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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시험 보다가 다리 부러진 이순신” 출처를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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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키스 〈청포를 입은 무관〉, 수채화, 78×56cm, 송영달 소장

임신년(1572, 28세) 가을, 훈련원 별과(別科) 시험에 참여했다. 말을 타고 달리다가 말이 넘어져 왼쪽 다리뼈가 부러졌다. 지켜보던 사람들이 공이 이미 죽었을 것이라고 했는데, 공이 한쪽 발로 일어나서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껍질을 벗겨 감싸니 과거시험장에 있던 사람들이 장하게 여겼다.

이 일화, 기억하시죠? 젊은 날의 이순신에 얽힌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어릴 적에 읽은 이순신 위인전에도 나오는 내용이고요. 그런데 정작 출처를 아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과거시험을 보다가 다리가 부러졌다는 이야기를 '읽은 기억'은 나죠. 하지만 누가, 언제 썼는지, 어떤 내용이고 어느 책에 수록됐는지는 대부분 모릅니다. 어린이용 위인전에 소개된 내용이라면 당연히 근거가 된 기록이 남아 있겠죠.

이순신의 조카가 쓴 최초의 이순신 전기

위의 인용문은 이순신의 맏형인 이희신의 아들, 그러니까 이순신의 조카인 이분(李芬, 1566~1619)이 쓴 겁니다. 전쟁이 나자 본가와 수군 진영을 오가며 이순신을 도운 분입니다. 그러니 누구보다도 삼촌에 대해 잘 알았겠죠. 삼촌이 1598년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이후 어느 시점에 조카가 삼촌의 일대기를 정리합니다. 이 기록이 바로 《이충무공행록 李忠武公行錄》(이하 《행록》)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순신 사후에 나온 최초의 이순신 전기(傳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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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무공전서 李忠武公全書》(국립해양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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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과 놀 때면 매번 진을 치고 전쟁놀이를 했는데, 아이들이 반드시 공(이순신)을 장수로 받들었다. 처음에 두 형을 따라 유학 공부를 했는데, 성공할 만한 재주와 총기가 있었으나, 매번 무인이 되고 싶은 뜻이 있었다. 22세 겨울에 무예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팔 힘과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것은 같이 공부했던 사람들이 (공의) 경쟁 상대가 되지 못했다.

군인이 될 운명과 자질을 타고났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위인전에도 빠지지 않는 내용이죠. 출생부터 사망까지 이순신 장군의 생애 전체를 정리한 기록은 《행록》이 유일합니다. "가정(嘉靖) 을사년(1545) 3월 8일 자시에 공은 한성(서울) 건천동 집에서 태어났다."로 시작해서 "외손녀는 한 명이다."로 끝납니다. 한 사람의 일대기로는 결코 짧지 않은, 그러면서 이순신의 삶에서 중요한 사건들을 빠짐없이 담은 소중한 기록입니다.

《행록》의 원본은 현재 전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초판본이 나온 시기를 이순신이 전사한 1598년에서 조카 이분이 사망한 1619년 사이로 보는 거죠. 하지만 원문은 조선 영조 대인 1776년에 활자본으로 간행된 《이충무공가승 李忠武公家乘》 6권 2책 가운데 권4에 수록됐습니다. 천만다행으로 이 기록이 남은 덕분에 훗날 간행된 《이충무공전서 李忠武公全書》(1795)와 《충무공유사 忠武公遺事》(18세기 이후)에도 원문이 포함된 겁니다.

병부랑(兵部郞, 정5품)인 자가 그와 사적으로 관계있는 사람을 관직 순서를 뛰어넘어 참군(參軍, 정7품)으로 임명하고자 했다. 공은 주무관리로서 허가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아래 직급인 사람을 순서를 뛰어넘어 임명하게 되면 마땅히 승진해야 할 사람이 승진할 수 없게 되어 이는 공정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법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라고 했다. 병부랑이 위협하고 강요했지만, 공은 굳게 고집하며 따르지 않았다. (중략) 그는 깊이 앙심을 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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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여지도》에 묘사된 녹둔도 (서울대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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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이순신은 종8품 훈련원 봉사였습니다. 자신보다 직급이 훨씬 높은 사람이 으르고 협박해도 끝까지 원칙을 굽히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일화죠. 《행록》의 기록만 보면 이순신의 3, 40대는 결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아부, 타협, 편법, 청탁…이런 말은 이순신의 사전에는 없었죠. 조카 이분은 이런 '원칙주의자'의 면모로 인해 삼촌이 뜻하지 않은 모함에 시달렸고 남들보다 출세도 늦었다며 몹시도 안타까워했습니다.

