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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수의 서울미술기행] 갓 쓴 선비들의 '최후의 만찬', 이 그림의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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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를 극복한 의지의 화가 운보 김기창... 참으로 아쉬운 오점 하나

근대기 문화계에서 시인 이상(李箱, 1910-1937)과의 우정으로 많은 화제를 불러 모았던 서양화가 구본웅(具本雄, 1906-1953)은 선천적인 척추 장애를 가졌으나, 미술로 인생의 희망을 이어나간 특이한 인물이었다. 그는 '한국의 로트렉'이라 불리며 한국 화단에 '야수파' 화법의 그림을 소개한 상징적 인물이 되었다.

서양화단에 구본웅이 있었다면 동양화단엔 운보(雲甫) 김기창(金基昶, 1913-2001)이 있다. 김기창은 어려서 병을 앓으며 얻은 귀가 들리지 않는 천형과 한평생 함께 하면서도 많은 훌륭한 작품을 남겨 한국미술사에 한 획을 그었다. 그는 남다른 창작 욕구로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미술의 경지를 찾아 결국 이루어내고야 마는 불굴의 의지를 보였다.

김은호 문하에 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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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복도’ 1934년, <운보 김기창>(경미출판사, 1980년) 재촬영. ⓒ 운보 김기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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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창의 미술계 입문은 어머니 한윤명의 자식에 대한 애정에서 시작한다. 김기창은 여유 있는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8세에 앓은 장티푸스로 청신경 마비가 와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된다. 승동보통학교에 들어갔으나 청각 장애로 수업을 제대로 듣지 못해, 시간이 날 때마다 공책에 사람, 나무, 새 등 그림을 그렸다. 아들이 그림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어머니는 그림을 배울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한다.

김기창의 집은 창덕궁 앞 운니동에 있었는데, 마침 주변에는 고희동, 김은호 등 유명한 화가들이 살고 있었다. 김기창의 집안은 독실한 기독교 집안으로 인사동에 있는 승동교회를 다니고 있었다.

교회에 나가던 어머니는 같은 기독교인으로 안동교회에 다니는 유명한 화가가 이웃에 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사람이 바로 300미터 정도 밖에 안 되는 가까운 권농동에 사는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 1892-1979)였다. 김은호는 이미 임금의 어진을 그려 '어진화가'로 불리던 유명한 화가였다.

어머니는 김기창을 데리고 김은호의 집 '낙청헌(絡靑軒)'을 찾아가 지도를 부탁한다. 이때가 1930년, 김기창의 나이 17세 때였다. 김기창은 그림에 관해선 타고난 재주가 있어 실력이 하루가 다르게 나아졌다. 화실에 나가 그림을 배운지 반 년 만에 당시 미술계 등용문이었던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처음으로 입선한다.

귀가 들리지 않는 몸으로 입선을 한 것이 화제가 되어 신문에 대서특필되기도 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승승장구하여 김은호의 대표적인 제자로서 일약 유명세를 타게 된다. 이때 어머니는 아들에게 '운포(雲圃)'라는 호를 지어준다.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일본인 스승과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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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 1934년/ <운보 김기창>(경미출판사, 1980년) 재촬영 ⓒ 운보 김기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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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창은 1931년 10회 조선미전에서 처음으로 입선한 후 한 해도 빠뜨리지 않고 연속해서 수상을 한다. 1937년 특선한 후 연속해서 4회를 특선하여 추천작가가 된다. 특히 제16회 조선미전에서는 '고담(古談)'이란 작품으로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17회에서는 '하일(夏日)'이라는 작품으로 총독상을 수상하기도 한다. 이후 추천작가로서 1944년 마지막 전람회까지 계속 출품한다. 그러니 처음 입선한 후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조선미전에 출품한 셈이다.

1935년 조선미전에는 일본 화단에서도 유명한 노다 규호(野田九浦' 1879-1971)가 심사위원으로 참석한다. 노다 규호는 수상자 중 뛰어난 솜씨를 보인 김기창에게 많은 관심을 보인다.

김기창은 노다 규호의 칭찬에 감복하여 이때부터 새로운 미술세계가 있음을 짐작하고 노다 규호를 따르기 시작한다. 그는 조선미전이나 다른 전시가 없는 한가한 때에 도쿄로 가 노다 규호의 화숙을 찾는다. 그의 화숙에서 역사화나 채색화 또는 일본의 새로운 미술사조인 신남화 등을 보며 자신의 미술세계를 되돌아본다.

