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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ESC] 마살라 피자 먹고 크리켓 보고···인도의 뜨거운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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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미미의 인도 살이 ②

인도의 알프스 마날리 한 카페

크리켓 준결승전 경기 중계

지역 역사에 재미난 일화 있어

카스트제도에 대해 의문도

신분제 상관없이 하나 만드는 크리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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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인도 북부지방, 해발 2050m에 위치한 마날리의 로컬 카페. 대형 스크린에는 크리켓 경기가 한창이다. 어제부터 스태프들이 창문에 인도 국기를 분주히 붙이기에 무슨 명절인가 물어봤더니, 바로 오늘이 인도 대 뉴질랜드의 크리켓 경기, 그것도 무려 크리켓 월드컵 준결승전이 열리는 날이란다. 스태프가 꼭 경기를 보러 오라며 포스터를 나눠줬는데, 경기 시간이 가히 충격적이다. 오후 3시부터 자정까지. 응? 9시간 동안 경기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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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4시쯤 조심스레 카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맥주 한잔씩 놓고 크리켓을 관람하는 인도 사람들로 가득하다. 머리에 터번을 두른 시크교 할아버지, 마날리 지방 특유의 납작한 모자를 쓴 중년의 친구들, 화려한 사리를 두른 젊은 부인과 크리켓 운동복을 입은 딸 등 모두 한마음이 되어 인도를 응원하고 있었다. 빈자리가 없기에 서양인 여행객 혼자 앉은 테이블에 가서 자리를 나눠 앉았다. 이스라엘에서 왔다는 그도 나처럼 크리켓에 전혀 관심이 없는 듯했다.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자 눈을 동그랗게 굴리며 아예 이어폰을 끼고 유튜브를 보기 시작했다.

크리켓은 인도의 국민 스포츠다. 티브이의 거의 모든 시에프(CF)는 크리켓 스타 선수들이 다 꿰차고 있고, 길거리 좁은 골목길에서도 크리켓을 하는 아이들을 자주 본다. 정치적 앙숙인 파키스탄과의 경기는 우리나라 한일전 뺨치게 치열하다. 그런 크리켓인 만큼, 나도 한번 제대로 보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규칙은 커녕 재미도 잘 모르겠고, 오히려 크리켓을 관람하는 인도 사람들을 관람(?)하는 것이 더 재미있었다. 타자의 헛스윙에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고, 쉴 새 없이 맥주와 피자(마살라 피자!)를 시키고, 타자가 홈으로 들어오면 다들 일어나 괴성을 지르는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니 괜스레 나도 같이 인도를 응원하고 싶어졌다. 한국에 사는 외국인들이 붉은 악마가 되는 기분이 이런 걸까.

하지만 인도의 알프스(사진을 본 친구들은 강원도 혹은 가평 아니냐고 했지만)라 불리는 마날리까지 와서 크리켓만 볼 순 없었다. 마날리의 어원을 찾아보기로 했다. 오, 과연 전설의 나라답게 마날리에도 옛날부터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었다.

마날리는 ‘마누’라는 왕 이름과 줄기라는 뜻의 ‘왈리’가 합쳐진 이름인데, 이 ‘마누설화’라는 것이 완전 인도판 노아의 방주다. 역시 이야기의 원형은 동서고금 통하는 게 있는 걸까? 마누왕은 어느 날 낚시를 하다가 물고기 한 마리를 잡았다. 근데 이 물고기가 살려달라고 사람 말로 애걸한다. “나를 구해줘요. 그러면 나도 장차 당신을 구해줄 테니.” 마누는 범상치 않아 보이는 이 물고기를 잡아먹지 않고 작은 병에 넣어 키우기 시작했는데, 물고기가 며칠 새 코끼리만큼 컸다. 바다에 자신을 놓아주는 마누에게 물고기는 “나를 죽이지 않아 고맙다”며 조만간 큰 홍수가 일어날 것이니 아주 커다란 배를 만들어서 모든 동물을 한 쌍씩 태우라고 이른다. 마누는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배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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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뒤 정말 홍수가 일어났고, 마누는 배에 동물들을 실어 표류하기 시작한다. 물고기는 알고 보니 용왕급의 인도 신이었고, 마누의 표류하는 배를 끌어 절반쯤 물에 잠겨 있던 히말라야산맥의 꼭대기에 닿을 수 있게 해주었다. 그곳에서 마누는 감사의 표시로 우유와 버터를 물속으로 제물 삼아 던지는데, 그게 한 덩어리로 엉키더니 몇 달 뒤 ‘이다’라는 여자로 변했다고 한다. 그렇게 마날리에서 자자손손 살아남았다는 인도의 옛날이야기.

