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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국보 1호가 신라인 사찰에 모셔진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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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온함과 함께 신비감을 자아내는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의 미소.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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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의 자취-2] 2013년 '세계 3대 박물관'이라는 뉴욕 메트로폴리탄박물관(메트)은 신라문화의 우수성을 조명하는 '황금의 나라, 신라'전을 기획했다. 전시회는 처음부터 메트의 그해 최대 메인전으로 준비됐다. 그 기간만 2008년부터 5년여가 걸렸다. 전시기간도 추수감사절, 크리스마스 등 미국 최대 명절이 집중된 10월 29일부터 이듬해 2월 23일까지로 잡혔다.

메트 측이 우리 측에 요구한 전시품 대여목록에는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83호), 국보 제191호 황남대총 북분 금관, 국보 제90호 경주부부총 금귀걸이 등 신라의 대표 국보가 총망라됐다.

그런데 문화재청이 전시회가 임박한 시점에서 문화재 보호를 이유로 갑자기 83호 반출을 불허했다. 귀중한 국보가 해외에 너무 자주 불려 나간다는 이유였다. 실제 이전까지 83호는 광복 이후 전시를 위해 해외에 아홉 번이나 출품됐고 날수로 계산하면 3000일이 훨씬 넘었다. 이를 대체해 국보 제78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78호)을 보내겠다고 통보했지만 메트 측은 거부했다. 메트는 83호를 빌려주지 않는다면 전시회를 취소할 수도 있다고 으름장을 놨다. 결국 상급기관인 문화체육관광부가 중재에 나서 83호를 출품하기로 결론을 내렸고, 83호를 전면에 내세운 뉴욕전은 유례없는 대성공을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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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인의 놀라운 주조기술을 보여주는 국보 제83호 전체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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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조각의 최고봉이라는 78호에 굴욕을 안긴 83호는 '우리 국보의 대표 얼굴'로 얘기될 만큼 한국 조각사의 기념비적인 걸작이다. 조화로우면서도 생동감 넘치는 신체와 선명한 이목구비, 자연스럽고 입체적으로 처리된 옷주름 표현은 신라인의 놀라운 주조 기술을 잘 보여준다. 더욱이 은은하게 퍼지는 고졸한 미소는 종교적 숭고미를 느끼게 한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의 저자 최순우는 이 미소에 대해 "슬픈 얼굴인가 보면 그리 슬픈 것 같지 않고, 미소 짓고 있는가 하면 준엄한 기운이 누르는, 무엇이라고 형언할 수 없는 거룩함"이라고 묘사했다.

반가사유상은 여타 불상과 비교할 때 독특한 형상을 하고 있다. 오른쪽 다리를 왼쪽 무릎 위에 올려놓은 반가(半跏)의 자세이다. 왼손을 오른쪽 다리 위에 두고, 오른쪽 팔꿈치는 무릎 위에 붙인 채 손가락을 살짝 뺨에 대고 깊은 생각에 잠긴 모습이다. 반가사유상은 부처가 어린 시절 인생무상을 느끼고 중생 구제를 위해 고뇌하는 모습을 표현한 '태자사유상'에서 그 기원을 찾는다.

인도 북부의 고대국가 카필라국 태자였던 싯다르타 태자는 12세 되던 어느 봄날 아버지 슈도다나왕과 성 밖으로 행차를 한다. 그는 그곳에서 땀 흘리며 힘겨워하는 농부들, 채찍에 맞아 고통스럽게 쟁기를 끄는 소, 흙 속에서 파헤쳐져 새들에게 잡혀 먹히는 벌레들의 몸부림, 다시 그 새를 낚아채는 독수리를 목격하고서 큰 충격을 받는다. "왜 살아있는 생명들은 서로 먹고 먹혀야만 하나, 왜 그 고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삶과 죽음을 반복해야 하나, 모두 더불어 행복할 수는 없는 걸까."

싯다르타 태자는 염부나무 아래에서 약육강식과 생로병사에 대한 깊은 고민에 빠져들었다. '과거현재인과경(過去現在因果經)' '불본행경(佛本行經)' 등 부처의 전생담을 적은 불경 속 일화이다. 부처가 부귀영화를 버리고 출가하는 계기가 되는 사건이다. 이 첫 깨달음을 형상화한 것이 사유상이라는 것이다.

사유상의 또 다른 해석은 미래불인 미륵불과 연관돼 있다. 석가모니가 열반한 후 56억7000만년, 즉 인간의 수명이 8만세가 되는 때, 미륵보살이 세상에 나와 성불하고 3회의 설법으로 272억명의 사람을 깨달음의 경지로 인도한다는 게 미륵불 신앙이다. 미륵보살은 먼 미래를 생각하며 명상에 잠기는데 이를 담은 것이 사유상이라는 견해다. 여기에 근거해 반가사유상의 명칭도 '미륵보살반가사유상'으로 지어진 것이다.

사유상은 2세기께 인도 쿠사나왕조에서 시작돼 3~4세기 중국에 전해졌다. 5세기 전반~6세기 후반의 남북조시대(동위, 북제)에 이르러 사유상 제작 빈도가 급증했고 모습도 반가사유상으로 정형화된다. 우리나라는 6세기 후반부터 7세기에 걸쳐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에서 모두 유행했다.