녹둔도 시절에 겪은 최초의 '백의종군'

녹둔도(鹿屯島)를 아시는지요? 두만강 하구에 있었던 섬입니다. 이순신의 시대에는 여진족 땅이 가까워서 군사적 긴장이 높았던 최전방 국경 지역이었습니다. 이순신은 1586년(42살)에 조산 만호(造山萬戶)에 임명돼 녹둔도에 부임합니다. 이듬해(1587년)에는 녹둔도 둔전관(屯田官)을 겸직하게 되죠. 이 해에 이순신에게 아주 중요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인근의 여진족이 대거 녹둔도로 쳐들어 온 겁니다.

적이 과연 군사를 일으켜 공의 나무 울타리를 에워쌌다. 붉은 털옷을 입은 자 몇 명이 앞에서 지휘하며 나왔다. 공이 활시위를 가득 잡아당겨 연이어 그 붉은 털옷을 입은 자들을 맞춰 모두 땅에 떨어지게 하자 적은 물러나 달아났다. 공과 이운룡 등이 뒤쫓아가 그들이 붙잡았던 군사 60여 명을 빼앗아 돌아왔다. 그날 공 또한 여진족의 화살에 맞아 왼쪽 넓적다리를 다쳤으나 부하들이 놀랄까 걱정해 몰래 스스로 화살을 뽑아버렸다.

이 전투에서 이순신은 후퇴하는 여진족을 추격해 포로로 붙잡혀 가던 농민 50여 명을 되찾아 돌아옵니다. 그런데도 당시 함경북도 병사는 여진족에게 공격을 당해 피해를 당한 책임을 이순신에게 뒤집어씌우기 위해 감옥에 가두고 조정에 모함합니다. 녹둔도를 지킬 군사를 보충해달라는 이순신의 거듭된 요청을 들어주지 않은 자신의 과오를 덮으려는 것이었죠.

이순신의 업적을 묘사한 조선 유일의 그림

제가 이 녹둔도 전투를 특별히 주목하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이순신은 결국 이 전투로 인해 임금으로부터 생애 첫 '백의종군(白衣從軍)'을 명령 받습니다. 정유재란 때의 백의종군과 비교해 보면 과정이나 결과가 정말 놀랍도록 똑같죠. 둘째, 이순신의 녹둔도 전투를 담은 조선시대 그림이 남아 있습니다. 고려대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북관유적도첩 北關遺蹟圖帖》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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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관유적도첩》에 수록된 수책거적(守柵拒敵)(고려대 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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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고려 예종 때부터 조선 선조 때까지 북관(北關), 즉 지금의 함경도 지방에서 용맹과 기개를 떨친 장수들의 업적을 그린 역사화 여덟 폭을 묶은 그림첩인데요. 이 중에서 수책거적(守柵拒敵)이란 일곱 번째 그림에 바로 이순신의 당시 활약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순신의 업적을 묘사한, 지금까지 확인된 유일한 조선시대 그림입니다. 백전백승의 명장으로 세계 해전사에 길이 빛나는 이순신의 수군 전투 그림이 없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 귀하게 여겨지는 그림이죠.

《행록》을 찬찬히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는 이순신 장군을 구국의 영웅이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로 칭송하고 존경한다고 말해 왔죠. 하지만 우리는 정작 이순신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민족의 영웅에 걸맞은 존경과 추모의 예를 제대로 보내고 있는가. 저 또한 한없는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그래서 이제라도 이순신의 일기와 《행록》이, 장계와 편지가 더 많은 이에게 진지하게 읽혔으면 좋겠습니다.

김석 기자 (stone21@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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