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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보다 배꼽이 더 큰 건물들'…갭투자 피해는 임차인들이 떠안았다 [모래 위에 쌓은 '갭투자'의 공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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갭투자 피해만 키우는 ‘시한폭탄’ / 신탁회사 도덕적 해이 / 금융사 직원·건물주 ‘짬짜미’ 정황 / 건물값보다 많은 대출



갭투자 피해는 건물주가 집값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부동산 담보대출을 받으면서 비롯된다. 그나마 담보대출을 받기 전부터 살고 있던 초기 세입자는 피해가 적은 편이다.

건물주는 다른 부동산 투자나 사업 목적 등으로 대출을 계속 늘려나간다. 이 과정에서 집주인은 더 많은 대출을 받기 위해 세입자들의 보증금 규모를 축소해 금융기관에 제출한다. 대출실적을 올리려는 일부 금융기관은 서류 진위를 제대로 확인도 않고 대출에 나선다. 전세보증금과 대출금을 합치면 갭투자 수준(집값의 80% 안팎)을 넘어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상황까지 된다. 이제 갭투자의 시한폭탄이 터지는 건 시간문제일 뿐이다.

금융기관으로서는 조금 부실한 대출이더라도 손해볼 일이 거의 없다. 선순위 세입자들이 계약기간 만료로 빠져나가고 새 세입자가 들어오면 이들은 금융기관보다 후순위에 있기 때문에 배당 시 금융기관이 먼저 돈을 받는다. 부동산을 공매에 넘길 권리는 전적으로 금융기관이 쥐고 있다.

금융기관의 ‘모럴 해저드’는 갭투자 피해를 묵인하고 심지어 키우고 있는 셈이다. 일부 금융기관 직원은 수사기관의 수사대상으로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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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기관의 대출서류 조작 정황 드러나

15일 세계일보 취재진은 세입자 142명이 100억여원의 피해를 본 서울 영등포구 ‘R하우스’에 대해 이뤄진 담보대출의 대출전표 13장을 입수해 분석했다. 신용이 좋지 않은 건물주 이모(59·구속)씨한테 대출용도로 명의를 빌려준 이정석씨가 대출 금융기관인 새마을금고로부터 확보한 것이다.

이 대출전표는 새마을금고 측이 기존에 대출을 해줬던 A신용협동조합의 대출금 등을 대신 갚아줬다는 영수증과도 같다.

부동산을 담보로 은행에 돈을 빌리는 사람은 일반적으로 대출금을 받자마자 그 전에 부동산에 걸려 있는 빚을 모두 갚아야 한다. 대출 즉시 이전에 부동산을 담보로 빌린 돈을 갚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대출이 확정되고 이때 발행되는 대출전표는 금융기관이 신규 대출을 올바르게 실행했다는 근거자료가 된다.

R하우스는 원래 A신협 대출금과 일부 임차인이 설정한 임차보증금으로 인해 근저당이 설정돼 있었다. 건물주 이씨는 2015년 4월 R하우스를 담보로 새마을금고에서 총 54억원을 빌려 기존 근저당을 일시 해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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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영등포구 R하우스의 갭투자 대출과정에서 새마을금고 측이 발행한 대출전표 2장으로, 한 전표에는 대출 명의자의 인감이 없고 두 전표에 적힌 이름의 글씨체도 다르다. 피해자비상대책위 제공


이때 새마을금고가 발행한 대출전표 중 13장을 분석한 결과 이 중 7장은 대출자, 즉 이정석씨의 인감이 찍히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총 11억9000만원에 해당하는 대출금이다. 인감이 없는 대출전표에 적힌 서명에 대해 이정석씨가 “내 서명이 아니다”고 주장하면서 새마을금고 측이 문서 위조에 연루됐다는 의혹도 제기된다. 이정석씨는 “인감이 찍혀 있는 대출전표의 글씨는 내가 쓴 게 맞다”면서도 “인감이 없는 전표 서명은 내 것이 아니다. 딱 봐도 글씨체가 완전히 다르다”고 지적했다. 새마을금고 직원들이 대출실적을 올리려고 건물주 이씨의 서류조작을 묵인 또는 개입한 것 아니냐고 임차인들은 주장했다.