83호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박물관이 골동품상에 구입해 이왕가미술관(덕수궁미술관)에 소장했다가 광복 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소유권이 넘어왔다. 경주의 노부부가 나정 인근의 신라 초기 박씨 왕들의 무덤으로 알려진 오릉에서 찾은 것이라고 전해져 왔다. 오릉에는 담엄사라는 사찰이 존재했었다. 그러나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고 황수영 씨는 추적 조사를 통해 83호의 발견지가 경주 내남면 남산 서쪽 기슭의 사찰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힌 바 있다. 오릉과 내남면은 다소 떨어져 있지만 같은 남산 자락인 것으로 미뤄 83호는 남산 어귀의 사찰 또는 무덤에서 수습한 것이 확실해 보인다.

제작 시기는 '7세기 전반 신라시대', 구체적으로 선덕여왕 시기라는 의견이 주류를 이룬다. 일각에서는 '7세기 후반'도 말한다. 당시 백제의 예술 수준이 최고조에 도달했던 점을 고려할 때 통일신라의 신질서에 편입된 백제 장인이 전승기념사업이라는 새로운 예술 수요를 배경으로 만들었다는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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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국보 제1호 목조미륵보살반가사유상.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야스퍼스가 "인간이 만들 수 없는 예술품"이라고 극찬했던 불상이다. 신라에서 만들어 일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호류지 소장


83호 하면 늘 함께 거론되는 불상이 있다. 일본 국보 제1호 고류지(廣隆寺) 목조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다.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야스퍼스가 "이야말로 고대 그리스나 고대 로마의 어떤 조각 예술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며 감히 인간이 만들 수 없는 살아 있는 예술미의 극치"라고 극찬했던 불상이다. 놀랍게도 두 불상은 같은 사람이 만들었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을 만큼 외관이 흡사하다.

일본서기 스이코(推古) 13년(603)조에 "쇼토쿠 태자가 모든 대부들에게 '나에게 존귀한 불상이 있다. 누가 이 불상을 가져다 예배하지 않겠는가'라고 묻자, 진하승이 나와 '제가 예배하겠습니다'고 말하고 즉시 불상을 받았다. 그리고 봉강사를 세웠다"고 기술돼 있다. 쇼토쿠(聖德·574~622)태자는 일본의 첫 번째 여왕이던 제33대 스이코 일왕(554~628·재위 592~628)때 왕을 대신해 섭정을 했던 인물이다. 그는 한국계 혈통으로 유명하다. 진하승(秦河勝) 역시 교토 호족으로 신라인이었다. 봉강사(蜂岡寺)는 교토 고류지의 옛 이름으로 신라 진씨 가문 사찰이었다. 한일 학자들은 일본서기에 기록된 이 불상을 목조반가사유상으로 단정한다. 불상의 나무도 한반도에만 자생하는 적송(춘양목)이다.

이를 근거로 83호와 목조반가사유상은 6세기 초 신라에서 조성됐고 이 중 목조반가사유상은 이후 일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본다. 1994년 일본 국보수리소 다카하시 준부도 "두 불상은 같은 공방에서 한 장인에 의해 제작된 것"이라고 발표하면서 83호가 고류사 불상의 원형임을 확고히 했다.

83호는 고류지목조반가사유상보다 예술적으로 앞서 있다. 83호는 무게 112.2㎏에 높이가 93.5㎝다. 고류사 것은 이보다 작다. 얼굴은 상대적으로 83호가 가냘프다. 무엇보다 83호가 고류사 불상을 능가하는 것은 청동으로 주조했다는 사실이다. 청동의 두께는 5㎜에 불과한데도 흠집이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세계적으로도 83호와 같은 청동상은 매우 귀하다. 전쟁 때 모조리 녹여 무기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과연 야스퍼스가 83호를 접했다면 어떤 평가를 내렸을까.

83호의 특이점으로는 왼쪽 다리가 별도로 마련된 연화족좌(蓮花足座) 위에 놓여 있는데 왼쪽 발과 족좌의 앞부분은 후대에 수리됐다는 것이다. 수리한 부분에서 본체에 없는 납 성분이 검출됐다. 보수 시기는 통일신라시대 후기일 것으로 판단된다. 뒷머리에는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光背)를 붙였던 흔적이 있으며 귓불에 구멍이 뚫려 있다. 감마선을 투과한 결과, 불상의 팔과 다리, 몸통 내부에는 주조 과정에서 뼈대로 사용했던 철심도 발견됐다.

국보로 지정된 반가사유상은 83호를 포함해 78호, 118호 등 3점이다. 보물 역시 331호, 368호, 643호, 997호 등 4점이 있다. 78호는 1912년 일본인이 입수해 조선총독부에 기증했던 것을 1916년 총독부박물관으로 옮겨 놓았고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다. 네모꼴에 가까운 얼굴은 풍만한 느낌을 준다. 보관 위에 초승달과 둥근 해를 얹어 놓은 일월식(日月飾) 장식이 눈길을 끈다. 이러한 보관은 이란 사산조 왕관에서 유래했다. 6세기 중엽이나 그 직후의 작품으로 생각된다. 부여 부소산성에서 하반신만 발굴된 반가사유상과 흡사하다는 점에서 백제 것이라는 설이 우세하다.

[배한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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