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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생확대경]두 권의 해례본, 두 번의 숨바꼭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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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눈 피해 16년간 '꼭꼭' 숨겼던 전형필

1000억 보상금 달라며 해례본 감춘 배익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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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8년 존재가 알려진 뒤 자취를 감췄던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의 소장자 배익기 씨가 지난 2017년 공개한 상주본 일부 모습(사진=배익기 씨 제공).


[이데일리 윤종성 기자] 영어 알파벳을 누가, 언제, 어떻게, 무슨 이유로 만들었는지 아는 사람은 없다. 영어 뿐 아니라 히라가나·한자 등 세상 모든 문자들이 다 그렇다. 단 하나 한글을 제외하면 말이다. 한글은 창제 원리를 명확히 알 수 있는 유일한 문자다. ‘훈민정음 해례본’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간송, 일제로부터 지키기 위해 숨겨

훈민정음은 크게 예의와 해례로 나뉜다. 예의는 세종대왕이 직접 한글을 만든 이유를 간략하게 설명한 것이다. 국어 시간에 외웠던 “나라말싸미 듕귁에 달아…”라는 구절이 담긴 글이 바로 ‘예의본’이다. 해례본은 집현전 학사들이 한글의 자음과 모음을 만든 원리와 용례를 설명한 한글 해설서다. 예컨대 “초성은 중성의 위에 놓이거나 왼쪽에 놓이는데, ‘군’의 ㄱ이 ㅜ 위에 있다” 등으로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해례본은 지난 1940년 경북 안동에서 문화재 수집가였던 ‘간송’(澗松) 전형필(1962년 작고)이 처음 발견했다. 간송은 일제가 한글의 가치를 깎아내리기 위해 해례본을 없애려 한다는 걸 알고는 수소문 끝에 찾아내 사재 1만원을 털어 사들였다. 당시로서는 기와집 10채 값에 맞먹는 큰 돈이었다. 그후 간송은 일제의 눈을 피해 해례본을 16년간 꼭꼭 숨겼다. 그리곤 1956년 해례본을 세상에 내놨다. 지금 한글이 세계에서 가장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문자로 칭송받는 것은 모두 간송 덕이다.

세상에 딱 한 본뿐인 줄 알았던 훈민정음 해례본은 2008년 7월 경북 상주에서 두 번째로 발견됐다. 상주에서 발견돼 ‘상주본’이라 불리는 이 책은 고서적 수입판매상 배익기씨가 공개했다. 국보 제70호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된 간송미술관 소장본(간송본)과 같은 판본이면서도, 간송본에 없는 훈민정음 반포 당시 연구자의 주석이 달려 있고 보존 상태도 좋아 학술적 가치가 더 높은 것으로 평가받았다.

배씨도 해례본을 숨겼다. 무려 11년째다. 다만 간송이 해례본을 지켜내기 위해 일제 눈을 피해 숨겼다면, 배씨는 돈을 챙기려 국민 눈을 피해 해례본을 감췄다. 해례본의 법적 소유권은 문화재청에 있는 데도, 배씨는 “1000억원을 달라”며 생떼를 부리는 중이다. 2008년 상주본 공개 당시 값으로 매길 수 없는 ‘무가지보’(無價之寶) 문화유산이라는 뜻에서 ‘1조원 가치’를 운운했는데, 이를 근거로 10분의 1의 보상금을 달라는 것이다.

◇배씨, 턱도 없는 욕심에 1000억 달라 생떼

며칠 전 배씨는 문화재청의 서적 회수 강제집행을 막아달라며 국가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최종 패소했다. 이 판결로 상주본 소유권자인 문화재청이 강제집행에 나설 수 있게 됐지만, 배씨는 여전히 떵떵거리며 ‘버티기’ 중이다. 되레 문화재청이 배씨 눈치를 살피고 있다. 괜시리 배씨를 자극해 책이 훼손될까봐 걱정이다.

배씨는 착각하고 있다. 엄밀히 말해 해례본은 정상 거래가 불가능한 은닉 문화재로, 경제적 값어치는 1조원이 아니라 ‘0원’이 맞다. 그런데도 1000억원 보상은 누가봐도 무리한 요구다. 문화재청도 좀 더 확실한 협상안으로 배씨를 설득해야 한다. 정재숙 문화재청장이 직접 나서 대안을 찾아보는 것도 방법이다. 이와 별개로 문화재 회수를 위한 실효성 있는 절차 마련도 고민해 볼 때가 됐다. ‘제 2의 배익기’는 감당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