의정부지검 고양지청은 새마을금고가 보증금 사기에 관련돼 있다고 판단해 금고 대출담당자 4명 등을 사기방조 혐의로 수사 중이다.

검찰은 새마을금고 대출담당자가 부동산 담보 대출을 할 당시 R하우스의 시세와 보증금 액수를 정확히 확인할 의무가 있었는데, 현장 실사를 제대로 하지 않아 결과적으로 집주인 이씨의 갭투자 사기를 도운 결과가 빚어졌다고 보고 있다.

검찰은 서명이 위조된 R하우스 대출전표 등을 확보해 금고 직원들과 대출 브로커, 집주인 이씨 간에 금품수수가 있었는지도 확인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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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신탁회사가 R하우스에 대해 담보신탁을 하면서 발행한 문서에 ‘전세보증금을 돌려받을 수 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피해자비상대책위 제공


◆폭탄이 터져도 면책받는 신탁회사

금융기관으로서 ‘모럴해저드’가 새마을금고만의 문제는 아니다. 최근 신탁회사를 통해 대출을 받은 ‘담보신탁’ 부동산이 늘고 있는데 신탁회사의 도덕적 해이도 심각하다.

집주인이 담보신탁을 하는 이유는 더 많은 대출을 받기 위함이다. 일정 기간 부동산 소유권을 신탁회사에 넘겨 놓으면 금융기관에서 많은 대출을 받기가 훨씬 수월하다. 이 경우 담보신탁 부동산의 법적인 소유주는 신탁회사다. 하지만 신탁회사는 부동산 관련 채무나 임대차 피해와 관련해 모두 책임을 전혀 지지 않는다. 신탁회사들이 갭투자 위험성이 있는 건물인데도 신탁을 해주는 이유다.

영등포구 R하우스의 경우 M신탁사 대표이사의 직인이 찍힌 문서가 갭투자 사기에 활용됐다. 집주인 이씨는 2015년 4월 새마을금고 대출을 받을 때 담보신탁을 했다. 새마을금고 측 동의를 얻어 M신탁사로부터 문서까지 받았다. ‘임대차계약의 임대보증금은 우선수익자의 채권보다 선순위임’이라는 내용이 들어 있는 문서다. 새로 들어올 임차인들을 안심시킬 수 있는 내용이다.

이씨는 신탁사의 문서를 자신이 운영하는 공인중개업체에 넘겼고, 이씨에게 고용된 공인중개사는 이 문서를 활용해 임차인들을 모아 계약했다. 임차인들은 R하우스가 담보신탁된 사실을 알면서도 법적인 소유주인 신탁회사의 문서 내용을 믿고 임대차계약을 한 것이다.

결국 R하우스가 공매에 넘어가면서 진실이 드러났다. 신탁사와 새마을금고 측은 문서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신탁법에 어긋나는 것이라서 내용까지는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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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집값)보다 배꼽(대출금)이 큰 건물

갭투자에 나선 건물주들이 부동산에 얽힌 빚을 축소해 금융기관에 알리고 추가 대출을 받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러다 보면 건물 값보다 전체 빚이 많아지는 ‘역전현상’이 벌어진다.

건물주들은 주로 임차인의 보증금을 낮춰 금융기관에 제출한다. 보증금 액수는 부동산 등기부등본에 오르지 않기 때문에 건물주가 마음먹으면 계약서를 위조해 금융기관에 제출할 수 있다. 금융기관은 부동산 담보대출 시 현장 조사를 통해 임차보증금 액수를 정확하게 파악해 이 액수를 빼고 대출 비율을 산정해야 하지만 제대로 지켜지지 않기도 한다.

