이 지금 정치권이 하고 있는 일이다.

미국의 정보 당국자가 수년 전 “일본이 독도를 점령하는 데는 4시간이면 충분하다”고 했다고 한다. 최근 이 말을 전한 정치인은 “지금은 공중급유기에 F-35까지 도입했으니 그렇게 허무하게 당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자위했다. 역사학자 한명기는 임진왜란·병자호란은 중종 이후 선조 때까지 근 100년간 조선의 조정이 만주와 일본 열도에서 일어난 변화, 즉 동북아 정세에 대응하지 못한 탓이라고 분석한다. 정치권이 할 일을 제때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라가 기울고 백성이 나락으로 떨어진 것이다. 난리가 터진 뒤에 선조가 잘못했느니, 율곡의 10만 양병설이 어떠니 갑론을박하는 게 무슨 소용인가. 집안에서 학대받은 자식이 집안의 안위를 위해 몸을 던지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군을 마냥 두들길 때가 아니다. 정치권이 유념해야 할 일이다.

이중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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