김기창은 이후 여러 번의 일본행에서 많은 것을 느끼고, 김은호의 미술세계에서 벗어나 새로운 그림을 그릴 것을 결심한다. 이미 일본은 에도시대를 거쳐 메이지 유신을 지내며 일본화에도 많은 변혁이 있었다. 전통적인 일본화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창조적인 면이 강한 '신일본화'가 자리 잡았다. 젊은 미술학도인 김기창은 도쿄에서 이러한 풍조에 강한 매력을 느껴 자신의 미술세계를 바꾸기로 결심한다.

그동안 스승의 영향을 받아 단정한 필치로 북종화풍의 얌전한 그림을 그렸던 것에서 벗어나, 자신의 장점인 강한 필선을 살려 빠른 획을 중심으로 생동감 있는 화면을 나타내고자 많은 노력을 하였다. 글씨도 김은호의 영향을 받아 단정한 필체를 구사하였었는데, 자유롭게 획을 구사하는 특유의 글씨체로 바꾸기 시작한다.

당시 한국에서는 이러한 글씨를 쓰는 이가 없었다. 김기창이 새로 쓰기 시작한 글씨는 일본 최고의 화가라 불리는 도미오카 뎃사이(富岡鉄斎, 1837-1924)에서 시작하여 그의 영향을 받은 많은 일본인 화가들이 쓰던 특이한 필체였다. 이런 새로운 형식의 그림과 새로운 글씨로의 변화는 이제 스승의 품안에서 벗어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기도 하였다.

박래현과의 만남과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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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기창·박래현 결혼 사진, <운보 김기창>(경미출판사, 1980년) 재촬영 ⓒ 운보 김기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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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을 오가며 미술공부를 하던 김기창은 촉망받는 여류 화가 우향(雨鄕) 박래현(朴崍賢, 1920-1976)과 사귀며 결국 결혼에까지 이른다. 당시 이들의 연애와 결혼은 당시 화단의 최고 화제였다. 촉망받는 화가였으나 귀가 들리지 않는 장애가 있는 청년과 도쿄로 유학한 신여성 화가 박래현과의 사랑은 마치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로맨틱하였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1943년이었다. 당시 박래현은 24세로 도쿄에 있는 여자미술전문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인 재원이었다. 그는 당시 화명을 날리던 김기창을 만나려 운니동 김기창의 집으로 찾아갔다. 박래현은 김기창이 50세가 넘은 나이 많은 화가로 생각하여 인사차 갔던 것인데, 당시 김기창의 나이는 30세밖에 되지 않았다.

첫눈에 반한 김기창은 박래현이 도쿄로 돌아가자 계속 편지를 보내 그녀의 환심을 산다. 김기창의 4년간의 끊임없는 열정에 처음에는 '바위 덩어리처럼 시커먼 물체'처럼 보였던 박래현도 애정을 느끼게 되고, 결국 두 사람은 4년 뒤 결혼을 한다. 결혼한 두 사람은 부부 이전에 예술적 동반자였다.

미술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던 두 사람은 서로를 존중하면서 미술세계를 넓혀갔다. 같은 공간에서 살며 작업하다 보니 두 사람의 예술세계는 서로 다른 듯 닮아갔다. 마치 피카소와 브라크의 그림이 서로 닮아 예술의 동반자임을 드러냈듯이 김기창과 박래현의 한 시기의 그림은 서로 비슷한 면을 많이 보였다.

해방 후 추상화로의 경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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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자의 이미지 2’ 1965년, <운보 김기창>(경미출판사, 1980년) 재촬영. ⓒ 운보 김기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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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창과 박래현은 해방과 6.25전쟁을 거친 이후에는 추상미술에 경도되어 한동안 비구상 미술에 심혈을 기울인다. 당시 전후 화단은 세계적으로 앵포르멜(Informel), 곧 비정형(非定形) 회화가 대유행하였다. 두 사람도 세계적 흐름에 따라 자신들의 미술 세계를 새롭게 하였다.

두 사람의 추상 작업은 기하학적 추상을 배제하고 화면에 서정적이고 감성적인 느낌을 강조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격정적이고 주관적인 호소력을 보인 서구의 표현주의적 추상예술과는 달리 이들의 그림은 매우 부드럽고 따뜻한 색채 감각의 화면을 보였다.

기독교 신앙과 성화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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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후의 만찬’ 1952년, <운보 김기창>(경미출판사, 1980년) 재촬영 ⓒ 운보 김기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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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창은 모태신앙의 기독교인이었다. 그럼에도 주역이나 관습적 금기에 의지하는 반 기독교적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는 사주나 운명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는 어떤 일을 할 때 늘 때와 시를 보았다. 급기야는 아내 '박래현(朴來賢)'의 이름이 좋지 못하다고 생각해서 한자 이름을 '박래현(朴崍賢)'으로 바꾸기도 하였다. 그러면서도 종교적으로는 늘 기독교에 기대어 살았다.