이야기 속에 나오는 마누왕은 힌두교에서 최초의 인류라고 알려진 동명이인 마누의 열번째 증손자라고 하는데, 이 오리지널 마누 할아버지가 바로 힌두교도들을 위해 인도 최초로 생활지침서 <마누법전>을 썼다. 그 책에는 우리나라 사람에게도 유명한, 혹은 악명 높은 카스트제도가 힌두교 사상 처음으로 정립돼 있다.

힌두교 창조의 신인 브라마의 머리에서 나온 최상위 계층 브라만(지식인들), 브라마의 팔에서 나온 크샤트리아(정치, 치안 담당), 허벅지에서 나온 바이샤(농업과 상업), 발에서 나온 수드라(그 외 허드렛일). 그리고 브라마의 그 어떤 신체 부위에서도 기인하지 않은 달리트(하리잔. 접촉할 수 없는 천민)로 불리는 최하위 계층은 힌두교 사원에 그림자조차 드리우면 안 되고, 단지 경전만 보아도 눈을 뽑고, 경전을 읊으면 혀를 뽑고, 혹시라도 상위 카스트와 신체접촉이 있었을 시 본인의 신체를 절단해야 한다고 쓰여 있단다. 하드코어가 따로 없다. 기원전 200년 즈음에 쓰였으니, 지금은 어떨지 궁금했다.

인도에 와서 가장 궁금했던 점은 카스트제도가 생활 속에 아직 남아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초반에는, 지금 생각하면 정말 매너 없는 미친 짓이지만, “너 카스트가 뭐야?”라고 인도 친구에게 물어보기도 했다. 마음이 넓은 친구라 천만다행이었다. 그때 그 친구가 한 말이 생각난다. “태어날 때부터 카스트가 정해져 있지만, 사실 지금은 그렇게 심하게 따지진 않아. 근데 결혼할 때는 같은 카스트끼리 해야 해. 그래서 난 인도에서 결혼 같은 거 안 하려고.” 다른 이야긴데 그 친구는 한국인 여자친구와 결혼해서 델리에서 한국식 빙숫집을 여는 게 꿈이라고 한다. 그의 꿈이 꼭 이뤄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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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째 인도에서 사업을 하는 한국인 지인은 카스트제도는 헌법상 폐지되었다고 한다. 정말 그럴까? 나는 살면서 의구심이 많이 들었다. 그렇다면 왜 같은 아파트에 사는 할머니는 엘리베이터를 타면 내게 버튼을 누르라고 명령을 하는지, 왜 화장실에는 항상 변기를 닦으며 손님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사람이 있는지, 왜 마트에 자기 손은 까딱하지도 않고 카트를 미는 점원에게 모든 물건을 담으라는 마담이 있는지, 외제 차를 타고 명품으로 온몸을 휘감고 다니는 부자들도 왜 이리 많고, 쓰러져 가는 움막집에 넝마만 걸치고 구걸하는 거지들도 왜 이리 많은지.

인도 헌법에서 카스트 차별을 폐지한 것은 맞다. 그리고 카스트 할당제가 있다. 학교나 관공서 등에서 일정 비율 이상의 하위 카스트를 뽑는 정책이다. 그 때문에 역차별이 일어난다며 차라리 본인의 카스트를 낮춰달라는 시위가 몇 년 전에 벌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생활 속에서의 카스트제도는 여전히 힘이 막강하다.

직업에 귀천이 없고 만인은 평등하다고 배웠지만, 현실은 대단히 그렇지 않은 대한민국. 대놓고 직업에는 귀천이 있고 만인은 태어날 때부터 불평등하다는 인식이 생활에 뿌리박혀 있는 인도. 어느 쪽이 더 살기 어려운 나라일까.

인도인들의 크리켓 응원은 밤새 계속되었다. 다음 날 아침 식사를 하러 나온 인도인들의 눈 밑에는 다크서클이 짙게 깔려 있었다. 전날 밤 뉴질랜드와의 준결승전에서는 비록 졌지만, 크리켓은 13억 인도 사람들을 카스트와 무관하게 하나로 묶어주는 매개체 중 하나인 것은 확실하다.

작은미미(뮤지션·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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