총 68가구가 피해를 본 상도동 T빌리지 사례가 대표적이다. 집주인 오모씨는 임차보증금이 40억원 수준인데도 새마을금고에는 17억1500만원으로만 신고했다. 새마을금고 측은 오씨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여 26억원의 대출을 실행했다. 세입자들의 실제 임차보증금 40억여원과 금융기관 대출금 26억원을 합치면 총 66억원에 이른다. 현재 이 건물 시세(58억원)보다 8억여원이 많은 금액이다.

새마을금고 측은 선순위 세입자들이 나가고 후순위 세입자들이 들어오므로 나중에 일이 터져도 손해를 보지 않는다. 반면 시간이 흐를수록 세입자들은 새마을금고보다 후순위 채권자로 밀려 피해를 고스란히 떠안을 수밖에 없다. 임대차계약이 대체로 2년 단위로 이뤄지다 보니 그 기간 차이를 이용해 새마을금고의 대출금만 확실하게 보장받는 셈이 된다.

문제가 생겨 공매에 넘길 권한은 금융기관에 있기 때문에 새마을금고로서는 적절한 시점에 공매를 부쳐 대출금을 회수하면 그만이다. 새마을금고중앙회 관계자는 “검찰 수사결과가 나오면 해당 직원과 지점에 대해 상응한 조치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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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 서울 영등포구에 위치한 R하우스 건물 입구에 ‘갭투자’ 피해 관련 소송을 알리는 현수막이 내걸려 있다. 이제원 기자


◆갭투자 물건 우르르 … 법원경매 증가

깐깐해진 대출조건과 부동산 경기 불황 등으로 갭투자 대상이 된 부동산들이 급격히 경매·공매로 넘어가고 있다. 한 명의 투자자가 수십, 수백채의 부동산을 소유하는 갭투자의 ‘연쇄부도’ 현상이다.

15일 법원경매 전문기업 지지옥션의 ‘2019년 6월 경매 동향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달 전국에서 진행된 하루 평균 법원경매 건수는 551건이다. 이는 5월 하루 평균 506건과 4월 평균 515건에 비해 증가한 수치다.

하루 평균 법원 경매 건수는 2016년 7월 이후 매달 400건대에 머무르다 올해는 3월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달에서 500건 이상을 기록하고 있다. 지난달 일평균 경매 건수인 551건은 2016년 5월 607건 이후 약 3년 만에 가장 많은 건수이기도 하다.

주거시설만 따로 봤을 때는 전월 대비 경매 건수가 소폭 감소했다. 지난달 주거시설의 법원경매 건수는 4865건이다. 이는 지난달 5261건 대비 감소한 수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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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6월 전국 법원의 입찰진행 일수가 5월보다 3일 적은 것을 감안해야 한다. 6월 법원 입찰진행 일수는 19일, 5월은 22일이다. 이를 감안하면 주거시설 경매 건수가 줄어들었다고 보기 힘들다.

주거시설 법원경매 건수는 지난달 5261건과 4월 5006건 등 연달아 5000건 이상을 기록했다. 전국 주거시설 경매 건수가 두 달 연속 5000건 이상을 기록한 건 2015년 3~4월 이후 처음이었다.

최근 전체 경매 건수 및 주거시설 경매 건수가 증가한 현상은 갭투자와 관련이 깊다는 분석이 나온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경기가 악화하고 동시에 주택시장까지 침체하면서 갭투자 물건이 경매로 나왔다는 분석이다.

장근석 지지옥션 팀장은 “최근에 전세가와 집값이 떨어지면서 수십 채에서 많게는 수백 채의 집을 가지고 있는 갭투자자의 집들이 한꺼번에 경매에 나오는 경우가 발생하고 있다”며 “이런 현상들이 주거시설 경매물건이 늘어나는 데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고 말했다.

김범수·이희진 기자 swa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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