1952년 6.25전쟁이 한창일 때 김기창은 기독교인으로서 필생의 대업으로 예수의 일생을 그릴 것을 결심한다. 지난한 전쟁의 고난이 그리스도의 고난과 같다고 생각한 탓이다. 그는 이스라엘 사람으로서의 예수가 아닌 한국인으로서의 예수를 그리기로 마음 먹는다. 등장인물이나 배경을 모두 한국적인 풍경으로 바꾸어 그렸다.

종교적인 주제라 풍속화 특유의 해학보다는 고결하면서도 신앙적인 독백이 가득 들어가 있다. 이 예수 일대기는 모두 30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한국의 종교화로서 최고의 경지에 있는 작품이라 할 만한 걸작이다. 또한 김기창의 예술세계를 대표하는 최고의 작품으로도 손색이 없다.

청록산수와 바보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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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산도’ 1967년, 김기창(갤러리현대, 2000) 재촬영 ⓒ 운보 김기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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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창의 회화적 업적 중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말년에 주로 작업한 '청록산수'와 '바보산수'라 할 수 있다. 청록산수는 김기창의 이름을 가장 유명하게 만들었고 가장 많은 판매를 이룬 양식이다.

1970년대에 시작하여 말년까지 그의 미술의 대명사처럼 불린 청록산수는 그 이전 한국 미술에서는 보기 어려운 미술 형식이었다. 화면 전체를 푸른 색조로 산수를 그리고, 그 안에 소를 모는 소년이나 빨래하는 여인을 넣는 형식이었다. 이 그림은 엄청난 인기를 누려 당시 동양화 붐을 이끌며 한국화의 대명사처럼 불렸다.

김기창의 청록산수는 매우 인기는 있었으나 뛰어난 예술성을 가진 것으로 평단의 평가를 받지는 못했다. 청록 산수는 우리 화단에서는 새로운 양식이었으나 이미 일본에서는 오래 전부터 많이 구사하였던 보편적인 그림이었다.

한국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고 김은호의 스승으로도 유명한 유키 소메이(結城素明, 1875-1957) 등 많은 일본 화가들이 이와 유사한 그림을 그렸다. 특히 교토 지방의 남화에서 초록색과 푸른색이 감도는 산수풍경은 가장 중심이 되는 색조였다.

김기창은 자신의 그림 중에서 대중들에게 가장 인기가 있었던 이 청록산수에 만족스럽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가 살아 있을 때인 1980년에 출판된 대표작을 주로 실은 도록에도 청록산수가 한 점도 실려 있지 않다. 이를 보면 많은 이들이 찾아 유명하게 된 그림이지만 자신이 추구한 미술세계를 담고 있는 것이란 생각은 하지 않은 듯하다.

'청록산수'보다 김기창의 미술을 한 차원 높게 만든 것으로 평가받는 작품 형식은 단연 '바보산수'라 불리는 형식이다. 바보산수는 주로 1975년경부터 그리기 시작하였는데, 한국의 전통적인 회화양식인 민화를 재해석한 것이다. 김기창은 한국의 민화를 매우 좋아하여 많은 작품을 수집하기도 하였는데, 이런 과정을 통해 자신의 작품에 대한 영감을 많이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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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벽 종소리’ 1975년, <운보 김기창>(경미출판사, 1980년) 재촬영 ⓒ 운보 김기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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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창의 바보산수는 단지 민화의 내용을 차용한 수준의 것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화업의 길을 걸으며 체득한 한국적인 것에 대한 열망과 예술가로서의 감흥이 맞물려 이루어진 한국적인 마음의 표상이었다. 실제 그의 바보산수는 도식적인 민화와 달리 해학과 익살을 담고 있으면서도 대범한 붓의 활용과 뛰어난 채색 등으로 새로운 미술 갈래를 창조한 것으로 보인다.

바보산수 속에는 인간과 자연이 조화롭게 공존하고 있어, 미술이 인간의 삶에서 어떤 것을 보여주어야 하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어쩌면 김기창은 모든 것이 서구화되는 어려운 시대에 현대 동양화가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가를 보여주려 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밖에 한자의 형태를 추상화하여 '문자화(文子畵)'를 개발하려 노력한 것 등 김기창의 끊임없는 창조적인 노력은 많은 화가들이 본받을 만한 일이다.

다만 일제강점기 말년 태평양 전쟁 시기에 일본 제국주의의 정책에 협조한 친일 행위에 대해서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해결해야만 하는 큰 문제를 안고 있다. 이는 그의 스승인 김은호의 친일 행위와도 연결되는데, 한국 근대 미술계의 가장 큰 줄기인 이들의 행위에 이러한 오점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황정수 기자(galldad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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